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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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홍희담 첫 소설집〈깃발〉펴내

 
   
  ▲ 홍희담 <깃발> 표지
ⓒ 창작과비평사
 
 

"적적해지면 편하게 앉아 눈을 감는다. 온갖 상념들이 들끓지만 문득 정적이 찾아올 때도 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가을날의 잠자리처럼 투명해지지 않을까. 늙어가는 것도 괜찮은 일인 것 같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23주년을 앞두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본질을 정면으로 다룬 첫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던 '깃발'의 작가 홍희담(58)씨가 첫 번째 소설집 <깃발>(창작과비평사)을 펴냈다. 1988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깃발'을 발표한 뒤 무려 17년이나 걸린 셈이다.

<깃발>에는 표제작 '깃발'을 포함, 그 동안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5편의 중단편이 그날의 처절했던 함성처럼, 그리고 그날 스러져간 사람들이 구천을 떠돌며 이 세상에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처럼 무겁게 실려 있다. '깃발',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문밖에서', '김치를 담그며', 이제금 달이'가 바로 그것들이다.

중편소설 '깃발'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최후 결전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수작이다. 특히 계급적 관점과 반제국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쓴 이 작품은 어머어마한 폭력 앞에서도 끝내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 항거했던 80년 오월 광주의 진실을 사실 그대로 파헤친다.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둬.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가를..."

그랬다.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이라는 절규처럼 당시 도청에서 끝까지 싸웠던 사람들은 지식인계층이 아니라 소설 속에 나오는 형자처럼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부분이 그 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이다.

"'오월'의 역사와 함께한 영혼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임규찬은 이렇게 말한다. "학생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주도의 초기국면에서 민중 주도로 넘어가는 항쟁의 실제적 변화과정을 노동자의 눈으로 침통하게 묘파"했다고. 그리하여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해석"해냈다고.

그래. 임규찬의 지적처럼 광주민주화운동은 일부 지식인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지식인들은 초기에 잠시 불씨를 지펴놓았을 뿐, 결국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체는 광주에서 선량하게 살아가던, 그 알량한 지식조차도 없어 보이던 시민들이었다. 그래서 시민군이었던 것이다.

또한 '깃발'에서 작가는 그 동안 지식인의 눈에서만 바라보았던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빽없고 무지렁이 같아 보이던 노동자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광주민주화운동이 8년이나 지난 뒤 발표했던 중편소설 '깃발'의 가장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이번에 작가가 펴낸 <깃발>에는 '깃발' 외에도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를 포함한 네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 네 편의 작품들도 모두 5.18의 경험을 소설로 형상화한 것들이다. 다만 '깃발'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나머지 네 편의 작품은 모두 광주민주화운동 이후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는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형철과 그런 형철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원죄에 가까운 죄의식이 깔려 있다. 도청을 사수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결국 뇌수를 다쳐 정신병원에서 살고 있는 형철, 형철을 돌보고 있는 가족들, 그리고 그런 형철을 사랑하다가 은둔자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되는 인하...

'문밖에서'는 주인공 영신이 항쟁기간 중에 죽은 임산부의 얘기를 듣고 자신이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평생 죄의식을 안고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김치를 담그며'는 희영과 그의 딸 여진이 김치를 담그며, 항쟁을 겪은 뒤 조울증에 시달리다 투신자살한, 항쟁 당시 여성운동권의 대모 수연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이제금 저 달이'는 도시에 있는 공장에 다니는 아들과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어머니를 주춧돌로 삼아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를 그린 작품이다. 특히 노동자 광한이 노조를 없애려고 하는 회사측과 싸우는 과정, 그리고 '고추싸움'을 통해 농민들의 삶을 갉아먹는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벌교댁의 모습은 인상 깊다.

그렇다. 오월 광주는 오늘도 잠들지 못한다. 그날 그 죽음의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한, 그리고 그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한, 오월 광주의 깃발은 우리 역사 속에서 영원히 내려지지 않을 것이다.

"삶의 엄중함 못지않게 작업의 준엄함을 말없이 깨우쳐주신 백낙청 선생님과 황석영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중에서 황석영 선생님께 감사드린다는 작가의 말도 눈에 띈다. 그렇다. 홍희담은 황석영의 첫 부인이 아닌가. 그래. 비록 부부의 연은 끊어졌지만, 이제 홍희담과 황석영은 동시대 문학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지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 1남1녀를 두고 있는 작가 홍희담은 지난 2000년 광주에서 경기도 광명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한편, 80년 오월의 광주를 그려낸 문학작품으로는 임철우의 장편소설 <봄날>과 문순태 장편소설 <그들의 새벽>, 5.18 20주년 기념 소설집 <밤꽃>, 황지우 희곡 <5월의 신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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