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 보는 남대문 3.1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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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보는 남대문 3.1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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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1919년) 3.1 절 VS 1947년 3.1절

살벌한 좌우충돌의 열전

38선을 중심으로 한 미.소 양군의 분열 밑에서 찬탁과 반탁의 기로에서 민족이 겪은 시련은 88년전 기미년(1919년)3월 1일 독립만세이후 28년만에 찾아온 1947년 남대문 3. 1사건으로 살벌한 좌우충돌의 열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좌우를 초월하여 모두가 반탁을 선언하였으나 좌익계에서 찬탁으로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두파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우리는 8.15해방 무렵까지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서로가 민족의 광복을 위하여 한덩이가 되어 그러나 결과는 혼란의 불연속선뿐이었고 해방 직후 기쁨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와 우의 개념조차 분별하지 못했다.

1947년 뜻 깊은 3.1절 행사 때 발생한 ‘남대문 3.1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은 좌가 무엇이고 우가 무엇인가를 알게되었다. 1947년 3월 1일 삼일절기념행사를 좌파와 우파가 별도로 치루면서 시작되었다. 이날 서울에서는 서울운동장과 남산공원 두 곳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우익측이 주최한 서울운동장 대회는‘기미선언 전국대회’라 하였고 좌익계 민전에서 주최한 남산 공원대회는 ‘3.1기념 시민대회’라 했다. 이날 12시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대회에는 하지 중장을 대신한 브라운소장 등 군정 당국자가 참석, 대회 도중 신탁통치 결사 반대를 외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 보내는 메시지를 결의한 후 오후 1시 30분 대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한편 남대문 대회는 남산 꼭대기에 있는 광장에서 시작되어 민청원을 비롯한 각 단체의 축사 낭독 등으로 오후 3시경에 끝났다. 그러나 일부에서 시가행진에 나서면서 이날의 축전은 살벌한 좌우충돌의 열전을 빚게되었다. 오후 1시반 대회를 끝마친 ‘기미선언 전국대회’에 참가했던 학련을 선두로 일부 학생들과 청년단체는 시가 행진에 돌입하여 군정청 앞,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서울역 앞에서 일단 해산하기로 하였으나 그대로 무리를 지어 남대문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들이 남대문 주변에 이르렀을 때 공교롭게도 ‘3.1기념 시민대회’측도 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동여맨 민청원들을 선두로 하여 남산에서 내려왔다. 바로 그때 어느편에서 먼저 투석을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함성과 함께 돌팔매질이 시작되었다. 얼마동안 험악한 상태가 남대문에서 계속되고 남대문 근처에 배치되어있는 경찰대가 지하도에 숨어서 발포를 개시한 것이다.

이 소란한 틈에 당시의 수도청장 장택상과 수도청 간부, 수많은 기마 경찰대원이 출동, 사태를 수습, 1시간 후 군중들을 해산 시켰으나 이날 석간에는 ‘축전 끝에 불상사. 경찰 발포로 수명사상’으로 보도되고 당시 전국 일대에 걸친 3.1절 행사의 참사를 보도 논평한 신문들은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관의 잘못인가, 민의 잘못인가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에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전국각지에서 발생하여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좌.우익 사이에 갈수록 반목이 더하여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틈만 있으면 싸움을 벌일 때였다. 민족은 가는 곳마다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던 때인 만큼 3.1절이라하여 예외는 아니었다.

3.1절 기념행사가 폭동으로까지 확대되어 사상자가 무려 40여명이나 되었다면 숭고한 3.1정신이 무색해지고 만 것이다.

전국적으로 확대 일로

한편 이날 3.1절 행사를 기화로 부산등 지방 각지에서 일어난 충돌사건은 다음과 같다. 부산에서 열린 민전 주최 시민대회에서는 대회가 끝날 무렵 갑자기 괴한이 등단하여 연사를 구타하자 군중들이 흥분하여 돌을 던졌다. 경비중이던 경관대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상을 참사를 빚었다.

이날의 참사는 민전측이 이승만박사를 이완용이라고 모욕하는 축사를 하자 광복청년단원 3명이 그 연사를 구타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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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이슬 2007-03-01 17:18:16
    삼일절 독립만세 운동이 1919년 ~1947년의 해방후 첫행사
    38선 이북의 좌익 이데올로기의 폭동이 시작된 3.1 남대문 사건.이후~ 광주 폭동사건 까지 끊임없이 내려와...
    양태는 다르나 본질은 변함없이 오니...
    "이젠 건강해서 우리가 역사를 바로 잡아야죠!" 선배가 준 연하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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