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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박정희 대통령1966 일본 산업 방문시 "한국에서 금형을 만든다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금형이란 소총이나 기관총 만드는 정도의 정밀성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한국 노무자는 「시아게」가 부족합니다"라고 했다. 한국 기계공(工)은 「시아게」작업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정밀작업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
조공품으로 본 조선시대의 무역상품
다음에는 생필품 외의 물품, 소위 조선시대의 특산품을 알아보자.
우선 당시의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나라가 중국에 조공으로 바친 물건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도표 5-2>는 세종 11년과 다음 해인 12년에 중국 황실에 진상한 품목과 수량이다. 종주국인 중국 황실에 진상했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특산품일 것이다.
아래의 도표에서 1), 2)의 인삼, 호랑이 가죽, 담비가죽은 1차 상품이고 3), 4), 5)가 공산품이다. 3)의 나전칠기, 붓 등은 남성이 생산한 것이고, 4)의 포지(布地), 5)의 방석류등 초경(草莖) 제품들은 모두가 여성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에도 역시 우리나라 제조업의 주역은 여성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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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표 5-2>^^^ | ||
도표의 마지막 난인 6)에 金 150냥, 銀 700냥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이 때의 기록을 보면 다음 해인 세종 12년에는 금과 은의 조공은 면제받고 말과 명주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물건도 도표에서 괄호로 표시한 만큼의 수량을 늘렸다.
우리나라가 남한산성에서 패한 후 이번에는 청나라에 조공을 받쳐야 했는데, 금과 은이 또 다시 포함되었다. 인조(仁祖) 때나 효종(孝宗) 때에는 은 1,000냥, 금 100냥을 바쳐야만 했다. 우리나라 조정은 그 후 청나라에 대해 이를 면제해 주도록 매년 통사정을 했다. 금은 숙종(肅宗) 18년에 면제받았고, 은은 숙종 37년에 면제 받았다.
은 1,000냥 이라면, 중국으로서는 「코 묻은 돈」 정도이다. 11세기 기록을 보면 송(宋)나라는 요(遼)나라에 패한 후 평화회담을 했다. 그 조건으로 송나라는 매년 명주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요나라에 제공해야 했다. 그 후 이 금액이 늘어 매년 명주 30만 필과 은 20만 냥씩을 100년간 바쳤다. 이런 숫자를 보면 100냥이나, 1,000냥은 중국으로서는 푼돈도 안 되는 금액이다. 금 한 냥이면 여자 금팔찌 한 개이니 100냥이면 금팔찌 100개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당시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금팔찌 100개를 바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왜 이 정도의 금이나 은조차도 못 내고, 중국측에 간청을 해서 면제를 받았을까? 광산 노무자가 반역을 했기 때문에 광산을 폐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필자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더 실감나고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슬픈 이야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상민이 은가락지를 끼면 관졸이 빼앗아 갔다고 한다. 구리(銅) 반지만 끼라는 것이었다. 은반지가 귀할 때라 은반지를 못 주겠다고 몸부림치면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빼앗아 갔다고 한다. 관졸은 나라님의 명이라 했다. 나라님이 은가락지가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서민층까지 은가락지를 낄 정도면 중국 사신이 당장 우리 조정에 항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은이 없다면서 서민층도 은가락지를 끼고 있지 않은가. 금, 은을 바치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금이나 은을 조공품에서 면제해 달라면서 이럴 수 있는가?"하고 호통을 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明)이나 청(淸)나라 사신은 자기 몫의 뇌물로 금이나 은만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이 양이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금과 은은 아예 눈에 띄지 않게 해 버리고 중국 사신에게는 "우리나라에는 금이나 은의 생산은 없습니다. 국민이 가진 금이나 은은 전부 중국에 바쳤습니다. 그러니 금이나 은의 조공을 면제해 주십시오.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농사나 지어먹고 겨우 연명해 갑니다. 특산물도 없습니다. 그저 모시나 돗자리 정도가 생산됩니다. 인삼이 좀 있습니다. 호랑이 가죽이 몇 장 나옵니다. 조공품을 준비하느라고 정성을 다했습니다만 이 정도입니다"하고 절만 하는 우리나라 사신의 가엾은 모습이 눈에 선하다.
조선시대의 기술에 대한 인식
현재는 전통공예를 높이 평가해주며 이를 제작하는 사람을 장인(匠人)이라며 우대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급사회에서는 선비(士)만이 양반(兩班)계층이었고 나머지인 농부, 장이(匠人), 장사꾼은 상민(常民)으로서 장이는 농사꾼보다도 천대받았다.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봤자 알아주지도 않았고 돈을 벌 수 있는 경제구조도 아니었다. 이런 제도하에서는 기술이 발달될 리 없고 노동가치관이 향상될 수도 없었다. 몇 가지 예를 든다.
(例 - 1) 도자기 제조기술의 단절
일본 시찰 때 작은 선물을 받았다. 현대적 백자 꽃병인데, 설명서를 보니 14대째 「가끼우에몬」(枾右衛門)의 작품이었다. 「가끼우에몬」은 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교과서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구면이었다. 그 교과서 내용은 「가끼우에몬」이라는 도자기공이 감(枾)의 빨간색을 도자기에 착색하기 위하여 일생을 고생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받은 꽃병에도 이 빨간색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이조자기에는 이런 빨간색은 없다. 우리나라의 빨간색은 수은(水銀)의 화합물인 「진사」라는 유약으로 발색(發色)하는데, 이렇게 선명하지 못하다. 좀 탁하고 갈색기가 난다.
일본 도자기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도공들이 끌려가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가끼우에몬」도 이때 끌려간 도공의 후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빛을 못 본 도공들이 어떻게 일본에서는 도자기를 발전시킬 수 있었는가 놀라웠다. 일본 도자기는 도구가와시대 말기에는 대단한 발전을 해서 많은 양이 예술품으로 유럽에 수출되기도 했다. 지금도 유럽의 박물관에 가면 「그때 유럽 귀족들이 애용하던 물건」이라고 좋은 자리에 모셔져 있다. 그 이유를 그 꽃병을 보고 알 것 같았다.
「가끼우에몬」은 유명해졌고 가업은 번창햇다. 그리고 그 후 14대를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몇 백년간 전통과 기술을 이어받고 연구 개발을 하고 또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있는 것이다. 아들이 없어 가업을 잇지 못하게 되면 양자를 얻어서라도 가업을 이어왔다.
나는 전통적인 한국의 도자기공업이 사라져 버린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무슨 큰 사유가 있겠지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는 그 유명한 고려청자가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11세기 때이다. 그런데 청자의 품질이 점점 떨어지더니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그 다음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도자기가 나온다. 소위 분청사기이다. 이것도 잠시 후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백자시대가 된다.
임진왜란으로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자 백자가 없어지고, 그 대신 「계룡산」도자기가 나오는데 기술적으로는 고급품이 아니었다. 소박하다는 뜻에서 일본 애호가에게 호평을 받는 도자기이다. 그 후 다시 백자시대가 되는데 「도마리」가마, 「금사리」가마 「분원」가마로 이어진다. 이 백자도 초기에는 품질이 좋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품질이 떨어졌다. 그리고 일시에 그 맥이 끊어졌고 지금은 아무 기술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은 청자나 백자를 재현하기 위해 많은 도공이 연구를 한다. 참 이상한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시로 기술의 단절이 일어나는 것이다.
도자기 기술이 수시로 단절되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헌을 찾아보았지만 특별한 이유를 찾을 길이 없었다. 영조 때 도자기 유약인 청화색소를 수입 금지한 정도이다. 청화란 「백자」에 청색 그림을 그릴 때 쓰이는 유약 원료이다. 중국에서 사왔는데 아라비아 산이니 값이 비쌌다. 그래서 영조대왕은 청화 도자기 만드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그런데 수입을 금지하니 오히려 국내에서 발명이 되어 다시 청화백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나와 있다. 필자는 1966년에 마산에 요업센터와 도자기연구소를 설립하면서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다.
그런데 과거에 골동품 장사를 하던 어떤 노인에게서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그럴 듯했다. "과거 이조시대의 도자기 가마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소. 하나는 민요(民窯)라고 해서 소위 「막가마」요. 일반 서민층이 쓰는 사기 그릇을 만드는 곳이오. 모양이나 질은 생각할 필요도 없고 식기 구실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또 하나가 관요(官窯)인데 여기서는 조정에서 필요한 도자기를 굽는 곳이오. 관리들이 「무엇을 얼마 만들라」고 하면 그대로 하면 되는 곳이오. 현재의 국영기업체에 해당될까.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오.
한 젊은 도공이 도자기에 소질이 있어 모양도 잘 만들고 초벌하여 그 위에 그림도 멋있게 그렸단 말이오. 이것을 가마에 넣고 불을 지펴 구우면 완성품이 되는 것이오. 이 젊은이는 그 도자기가 구워지는 것을 밤잠도 자지 않고 기다렸소. 당연하지. 도자기 가마가 다 식어서 도자기를 꺼내려 가마 속에 들어갔는데, 자기가 만들어낸 도자기가 어찌나 훌륭한지 껴안고 싶더래요. 소위 명품이지. 그런데 그 도자기를 갖고 나오려고 하자 가마 안에 있던 늙은 도공이 갑자기 그 도자기를 빼앗더니 망치로 단숨에 깨버리더란 거야. 그러면서 '여보게 젊은이, 욕심 내지 말게. 자네가 처음이 아닐세. 과거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매밖에 없었다네'라고 했다는 거요."
필자가 그 이유를 묻자, "더 좋은 도자기가 나오면 관리들은 이것을 궁궐에 바치게 되지 않겠소. 물론 자기 공만 늘어놓고 그것을 만든 도공 이야기는 안 하겠지. 그러면 궁궐에서 내려오는 지시는 궁중에 몇십 개, 영의정 몇 개, 무슨 대감 몇 개 등 몇백 개를 만들라는 것이오. 이것을 당장에 만들어 바치라는 호령이 떨어지는 것이지. 이렇게 되면 죽는 것은 도공들뿐이오. 좋은 물건이란 이따금 나오는 것이지 매번 나오지는 않는 법이오. 그러니 밤을 새워도 수량을 못 채우면 돌아오는 것은 매질뿐이라는 이야기요."
좋은 물건을 만들어 보았자 봉급이 느는 것도 아니었다. 봉급이래야 쌀을 몇 말 받는 것이 전부이다. 다시 말하면 기술이 발달할 조건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기술이 이어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이니 도자기 기술이 점점 낙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다 보니 도자기 굽는 가마는 없어지고, 그 곳에서 구워져 나오던 각종 도자기도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도공이 살아 남았다 해도 다른 가마에 가면 다른 종류의 도자기를 만들게 된다. 이렇게 돼서 기술은 단절되고 만 것이다.
도공에게 좋은 기술이 있다 한들 관요(官窯)에서는 천한 일꾼의 신분일 수밖에 없으니 보수는 역시 쌀 몇 말이다. 그렇다면 민요(民窯)는 개인 것이니 「日本과 같이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서 고가로 팔면 돈도 벌고 성공할 수 있지 않느냐?」하는 위문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좋은 물건을 고가로 사주는 수요가도 없을 뿐더러, 좋은 물건을 만들었다가는 진상품(進上品)으로 빼앗길 뿐이다. 결국 조선시대는 기술의 진가를 인식하지 못하고 기술자를 인정하지 않는 때였다. 그저 도공들은 제멋대로 적당히 만들기만 하면 되는 시대였다는 뜻이다. 그러니 기술자의 긍지도 있을 수 없고 전통가업으로 이어져 갈 리도 만무했던 것이다.
(例 - 2) 예술인도 품팔이 장사꾼
예술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는 화가를 「환쟁이」라고 했다. 화구(畵具)를 짊어지고 집집을 찾아다닌다. 각 가정에서도 웬만한 집에서는 벽장에 붙이는 그림이나 병풍용 그림이 필요했다. 환쟁이는 그 집에 머무르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품삯을 받았다. 그림을 보고 값을 매기는 것이 아니고 일당을 주고 그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성들일 필요도 없었다.
궁중화가도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주로 병풍을 그렸는데 그림의 종류나 내용은 병풍을 놓는 자리에 따라 사전에 결정돼 있어서 창조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보수는 연봉으로 받는 쌀 몇 섬이었다. 당시엔 그림이 매매되는 상품으로 취급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例 - 3) 염색
전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염색(染色)공업이 발달되지 않은 나라도 드물다.
염색의 원료는 식물에서 나온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천을 모양 있게 디자인해서 짰을 뿐만 아니라 염색법도 발달했다. 물감장사도 있었다. 색소가 포함된 식물을 집단재배도 했다. 전문 염색공장도 많이 있었다.
지방 명이 붙은 무슨 천, 무슨 염색 등 유명한 특산물도 많다. 일본에서는 기후 조건상 목화재배가 안 돼서 우리나라로부터 연간 수만 필의 면포(綿布)를 수입해 갔다. 그리고는 화려한 염색을 해서 사용했다.
우리나라에는 색소가 포함된 여러 가지 식물이 있다. 그런데도 염색공업이 발달되지 못했다. 그 이유를 「우리는 백의(白衣)민족이다」라는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나라 국민에게도 중국산 옷감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상류층에서는 거금을 주고 샀다. 그런데도 우리 조상은 고가인 명주에만 아주 간단한 염색을 했을 뿐 그 면포는 물들일 생각을 안 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당시 농민들은 면포를 짜서 세금으로 바쳤다. 아내가 아파서 면포를 못 짜면 남편이 부역을 나가야 했다.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즉, 어떤 사람이 좋은 염색법을 발명했다고 하고, 그 결과를 상상해 보는 일이다. 틀림없이 관리들은 염색까지 해서 세금으로 바치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염색까지 해서 빼앗기느니, 내가 흰옷을 입는 것이 속 편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제도하에서는 염색에 대한 기술을 연구할 필요가 없다(註: 검정색은 가정에서도 간단히 염색이 가능해서 서민층 여성들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었다).
우리나라의 장인
이상과 같은 제도와 환경 속에서 우리나라의 장이(匠人)는 어떤 기질을 갖게 되었을까?
1966년 4월 동경에서 아시아생산성기구(APO) 총회가 있었다. 박충훈 당시 상공부 장관이 의장으로 선출된 회의였다. 필자는 朴 장관을 모시고 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 때 재일교포인 공영화학(共榮化學)의 김종수(金鐘壽) 사장이 찾아와서 공장 시찰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일행은 동경에서 좀 떨어진 중소도시로 갔다. 공장규모는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金 사장은 "플라스틱 공업에서 성공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금형(金型: 플라스틱을 찍어내는 금속틀)에 달려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책상 만한 쇠뭉치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것이 정밀해야 좋은 물건이 나오는데, 값이 엄청나게 비쌀 뿐 아니라 제조기간이 무척 깁니다.
금형 제작이란 사람의 손길이 많이 가는데, 일감이 밀려 1년이나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朴 장관이 "한국인의 손재주가 세계 제일인데, 한국에서 만들어 가면 될 것 아니오"하고 물었다. 金 사장은 "한국에서 금형을 만든다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금형이란 소총이나 기관총 만드는 정도의 정밀성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한국 노무자는 「시아게」가 부족합니다"라고 했다. 한국 기계공(工)은 「시아게」작업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정밀작업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시아게」라는 말은 한자로는 사상(仕上)이라고 쓰는데 중국에도 이런 단어는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이「시아게」라는 것이 작업하는 사람에게는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였다. 목공이나 미장공, 하다 못해 가정에서 옷을 만들 때에도 이 말이 나온다. 이발소에서 머리 깎을 때도 나온다.
해방 후 20여년이 지났지만 당시까지도 「시아게」에 걸맞은 우리말이 없었다. 그래서 한 때 「마무리」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무리」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마무리」라는 말에는 「일을 끝낸다」라는 의미가 강한데, 「시아게」라는 것은 작업 과정상 완벽성을 추구하는 하나의 독립된 공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시아게」정신이 부족해서 플라스틱 금형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 金 사장의 설명이었다.
공장 시찰을 마치고 일행은 음식점으로 갔다. 거기에는 일본식 의복장이 있었다. 그 의복장의 서랍과 본체의 간격은 빈틈이 없이 꼭 맞았다. 즉 「시아게」가 잘된 것이다. 한국식 의복장 즉, 장롱의 서랍은 틈이 있다. 한국은 여름과 겨울철간에 온도나 습도 차이가 커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에도 한국보다 더 추운 곳이 있으며, 일정 때 일본인은 한국에서 일본식 의복장을 아무 지장 없이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런 설명 가지고는 납득이 안 갔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을 「여유」를 즐기는 국민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선 할 말이 없다. 그래서 한국의 창호지 문은 이러한 「여유」있는 문으로 만들었나 보다. 겨울철에 바람이 들어오면 창호지 종이를 문짝보다 크게 해서 너풀거리는 종이 끝으로 문틈을 막았나 보다. 이것을 풍류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정밀작업과는 상반되는 특성이다.
일본 여성이 식사준비를 해 가지고 들어왔다. 일본식 전통 옷을 입고 왔다. 일본 옷의 스타일과 한국 옷을 비교해 보았다. 우리나라 옷에는 겨드랑이 쪽에서 손목 쪽으로 소위 소매곡선이 있다. 겨드랑이 쪽에서 직선으로 가다가 끝에 가서 곡선이 되는 우아한 선이다.
그런데 일본 옷은 겨드랑이에서 소매 끝까지 일직선이다. 소매부분에서는 직각으로 구부러져 손목 쪽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손만 드나들 정도까지 꿰맨다. 일본 옷에는 곡선이라고는 없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으며 바깥을 보니 전통적 일본 가옥이 보였다. 지붕은 모두 일직선이다. 한국 건물과 같은 우아한 곡선미 즉, 소위 「부연」이라는 곡선이 없다. 기와집뿐만 아니다. 일본 초가집조차도 일직선 형태이다. 일본 사람은 무던히도 직선을 좋아하는 국민이라고 느껴졌다.
한국의 미적 심벌은 역시 소매 곡선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한국의 지붕 곡선, 버선코의 곡선, 옛 선비가 좋아하던 난초(蘭草)의 곡선 등이 모두 소매 곡선을 닮았다. 처음은 직선으로 곧잘 가다가 어느 사이엔가 슬그머니 곡선으로 변하는 선, 아름답기는 하지만 기계 공업 육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딘가 「시아게」 정신과 상치되는 느낌이 들었다. 직선은 끝까지 직선이고 곡선은 곡선이어야지, 출발은 직선으로 하다가 슬그머니 곡선으로 바꾸는 적당주의로는 정밀공업은 할 수 없다고 느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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