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좌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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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좌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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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산업혁명과 엔지니어링 어프로치 - ⑤

 
   
  ^^^▲ 조국근대화를 위해 산업화, 농업식량안보, 산림녹화 등을 위해 헌신하신 박정희 대통령조선조 말기까지 우리나라에는 거부(巨富)라는 존재는 없었다. 경제용어로는 민족자본(民族資本) 형성이 안된 전근대적 사회였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이니 국가재정도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조선조시대의 부자는 어느 정도였을까?

부자가 되는 길은 농토를 많이 마련해서 소작료를 많이 거두어들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상업」이나「공업」으로 돈을 번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선조시대「100석지기」라면 부자소리를 들었다. 천석군이라고 하면 큰 부자를 지칭하는 말인데 추수를 1,000석(石)한다는 뜻이다. 1,000석 이라면 쌀로 환산하면 80kg쌀로 1,000가마니. 현재(2000년) 쌀 한가마니 값이 18~20만원이니 약 2억원 정도이다. 현재 감각으로는 큰 부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는 관으로 부터의 수탈이 통례화 되어 있던 시대여서 어떤 개인이 농토를 많이 갖고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부자는 3대를 못 간다」라는 말이 있었는지 모른다.

조선조 말기까지 우리나라에는 거부(巨富)라는 존재는 없었다. 경제용어로는 민족자본(民族資本) 형성이 안된 전근대적 사회였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이니 국가재정도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1964년 당시의 우리나라 경제력

산업혁명이 일어난 해인 1964년 당시의 우리나라 국력을 알아본다.

우리나라가 (1910년) 일본에 강점 당한지 반세기가 지난 후의 일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시점으로부터는 약 40년 전의 좌표이다.

국력을 나타내는 척도의 하나가 정부예산이다. 1964년도에 세출예산액 1,908억원 중 1,580억원(82.8%)을 집행했다. 당시는 책정된 예산을 전부 써버리는 것이 아니고 절약해서 쓰고 남는 것은 국고에 들어가던 시절이다.

이 집행액 중 15.6%인 247억원이 대충자금, 즉 미국원조액이다. 1,333억원만 우리나라 국민이 부담한 것이다. 당시의 환율은 1$=256.53원. 이상 금액을 달러로 환산하면,

▶ 1964년도 세출예산 1,908억원 = 7.44억 달러

▶ 1964년도 집행실적 1,580억원 = 6.16억 달러

▶ 1964년도 국민부담 1,333억원 = 5.20억 달러

가 된다. 약 5~7억 달러라는 규모이다. 2001년 정부예산 100조원 즉 833억 달러(100조원÷1,200원/$)와 비교하면 약 100분의 1의 규모이다. 그간 미국의 물가도 올라갔으니 직접적인 비교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우리나라 국력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100년간 특히 최근 40년간의 변화는 참으로 놀랄만하다.

60년대에 들어서서 우리나라가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사(士)는 테크노크라트로 바뀌어지고, 천시받던 상(商)은「수출제일주의」로, 공(工)은 수출품을 생산하는「공업입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농(農)은 실업문제로 인해 국가와 국민에게 큰 부담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산업혁명은 사회혁명까지 유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우리나라에 인접해 있고, 우리나라와 동일한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 현재는 경제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는 일본, 대만, 중국, 홍콩, 싱가포르 등과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이 차이점이 경제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따라서 경제정책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농업에 대해서 살펴본다.

우리나라의 농업 : 우리나라는 도시국가이다.

고래로 우리나라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농업국가이다.그 실상을 살펴보자.

 

 
   
  ^^^▲ 우리나라의 국토와 인구(1964년 기준)
ⓒ 경제기획원 통계인감(1965년)^^^
 
 

1) 우리나라의 국토면적은 98,431평방㎞로써 10만평㎞이다.
(註: 매해 간척면적이 늘어나서 1999년의 국토면적은 99,434평방㎞이다).

2) 농경지가 20,802평방㎞로써 약 21%를 차지할 뿐이다. 우리나라는 높은 산은 없지만 임야가 68%나 점한다. 스위스 같은 나라는 고지대가 평탄해서 목축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은데 우리나라 산(山)은 굴곡이 심해서 축산업에도 적합지 않다.

3) 인구는 1964년에 2,756만명이다. 국민 1인당 국토면적을 구하면 3,521평방미터로써 1,068평밖에 되지 않는다. 농경지는 1인당 744평방미터(225평) 뿐이다.
(註: 그 후 인구는 계속 늘어나서 현재는 4,500만명을 넘어섰다. 머지않아 국민 1인당 국토면적이 2,000평방미터(약 600평)로 줄어들 것이며, 국민 1인당 경작면적이 100평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도 시간문제이다).

다음에는 1964년 당시의 농가 사정을 알아보자(<아래 도표 참조>).

 

 
   
  ^^^▲ 농가당 경작면적(1964년 기준)
ⓒ 경제기획원 통계인감(1965년)^^^
 
 

이 표를 보면 농업인구는 1,555만명이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 2,796만명중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55.6%가 된다.

가족계획도 실시되지 않을 때이니 가족수는 6.35명이나 된다. 이들 한 가족이 경작하는 농토는 논(畓)이 1,557평, 밭이 1,122평, 합계 2,679평이다. 농가 한 사람당 경작면적은 논(畓)이 246평, 밭(田)이 177평, 합계 423평이다. 여기서 나오는 소출 갖고 1년간 먹고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릿고개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영세한 농업이지만 1963년의 총 GNP(경상가격)중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42.4%나 된다. 이해 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10.3%, 도소매업은 10.5%, 서비스업이 9.9%인데 이들과 비교하면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다. 통계상으로 보면「농자는 천하지대본」인 나라이다.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이 인구가 많고 국토가 좁아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를 도시국가라고 한다면 우리나라는 이 부류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나라에서는 식량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홍콩이나 싱가포르에서는 장사를 해서 달러를 벌어 그 돈으로 식료품을 수입하고 있는데 도시국가의 좋은 예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들 나라와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농업」이나 「농민」이라는 존재가 무시할 정도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농자는 천하의 대본」이라는 존재이고 실업상태의 농민이 전 국민의 56%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국가경제 개발에서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농가실태

보릿고개 때가되면 아사한 절량농민에 대한 신문기사가 전국 여기저기서 등장한다.

아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굶고 있는 농민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정부로서는 절량농민을 방치할 수는 없다.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하는 절대적인 책임이 정부에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보릿고개」를 겪고 있는 농민의 생활대책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우선 혁명 직후 농민의 암적 존재였던 고리채를 해결했다.

1964년에 극심한 한발이 있자 지하수 개발에 힘썼고, 67, 68년도에 또 다시 심한 가뭄이 있자 본격적인 수리안전답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67년에 58%인 수리안전답을 85%까지 향상시키겠다는 목표 하에 추진했는데, 71년에 81%, 79년에는 87.3%까지 향상시켰다.

기계화 영농을 하기 위해 경지정리 사업도 추진했다. 축산, 잠업, 연안과 내수면 양식도 권장했으며, 특용작물(양송이, 과일, 담배 등)도 장려했다.

비닐을 사용해 볍씨 파종을 일찍 시행하여 수확을 빨리 끝내게 하고 보리농사를 짓는 이모작(二毛作)도 널리 보급시켰다. 특히 겨울철의 농한기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비닐하우스 농법을 권장했다. 모두 농민의 소득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다. 종자 개량도 했다. 새마을 운동도 실시했다.

그 결과 많은 효과가 발생하기는 했으나 도시나 공장 근로자의 노임이 더 급격히 인상되어서 농민의 소득과는 큰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농촌 사람의 살림살이가 도시 사람보다 훨씬 못하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농가의 소득이란 쌀을 판 돈이 거의 전부였다. 그래서 농민은 꽁보리를 먹고 될수록 많은 쌀을 팔아서 생계에 보탰다. 농민에게는 쌀값이 곧 임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농민의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는 쌀값 인상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매해 쌀 수매가를 올려주었다.

그런데 쌀 값이 올라가면 야채 값, 고기 값, 생선 값, 계란 값 등 모든 식료품값이 덩달아 올라간다. 서울소비자물가의 가중치를 1,000으로 잡는다면 1964년 당시 식료품의 비중은 464.4나 되는 때이다. 그러니 생필품값의 46.4%나 차지하는 식료품값이 올라간다는 것은 그만큼 생계비(生計費)가 올라간다는 뜻이다.

쌀값이 올라가면 도시민의 생계도 그만큼 힘들어지게 되니 급료를 올려주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인건비가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인건비가 올라가면 공산품을 위시해서 모든 물건값과 공공요금이 올라간다. 물가가 올라가면, 농민의 생계가 곤란해지니 정부는 또 쌀값을 올려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도표 5-5>에서 보듯 「쌀값 → 생계비 → 인건비 → 물가 → 쌀값 →」인상의 악순환이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 쌀값 인상의 악순환 고리^^^  
 

정부는 빈곤한 농민의 생계를 돕기 위해 두 가지 정책을 썼다.

첫째는 보리 값과 쌀값에 큰 차등을 두었다. 농민이 쌀을 팔아서 보리를 사먹을 때 더 많은 양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도표>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 서울 소매가격^^^  
 

두 번째는 이중(二重)곡가 제도이다. 즉 농민으로부터 수매하는 값보다 싼 금액으로 도시인에게 판매하는 제도이다. 쌀을 비싸게 사서 낮은 가격으로 팔면 손해가 나는데 이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메우게 된다. 쌀값 상승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을 조금이나마 줄여보자는 의도에서 내려진 조치이다. 이상과 같은 조치를 취했는데도 쌀값은 안정되지 않았다.

장기영 부총리는 저곡가(低穀價) 정책

1963년의 쌀값(20리터)은 전년대비 60%, 보리쌀(20리터)은 54% 폭등했다. 1964년이 되자, 1월에 593원 하던 쌀값이 5월에 904원으로 52%가 뛰었다. 보리쌀값도 올라서 806원이 되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시민층에서 아우성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쌀장수와 약삭빠른 일부 소비층의 매섬매석 행위였다. 상도의(商道義)와 공중도덕심이 결여된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시장 경제운영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1964년 5월에 부임한 장기영(張基榮) 부총리는 매점매석 행위에 대해 철퇴를 가했다. 그 결과 쌀값은 637원, 보리쌀값은 512원까지 내려갔다. 그 후 쌀값은 안정을 되찾아갔다.

매년 곡가를 결정할 때가 되면 국회에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고곡가(高穀價)를 주장했고,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는 저곡가(低穀價)를 주장해서 격렬한 공방전이 되풀이됐다.

그러나 장기영 부총리 재임 중에는 경제안정론이 우위를 차지해서 추곡 매입 가격 인상폭은 65년 이후 67년까지 3년간 10%로 유지됐다. 67년 10월 張 부총리에 이어 취임한 박충훈 부총리도 임금과 물가안정에 최대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1967년도에도 10% 선을 유지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보니 농민들의 원성은 커져만 갔다.

 

 
   
  ^^^^^^▲ 서울 소매가격^^^^^^  
 

<위의 도표>는 1965~1970년간의 환율, 물가, 노임의 연평균 인상률이다. 제조업 노임은 1965년에 18.6%, 1966년에 17.8%, 1967년에는 22.5% 올라갔다. 그런데도 장기영 부총리는 쌀수매가를 10% 밖에 올려주지 않았다. 그 결과 우선 환율이 안정됐다.

1967년에는 환율이 떨어지기까지 했다. 물가도 1963년에 30.3%, 1964년에는 27.5%이었던 것이 10% 이하로 떨어졌다. 1968년에는 제조업 노임이 26.5%나 올라갔다.

공장의 노임 인상률에 크게 미치지 못했으니 농민들의 불평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국회에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크게 문제삼게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도 경제기획원의 반대를 물리치고 저곡가 정책에서 고곡가 정책으로 전환키로 결심했다.

"물가에 좀 영향을 주더라도 쌀값을 올려!"가 이 때의 지시였다. 그래서 68년에는 10%선이 깨지고 13.7%가 올라갔다. 박충훈 부총리 시대에「10%의 마지노선」이 깨진 것이다.

김학렬 부총리는 고곡가(高穀價) 정책

69년 6월 취임한 김학렬 부총리는 1969년산 미곡의 정부 매입가격을 22.6%, 1970년산은 35.9%, 1971년산은 25.0%를 인상하여 계속 고미가(高米價) 정책을 실시해 나갔다.

이러한 고미가 추세는 1976년까지 지속, 1968~75년간 정부수매가격 인상률은 연평균 24.8%로써 같은 기간의 도매물가 상승률을 크게 앞섰다.

이로서 농민들의 생활이 좋아졌으며 농가소득이 도시 근로자의 소득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쌀값이 오른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서민층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고 노임 인상의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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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음 2006-07-07 22:23:44
박대통령의 업적을 중국만 제대로 평가하면서 새마을운동과 사업 시찰을 위해서 공무원과 학생들이 견학오고 있는 실정이다.

박사모 2006-07-08 11:09:16
박정희의 ‘주식회사 한국’을 해부하다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오원철 지음 | 동서문화사 | 672쪽 | 2만9800원

‘인구과잉, 자원부족, 공업 미발달, 군비압력, 졸렬한 정치, 취약한 민족자본, 행정능력 결여.’ 1961년 일본정부가 한국경제에 대해 내린 냉정한 판단이다. 한 마디로 가망이 없는 나라라는게 당시 대한민국에 대한 일본의 평가였다.

이런 나라를 이끌어 선진국 입구까지 갈 수 있는 산업혁명, 근대화 혁명을 이룬 장본인이 박정희 전대통령이었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에 관한 찬반은 별개의 문제로 하더라도말이다.

그런데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은 ‘어떻게’이다. 이 또한 그를 반대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찬성하는 사람들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저 강력한 지도력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나라를 바꿔놓았다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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