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저 바람의 색깔을 그릴 순 없을까?”
“….”
친구는 항상 말이 없었다. 나는 또 물었다.
“친구야 저 음악관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는 어떻게 그림을 그리지?”
친구는 역시 말이 없었다.
책을 보다 지겨워지면 친구와 함께 미술관 창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았다. 겨울, 채 다 떨어지지 못한 마른 잎들이 나뭇가지에서 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렇게 슬프게 흔들리는 나뭇잎의 움직임은 어떻게 그리지?”
“….”
나는 미술관 밖에 나와 벤치에 않아서 한참동안 귀 기울여 소리를 들었다. 나뭇잎이 차가운 겨울 공기의 흔들림에 떨리는 소리를, 잎에 남아 있는 마지막 수액이 말라가는 소리를, 그리고 그 나뭇잎의 소리를 듣는 내 주위로 인생이 스쳐지나가는 그 쉼 없는 시간의 흐름 소리를.
“친구야. 시간이 흐르는 모습은 어떻게 그림을 그리지?”
나는 계속 질문을 쏟아내었고, 친구는 말없이 내 질문을 듣고만 있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그림을 좋아하고,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옆에서 물감의 냄새를 맡는 것을 좋아할 뿐이었던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었다.
내가 그린 그림은, 종이를 반쪽으로 나누어 한쪽에 잎이 우거진 나무를 그리고 남은 반쪽에 잎이 다 진 수척해진 나무를 그린 것이었다. 초등학교 학생수준의. 나는 또 그림을 그렸다. 자그마한 언덕에 사람이 미소를 띠고 하늘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그림과, 사람이 없어진 언덕에 자그마한 돌무더기가 쌓여진 그림이었다.
친구는 그림을 보고 여전히 미소를 보였을 뿐이다. 문구점에 갔다. 나는 그곳에서 시간이 지나는 모습과, 바람이 불어오는 모습, 음악을 그린 그림을 보았다. 문구점 진열대에 꼽힌 그림엽서에서였다. 갖가지 그림엽서에는 바람에 나뭇잎이 흩어지는 모습, 피아노 치는 사람 옆에 음표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 옆에 시계가 움직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그런 그림엽서들을 잔뜩 사가지고 친구에게 달려갔다.
“친구야. 이것 어떠니?”
친구는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나에겐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미술잡지를 보여주었다. 그곳엔 내가 가지고 온 엽서보다 훨씬 더 내 의문들을 잘 그려놓은 그림들이 많이 있었다.
“이걸 왜 이제야 나에게 보여주는 거야. 왜 이제까진 가르쳐주지 않았어?”
나는 물었다.
“스스로 찾고, 스스로 질문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야.”
친구는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듯한 엉뚱한 답을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는 항상 그런 식이었고, 그래서 나는 친구를 좋아했었다.
“너는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그리기 위해선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봐야 해. 그러면 마음에 그릴 수가 있게 될 거야.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바람이 있어도, 바람이 없어도.”
언젠가 친구와 어둠이 깃든 미술관 앞 벤치에 않아 막걸리를 먹을 때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네가 가져온 엽서에 있는 바람도 좋은 바람의 좋은 모습이야. 그 엽서의 그림에 있는 바람이 네가 진정 그리고 싶은 바람이었다면, 그 그림을 네 마음에 담으면 돼. 그 그림을 좋아하고, 아끼고, 자주보다 보면 그 그림은 네 그림이 되겠지.”
그리고 친구는 또 말했다. 평소에 말이 없던 친구의 입이 한번 열리자 친구는 막걸리 몇잔의 기운을 빌어선지 평소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한번에 다 내어놓는 것 같았다. 그 많은 말을 담아놓고 어떻게 그리도 조용하게 미소만 짓고 살아왔을까.
“그림은 캔버스에만 그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그려진 그림만이 그림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 그게 진정한 그림인 거라고 생각해. 그걸로 충분히 아름답지 않을까?
나 같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네가 그리고 싶어 하는 그 바람 같은 것을 캔버스위에 나타내려고 해. 내가 하는 것은 일이고, 그건 직업의 영역에 속하는 거지. 하지만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그릴 수 있단다.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자신이 직접 그리고 싶은 것을 자신이 직접 그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네 스스로가 그림을 그려보려고 해봐. 마음에, 하늘에, 그리고 공부하다 문득 바람의 생각이 나면 공부하던 그 노트나 책 귀퉁이에 한구석에….”
그날부터 나는 화가가 되었다. 하늘은 내 캔버스가 되었고 나무를 스치는 바람과, 내 발밑에 밟히는 낙엽, 흐르는 물소리, 소리 없이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 이름모를 새의 울음소리, 아침의 정결한 기운들…. 그런 것들이 내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공부를 하다가도 문득 갑자기 무언가를 표현해 보고 싶은 강한 열정에 휩싸일 때가 있으면 친구의 말대로 책 한 모서리에 낙서처럼 무언가를 그려놓기도 하고, 노트 뒷장에 무어라고 낙서처럼 휘갈겨 놓기도 하였다. 그림을 하늘에 그릴수도 있듯이, 내가 그리고 싶은 이미지의 느낌을 낙서 같은 글로 남길 수도 있다고 생각 했으니까.
세월이 지난 후 요즘도 가끔 예전에 보던 책의 책장을 넘기다보면 당시의 내가 남기고 싶었던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만나곤 한다. 바람도 보고, 별도 보고, 외로움도, 청춘의 열기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반가움과 그리움에 휩싸이곤 한다.
남이 보아선 그런 알 수 없는 그림이나 낙서나 무슨 뜻인지 책을 더럽히는 하찮은 것일 뿐이겠지만, 내손으로 그것들을 남긴 나에게는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서 다시 나를 젊은 날의 그 애틋한 느낌으로 데려가 주는 소중한 추억의 기록이다. 그래 그것들은 이제 무척이나 소중한 나의 보물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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