[역사탐방] 1961년 대한민국 역사에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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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1961년 대한민국 역사에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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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일 H시(거사 개시일시)는 5월 16일 새벽 3시로

^^^▲ 1950년 6.25 전쟁후 더더욱 배고픔과 가난을 대물림 하며 절망했던 대한민국(좌),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대한민국의 자주경제 재건을 위해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 당시 박정희 대통령(우)
ⓒ 뉴스타운^^^
혁명군 '봉화작전' 개시

5월 16일 0시에 혁명군은 행동을 개시, '봉화작전'이라 명명한 가장된 비상훈련을 실시하여 새벽 3시까지 계속된 목표물을 완전 점령할 것이며, 각 행동부대의 지휘관 및 참모들은

해병대 - 김윤근 준장 (여단장) 오학진 중령 (대대장) 조남철 중령 (부연대장)
제1공수단- 박치옥 대령 (단장) 김제민 중령 (대대장) 차지철 대위 (중대장)
제 30사단- 이갑영 대령 (참모장) 박상훈 대령 (부사단장) 이백일 중령 (작전참모)
제 33사단- 이병엽 대령 (연대장) 오학진 중령 (작전참모)
제 6군단 포병단- 문재준 대령 (포병사령관) 홍종철 대령 (군단작전참모) 신윤창, 백태하, 구자춘, 정오경, 김인화 중령 등 5개 대대장,
육군본부 사령- 장수영 중령
제6관구 사령부- 김재춘 대령 (참모장) 박원빈 중령 (작전참모장) 등이며, 각 행동 부대의 점령 목표와 담당 부서를 다음과 같이 수정 결정하였다.

제 1공수단- 제 1선두대로서 일부 병력은 반도호텔과 통신, 방송 기관을 점령 후 요인 체포를 담당하고 있는 특수 임무 수행대에 인계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중앙청, 국회 의사당 등의 정치 중심 기관을 점령 할 것,

해병여단 - 제 2대로서 내무부, 치안국, 서울시 경찰국을 점령하고 만일에 대비하여 서울 북부 외곽지대와 남산에 병력을 배치.

제 33사단 - 제 3대로서 시청앞과 덕수궁에 위치하여 HLKA, HLKY 방송국과 국제 전신전화국, 마포 형무소의 점령 및 서울 시내 배전소 경비 임무를 담당.

제 30사단 - 제 4대로서 중앙청, 청와대, 시경, 탄약고, 서대문 형무소, 연희 송신소를 점령 경비.

제 6군단 포병단- 제 5대로서 5월 16일 새벽 3시 40분까지 육군본부에 집결 대기하여 예비대로서 임무 수행 등을 결정하고 핵심요원들의 임무를 보장하여 김종필과 이낙선 소령은 전반적인 연락 업무와 점령성공 후에 필요한 인쇄물의 준비 및 각 점령부대에의 배포를 담당하고 박종규 소령은 반도호텔에서 장면 총리를 체포하고, 오치성 대령, 김형욱, 김동환중령 등은 반혁명적 기운 및 국내외의 정보 취급을 담당하는 한편 제1공수단 병력을 인수하여 국무위원급 요인의 체포를 분담하고, 유승원 대령, 이석제, 김재후, 이형주 중령 등은 중앙, 기독교 방송국 및 방송 중계소를 공수단 2개 소대 병력으로 점령하며, 한국찬 대령과 장수영 중령 등은 육군 본부의 본부사령 병력을 장악하여 명령을 대기하기로 하는 한편 제1군 사령부의 조창대, 이종근, 박용기, 심이섭, 엄병길 중령 등은 제1군 사령부내에서, 그리고 정문순, 윤필용 중령은 진해 소재 육군 대학에서 각각 혁명에 대한 지지활동을 담당하게 하는 등을 결정하고 협조 사항으로 다음과 같이 시달했다.

1, D일 H시(거사 개시일시)는 5월 16일 새벽 3시로 한다.

2, 특수 임무대는 D일 H시 30분전에 영등포 김포간의 삼차로 통제 지점에서 공수단 병력을 인수하여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다.

3, 각 부대는 점령지역내 도로를 차단하고 철저한 검문 검색을 실시한다.

4, 혁명군 지휘 본부는 상황의 변동에 따라 제6관구 사령부를 제1지휘소로, 남산을 제2지휘소로, 육군 본부를 제3지휘소로 각각 결정한다.

5, 특수임무대 요원들은 5월 16일 0시까지 제6관구 사령부에 집결하여 각 부대의 출동을 독려하기 위한 비상훈련 감독조를 편성한다.

6, 제1군 및 제2군에 내응하는 부대는 5월 16일 오전 5시 수도 점령의 방송과 더불어 행동을 개시한다. 이상과 같은 사항을 결정하고 이어 각 행동대의 구체적인 작전 계획이 하달되었으며 각자 임무 수행을 위하여 출발하였다.

그간 수차에 걸쳐 항간에 유포되었던 4월 위기설과 군부내의 구데타설에도 그 확증을 잡지 못하고 다만 정군 운동에서 빚어지는 모략과 풍문으로만 알고 있던 안일한 장면 정권은 이와같이 위기가 목전에 달하였음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으니 이 나라의 위정자들의 위치와 그들이 국록을 받는 자들로서 국민으로부터 수임된 국민의 안녕과 복리의 증진 그리고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마땅히 행하여야할 치정에 우리네 위정자들이 얼마나 무기력한 안일에 젖어 이를 등한시하였던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10여년간의 독재정권에 만신창이가 되어 신음하던 이 나라 백성들이 지불한 너무나 값진 대가인 4월의 광장을 붉게 물들인 꽃다운 젊은이의 선열로 쟁취한 민주의 권리와 자유는 겨우 1년이 지나자 다시금 무력에 의한 혁명이라는 벅찬 시련을 다시 받아드려야 하였다.

<다음은 실패한 저지 명령과 혁명의 첫 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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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로새끼 2007-04-20 12:50:36
    호로새끼야 쿠테타가 혁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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