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뫼비우스의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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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권지예 두 번째 소설집 <폭소> 펴내

 
   
  ^^^▲ 권지예 <폭소> 표지
ⓒ 문학동네^^^
 
 

"독자를 상쾌하게 하는 풋풋한 감응능력, 눈썰미 있는 세심한 관찰, 가쁜 호흡의 속도감 있는 문장이 권지예 단편의 매력적인 특징이다. 소재의 반복성을 넘어서고 삶 경험의 무게를 곁들이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유종호, 문학평론가, 연세대 교수)

톡톡 튄다? 그렇다. 최근 문단에 얼굴을 새롭게 들이미는 신예작가들의 글을 읽어보면 깜짝 깜짝 놀랄 정도로 톡톡 튀는 글들이 많다. 이러한 것은 1997년에 등단한 권지예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권지예는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세심한 눈썰미까지 갖추고 있다. 그래서 더욱 신선하다. 문장은 공처럼, 내용은 심장처럼 톡톡 튄다.

지난 해 <뱀장어 스튜>로 제26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톡톡 튀는 작가 권지예(43)가 두 번째 소설집 <폭소>(문학동네)를 펴냈다. 폭소? 그래. 이 폭소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그런 웃음이 아니다. 권지예가 바라보는 폭소는 섹스 중에 내는 야릇한 교성 대신 터뜨리는 그런 폭소이다.

그래. 권지예에게 있어서 더 이상 금기의 벽은 없다. 어디든지, 또한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리고 사실 그대로 까발린다. 느릿느릿 까발리는 것이 아니라 쌩, 하고 달리는 오토바이처럼 재빠르게 까발린다. 숨이 찰 정도로. 그러나 그 가쁜 호흡 속에서도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작가 권지예가 N세대가 아닌가, 착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권지예는 1960년에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이미 4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고 있다. 이는 그만큼 사회적 경험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의 소설은 N세대처럼 가쁜 호흡 속에서도 어떤 대상에 대한 속내 깊은 눈썰미가 빛을 내는 것이다.

이번에 펴낸 <폭소>에 실려 있는 작품 또한 작가의 폭 넓은 경험이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다. 단지, 첫 소설집 <꿈꾸는 마리오네뜨>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짧게 간추려서, 권지예의 첫 소설집이 자전적 체험과 가족사, 그리고 죽음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면, 이번 소설집은 그 가족사와 죽음에서 탈피하여, 이제는 주변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폭소>에는 표제가 된 '폭소'를 비롯한 7편의 중·단편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실려 있다. '누군가 베어먹은 사과 한 알', '스토커', '설탕', '풋고추', '행복한 재앙', '내 가슴에 찍힌 새의 발자국'이 그것들이다.

'폭소'는 자폐아인 어린 아들 때문에 가정이 해체될 위기를 맞은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동반자살 하기 위해 바다로 향한다는 그런 내용이다. 언제나 말없이 자폐아인 아들을 돌보던 아내. 그 아내가 언젠가부터 섹스 중에 교성 대신 폭소를 터뜨린다. 그래. 이 폭소는 다름 아닌 삶의 무자비함에 대한 통곡이자 조롱이 아니겠는가.

'누군가 베어먹은 사과 한 알'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용복이 각시의 이야기다.

'스토커'는 말 그대로 스토커에게 쫓기다가 주인공 스스로 스토커 같은 짓을 하게 되는 내용이며, '풋고추'는 첫 경험을 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어처구니없이 실패한다는 그런 이야기다.

'행복한 재앙'에서는 교통사고를 당해 개인병원에 입원한 주인공의 눈에 비친 병원의 모습, 그리고 보험회사간의 이전투구를 그린 중편소설이다. '내 가슴에 찍힌 새의 발자국'은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은 탓에 다리가 불편한 소연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이야기다.

문학평론가 김미현은 말한다.

"권지예의 소설은 90년대 문학이 지나온 터널 끝에서 만나게 되는 눈부신 햇빛 같다... 주체의 죽음 이후 주체를 다시 살리려는 움직임이 실감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권지예 소설의 '밝음'은 터널을 통과하기 이전의 밝음과는 전혀 다른 밝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권지예가 이번에 펴낸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애인이다. 그리고 그 장애인을 보살피는 비장애인이 나온다. 하지만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이 될런지도 모른다.

희망과 욕망과 모순이 이리저리 마구 뒤엉켜 있는 사회. 그래서 작가는 그런 모습을 '행복한 재앙'이라고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 작가가 말하는 '행복한 재앙'이란 바로 흑과 백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흑은 절망의 세상이요, 백은 희망의 세상이다. 또한 깊은 어둠이 없다면 어찌하여 찬란한 밝음이 드러날 수 있겠는가. 이처럼 권지예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희망 속에서도 절망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폭소>의 또다른 이름은 바로 '뫼비우스의 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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