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트원 피셔 (Antwone Fisher, 2002) | ||
2003년 5월의 끝무렵 서울의 한 조그만 스크린에서 그를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면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런 즐거운 꿈에서 깨고 만다. 그가 꿈꾸고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그가 바라는 소망의 세계인 것이다.
이 영화가 가슴 절절하게 다가오는 이유, 그것은 그가 고아라서가 아니고, 또 그의 과거가 불행했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자신이 안고 있는 아픔과 상처를 제롬을 통해 치유해가는 과정에서 그가 느꼈던 인간애가 우리에게도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식적인 것도 아니고 작위적인 것도 아니다. 앤트원과 제롬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전해져오는 그들의 잔잔한 아픔과 성숙 앞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고 또 그들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앤트원. 그는 수양모에게서 온갖 핍박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견디기 힘든 그곳을 도망쳤고 남성의 집을 거치고 또 노숙자 생활을 거쳐 친구의 죽음 이후 군에 입대한다. 그곳에서 그는 제롬을 만난다. 정신병자로 취급받는 앤트원. 그러나 제롬은 그를 따뜻한 마음으로 보살피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자연스럽게 그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앤트원을 치유해주는 것은 충고나 상담이 아니라 앤트원의 말을 들어주는 제롬이다. 제롬은 그가 말할 때까지 묵묵히 인내하며 기다렸으며 드디어 앤트원이 입을 여는 순간 치료는 시작된다. 그러니까 앤트원을 치료해준 것은 제롬이 아니라 앤트원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어떤 이들은 충고를 위한 충고를 한다. 때로는 그것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일종의 자만감인 줄도 모른 채 그는 자기 만족감에 빠져 상대에게 아낌없는 충고를 하기도 한다. 약간의 조언은 필요하겠지만 필요 이상의 충고는 상대를 더욱 더 절망감에 빠뜨리게 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심리란 참 묘하다. 충고가 필요할 때는 늘 그 사람이 존경스러워 보이고 잘 따르다가도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충고가 필요없게 될 때 그동안 자신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 사람의 얘기가 우습게 들리기 시작한다. 제롬은 그런 면에서 명의다. 자신의 충고가 더 필요없다는 판단이 들자 제롬은 앤트원과의 판단을 주저없이 끝내버린다. 그러나 앤트원은 원하지 않는다. 결국 제롬은 상담의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를 통해 앤트원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가족이 있는 사람도 가족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족이 없는 앤트원은 얼마나 가족이 그리웠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조금 더 그리워하고 조금 더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 덴젤 워싱턴이 감독한 이 영화의 연출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물론 제롬의 개인적인 아픔이 너무 변두리에 머문 얘기라 설득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감동적인 라이프스토리를 만난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올해는 <앤트원 피셔>와 더불어 나의,우리의 그리고 세상의 아픔을 <정신치료>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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