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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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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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한국의 산업혁명 과정 (上)

 
   
  ^^^▲ 6.25 전쟁 사진(좌.중)과 (우)1960년대 미국 백악관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전쟁기념관,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해방과 국토분단, 그리고 전쟁

1945년 8월 15일 감격의 해방. 곧이어 미군(美軍)의 진주. 그리고 우리나라는 주한미군의 군정(軍政) 시대로 들어갔다. 미국(美國)이 우리나라 국민의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진 것이다.

미국의 막대한 원조가 시작됐다. 그런데 원조 액수가 클뿐더러 개선될 가망이 전연 없자 부담을 느낀 미국은 1949년 6월 주한미군을 철수했다. 미국은 한국을 필요한 나라로 판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골치아픈 존재로 생각했던 것이다.

1950년 1월에는 소위 「애치슨 라인」, 즉 한국과 대만은 미국방위선 내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자 불과 5개월 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남한을 침공했다. 한국전쟁의 발발이다.

북한은 세계공산화를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우리나라는 이에 맞서 자유수호를 위해 싸웠다. 한국전쟁은 동서(東西) 양 진영간의 총력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3년간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승부가 나지 않자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마무리했다.

전쟁 중 우리나라 국민의 의식주 문제와 국가 재정은 전적으로 미국이 원조해주었다. 해방 후 휴전까지 미국이 원조해준 총액은 당시 금액으로 10억 4,664만 달러라는 막대한 금액에 이른다.

이러한 미국원조가 없었더라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는 우리 국민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원조 없이는 지탱 못하는 나라

휴전 후에도 미국(및 국제기구)은 전쟁복구사업에 원조해주었고 우리 국민을 먹여 살렸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 8개년 동안 원조해준 액수는 20억 8,834만 달러에 달한다(註 : <도표 2-1> 참조).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제는 암담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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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도의 살림을 살펴보기로 한다. 1960년도에는 3,283만 달러를 수출하고 3억 4,353만 달러를 수입했으니, 우리나라는 10:1의 무역역조국가라는 뜻이다. 경제적으로는 파산한 나라이다. 세부적으로 따져 보기로 한다.

< 첫 번째 질문 : 왜 수출을 안 했을까? >

답은 수출할 상품이 없었던 것이다.

수출품의 내용을 보면

1) 돼지, 어개류(魚介類), 김, 쌀 등 식료품이 970만 달러. 2) 흑연(黑鉛), 중석(重石), 철광석(鐵鑛石) 등 광산물과 생사(生絲), 돈모(豚毛), 한천(寒天) 등 비식용 원료가 1,582만 달러. 3) 무연탄 등 광물성 연료가 115만 달러 등 천연자원이 대부분이고 4) 공산품으로는 합판, 면직물이 394만 달러 정도였다.(註: <도표 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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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질문 : 수입을 줄일 수는 없었던가? >

수입 내용을 보면

1) 밀, 보리, 원당 등 식료품이 3,156만 달러. 2) 원면, 양모(羊毛), 목재, 생고무 등 비식용 원료가 6,850만 달러. 3) 석유류 등이 2,296만 달러. 4) 비료, 의품, 염료(染料), 합성수지 등 화학제품 등이 7,613만 달러. 5) 시멘트, 철판 등 금속제품, 지류(紙類), 직물사(織物絲) 등 원료 및 제품이 4,704만 달러. 6) 수송기계, 섬유기계, 전기기계, 통신기계 및 동 부속품 수입이 4,009만 달러 등으로서 국민의 생필품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뿐이다.

수입하지 않으면 국민의 의식주 문제가 심각해진다. (註: <도표 2-2> 참조).

< 세 번째 질문 : 수입대금 3억 4,353만 달러를 어떻게 결제했을까? >

그 내역은 정부 보유 달러로 지불한 것이 9,717만 달러, 공공원조(구호자금 포함)가 2억 4,636만 달러이다. 즉 우리나라는 71.7%를 미국 원조에 의존했다는 뜻이다.

< 네 번째 질문 : 수출액은 3,283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데 어떻게 해서 정부는 9,717만 달러를 지출할 수 있었는가? >

1960년의 외환 수입을 보면(註: <도표 2-3> 참조), 수출이 3,280만 달러인데 비해 정부 수입이 7,030만 달러나 된다. 수출액의 2배가 넘은 액수이다. 이 항목은 UN군의 한국주둔으로 인해 벌어들이는 달러 6,260만 달러가 포함된 금액이다(註: <도표 2-4> 참조).

그래서 1960년도의 달러 수입은 1억 1,690만 달러가 됐고, 수입대금 9,717만 달러를 결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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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번째 질문 : 막대한 원조자금은 어떻게 쓰여졌나? >

원조자금으로 수입된 상품은 ― 국민들이 대가를 치르고 구입했으니 ― 막대한 판매 대전이 나오게 된다. 이 돈의 일부는 미국 기관에서 사용했으나 대부분은 한국정부의 국고에 들어갔다. 이것을 대충자금(對充資金)이라고 하는데 1960년도에는 397억원의 대충자금이 있었다.

정부예산 집행상황을 보면 1960년도의 세입실적은 925억원이었으니 대충자금의 비중은 42.9%가 된다(註 : 그 해의 예산집행 액수는 742억원이다. 따라서 집행액수에 대한 대충자금의 비율은 53.3%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정부는 미국원조(대충자금) 없이는 국가 경영을 할 수 없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 여섯 번째 질문 : 원조자금은 계속될 것인가? >

답은 「NO」다. <도표 2-1>을 보면 1957년에는 원조자금 액수가 3억 8천만 달러까지 됐으나 1959년부터는 2억 달러 수준으로 떨어졌고, 1961년에는 2억 달러를 밑돌게 됐다. 그 결과 우리나라 경제는 곤경에 처하게 됐고 국민생활은 더욱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국가적 위기감이 팽팽해졌다.

1960년대 초의 한국경제

1961년은 해방 후 16년이 되는 해였고, 휴전 후 8년의 세월이 경과하였지만 우리나라는 전술한 바와 같이 미국 원조에만 기대고 있었다.

그때까지 30억 달러의 경제원조와 20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받았으나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국민경제는 빈곤과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었다.

일본 정부에서 만든 「한국경제에 대해서(1961년 7월 27일)」라는 자료를 보면 한국경제는

1) 인구의 과잉
2) 자원의 부족
3) 공업의 미발달
4) 군비 압력
5) 정치의 졸렬
6) 민족자본의 약체
7) 행정능력의 결여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어 경제성장과 자립을 이룩한다는 것은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가망이 없는 나라라는 뜻이다.

 

 
   
  ^^^▲ 1950년 6.25 전쟁후 더더욱 배고픔과 가난을 대물림 하며 절망했던 대한민국(좌),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대한민국의 자주경제 재건을 위해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 당시 육사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를 시청앞에서 보는 박정희 대통령(우)
ⓒ 뉴스타운.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혁명군은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공약했다.

긴급 목표는 「민생고 해결」… 즉 「국민에게 하루 세 끼는 먹여주어야 하지 않느냐」(註 : 「5.16 군사 혁명사」 상권 p.1 참조)하는 것이고, 장기목표는 「자주 경제 건설」… 즉 당시까지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 겨우 국가경영을 할 수 있었는데 원조액이 해마다 줄어 경제는 날로 악화되고 국민의 불안은 컸다. 결국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힘으로 나라경제를 꾸려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목표는 정해져 있었으나 이를 실천하기 위한 작전계획이 없었다. 군(軍)은 그 성격상 오로지 작전계획에 의해서만 행동을 한다. 임무가 부여됐다고 해도 작전계획이 없으면 명령을 하달할 수도 없다.

그래서 서둘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키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혁명군의 작전계획이었다. 이상과 같은 연유로 5개년 계획의 골자는 해마다 줄어드는 원조자금으로 나라 살림을 하기 위해 수입물량을 줄이는 방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즉 원조자금으로 수입해서 써오던 필수물자를 국내에서 생산해서 공급하는 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남부럽잖게 잘 살겠다」는 꿈도 가질 형편이 못됐다. 이런 입장이었으니 제1차 5개년 계획은 수입대체산업과 고용증대가 주 공격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입상품이란 <도표 2-2>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 국민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생필품에 관계되는 것이다.

경제기획원에서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1962년 1월 13일에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5개년 계획의 진척은 지지 부진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는 오히려 악화일로로 치달아 파국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편 우리나라의 외화보유액은 계속 줄어들어 ― 1963년 말에 가서는 약 1억 달러(이중 미화는 9,300만 달러)가 돼서 ― 국가 파산이 염려되었다. 여기서 朴 대통령은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우선 외화가 소요되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대폭 축소 조정했다.

그리고는 수출을 늘리기 위해 「수출제일주의」를 국가 최고 전략지침 즉 국시(國是)로 정하고 ―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공업제품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 공업입국 정책을 펴나갔다. 「공업의 수출체제로의 개편 작업」이 발전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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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역군 2006-05-04 15:04:21
우리 국민들이 잘 살길 바라지말고 국가지도자들이 잘 리더해야 한다. 조흥것은 빨리 배워서 벤키마킹하고 나뿐것은 버리고 조화롭게 양극화 만들지말고...

잘살아 보세 2006-05-04 15:25:13
가난할 때는 무엇이라도 먹어야 살았다. 닥치는 대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시절이 우리나에서도 그리 먼 옛날이 아니다.

한국전쟁 때만 해도 우리는 마치 거지처럼 살 정도의 아주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아득한 옛날 이야기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 우리나라 공화당 시절 대통령 선거전 때 "배고파 못살겠다. 죽기 전에 살길 찾자", "배고파 못 살겠다. 황소라도 잡아먹자"(황소 : 당시 박정희 집권 공화당의 상징물)라는 구호를 내세워 한 후보는 전국 각지를 돌며 선거 유세전을 펼친 적이 있다.

그때는 어디 뚱뚱할 만큼 먹을 것이 있었나? 뚱뚱하진 않지만 "통통한"사람을 보면 "저 집은 잘 사는가 보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도 가난해서 밥을 해서 여러 식구가 먹되 반찬거리는 아주 짜게 만들어서 조금만 먹도록 하는 지혜(?)를 짜낸 가정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그때는 비만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할 수밖에 없다. 비만 ? "어디 한번 원 없이 먹고나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던 시절이 지금으로부터 겨우 사오십 년 전일이다.

최근 우리나라도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단기간 내 고도의 압축 성장을 거쳐 이만 큼 먹고살게 됐는데 이제 성인은 물론 어린이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라사랑 2006-05-04 15:26:32
난 박정희의 나라사랑을 배우련다!

박정희!

그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듣고 배우고 알고 있던 이미지는 5.16 쿠데타, 새마을, 수출진흥, 일본 장교, 유신독재자.

나는 학창시절에 박정희를 비판한 사람이었다. 유신도, 장발단속도, 교련도, 긴급조치도 모두 싫었다. 엄청.

그런데 이젠 나는 공개적으로 박정희를 사랑할련다.
그의 애국심과 영웅적인 죽음, 청렴성, 조국근대화에 매진한 그를 존경할련다.

첫사랑에 실연당하고, 남로당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음악 미술에도 소질인 있었던 로맨티스트 박정희가, 말로만 애국과 민족을 외쳐대는 포퓰리스트 정치꾼보다 몇 천배 몇 만배 나의 가슴에 뜨겁게 다가온다. 국민소득 82불이었고, 보리고개로 상징되던 조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오게한 그를 그리워 할련다.

경부고속도로, 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 포항제철, 기업체 야간학교, 공돌이 공순이, 새마을, 향토예비군, 월남파병, 현대조선, 중화학공업육성, 정주영, 이병철, 박태준, 김학렬, 남덕우, 오원철!

피맺힌 한으로,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뭉쳤던 6,70년대의 나의 아버지 아재 형님 누나.

10. 26 총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궁정동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영웅적인 행동..."난 괜찮아"

싸구려 손목시계, 낡은 혁대를 한 대통령.
수많은 독재자나 지도자들이 부패로 몰락하고 혐의를 받고 있는데도 부패가 없는그 청렴성. 막걸리를 좋아했던 빈농의 아들. 그때 아껴가면서 먹었다는 그 시바스리갈은 이젠 평범한 소시민도 마시는 상황이 됐다.

박정희!
그는 빈곤한 약소 국가 대한민국을 하면된다는 신념을 일깨워준 진정한 지도자라는 것을 난 기억할련다.

그리고 그의 애국심과 섬세함과 함께, 역사와 영웅들의 철학에 대해 탁월한 이해력을 가졌던 박정희를 사랑할련다.

난 지금 박정희를 부관참시하려는 권력과 사이비 진보세력의 행태를 경멸한다.
자유와 인권이 존재하지 않고 수백만명이 굶어 죽은 부자세습 북한정권에 대해 내재적 접근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말 한마디 못하는 것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혹독하게 반인권과 독재를 비판한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위선에 할말을 잊는다.

박정희 대통령!
그는 과(過)보다 공(功)이 훨씬 많은 진정한 애국자였다.




바른생각 2006-05-04 15:28:28
경제발전 하면 박정희 나오고. 박정희 나오면 민주화 외치는 사람들 나오고.....
해방되고 우리도 이제 잘 살아보자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잘 살기는 커녕 아무도 경제 발전엔 무관심이고 추진력 없이 자리만 잡고 있었거늘....누가 리더가 되어서 이끌어 가기를 바라고만 있을뿐...

박정희 대통령이 길을 가다 배고픔에 지쳐 길 바닥에 누워 있는 노모와 한 아이를 보고 울음이 나오다 못해 정치인들에, 이 나라에 화가 치밀어 올라 더이상 참고 있을수 없다..

군인도 국민이다..군인이 아니라 국민으로서 더이상 이 나라를 보고만 있을수 없다 해서 혁명을 일으키셨소...

잘 사는 나라 만들어 보겠다고 이끄는 대통령을, 뜻을 모아 함께 가지는 못할 망정, 독재한다고 민주화 민주화 외치며 지랄 떨던 놈들....
10 여년을 통제 속에 살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잘 사는 나라 만들겠다던 신념과, 이루어낸 업적을 그 독재 하에 묻어 버리지는 맙시다.




대학생 2006-05-04 15:30:01
뉴스타운에서 보니 자료가 너무 잘 정리되어 있어서 한국 근대사 경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연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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