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반석 위에 올린 위대한 父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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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반석 위에 올린 위대한 父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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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고구려 유적 대탐방-4]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 고구려 지도
ⓒ 뉴스타운^^^
고구려는 우리에게 민족의 자긍심과 찬란한 영광의 한때로 대표된다. 발해.신라에서 후삼국을 거쳐 탄생한 고려도 고구려의 역사를 계승하기 위해 국호를 고려라고 지은 것만 봐도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구려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바라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을 자처한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강성함을 갖추지 못했으며 원나라라는 몽골족들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는 등 갖은 수모를 겪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구려를 대체할 수 있는 나라가 등장할 가능성은 희박했고, 그런 만큼 고구려에 대한 희소성의 가치는 세월이 흐를수록 커져만 갔으며, 급기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찬란한 영광의 나라로 변모시켰다.

그렇다면 멸망한지 1000년도 더된 이 고대왕국을 오늘날까지 우러르게 만들게 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당나라의 잦은 침략에도 우직하게 막아낸 연개소문도 있지만 그들로는 부족하다.

그렇다, 독자 여러분의 짐작대로 기자는 고구려하면 끈임 없이 회자되는 인물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꼽고 싶다. 잘 알려진 대로 이들은 부자(父子)사이로 아버지는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 확장에 주력했으며 아들은 한강 이남까지 세력을 확장해 백제에 쏠렸던 삼국시대의 주도권을 고구려로 옮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 장수왕릉
ⓒ 뉴스타운^^^

장수왕릉 - 50톤이 넘는 돌이 어떻게 지붕이 됐을까?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서 모조품에 불과한 고구려벽화들을 관람한 대원들은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이들 부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수왕릉과 광개토대왕비에 발을 내디뎠다.

고구려 제 20대 왕이자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구려를 통치한 장수왕이 묻힌 장군총이라고도 불리는 장수왕릉.

^^^▲ 장수왕릉 옆면20톤이 넘는 큰 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장수왕릉을 받치고 있다. 이 돌은 계단형식으로 이루어진 묘가 돌출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 뉴스타운^^^
대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가 굵어지는 통에 손에 들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손으로 감싸 쥘 수밖에 없었지만 교과서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장수왕릉을 실제로 접할 수 있다는데 묘한 흥분을 느끼는 듯했다. 기자도 그랬다.

너무 기대하면 실망하는 법이지만 오히려 기대를 저버렸기에 좋아 보이는 것일까. 장수왕릉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장수왕릉의 그 듬직한 자태가 꽤나 보기 좋았다.

비가 올 줄 알고 한국에서 미리 우산을 준비한 대원들은 우산 속에 몸을 웅크린 채 열심히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비오는 날이어서 그런지 번쩍번쩍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는 약했지만 번개로 보였다.

장수왕릉은 관계당국의 감시가 제법 삼엄해 능 안으로 들어갈 때는 카메라를 가방 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높이 12.4m 넓이 32m를 자랑하는 장수왕릉은 총 7계단으로 이뤄졌으며 총 1100개의 벽돌로 구성됐다. 한 개에 몇 톤 씩 나갈법한 큼직한 돌들은 무려 22km나 떨어진 채습장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무려 50톤이 넘는 장수왕릉의 넓직한 지붕돌이 어떻게 12m도 더 넘는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현대 기술로도 지붕돌을 올리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른다고 하는데 천년도 훨씬 전인 이 어마어마한 돌을 어떻게 올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 장수왕릉 뒷편 오른쪽 대각선 방향에서 바라다 본 후궁들의 묘
ⓒ 뉴스타운^^^
왕릉 안은 아무런 조명시설도 갖춰 있지 않아 무척 캄캄했다. 대원들은 터지지 않는 핸드폰을 가지고 희미한 불을 밝혀 장수왕릉 안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능 안에는 두개의 묘가 안치되어 거대한 돌에 덮여 있는데 장수왕과 왕비가 각각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릉은 현재까지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장군총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같은 이름이 유래된 데에는 청나라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장수왕릉은 청나라 당시 발견된 고대 묘인데 당시 청나라 사람들은 장수왕의 묘인줄 모르고 묘의 규모를 보아 미루어 짐작해 대단히 뛰어난 장군의 묘라 여겨 장군총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 광개토대왕비
ⓒ 뉴스타운^^^
대원들이 광개토대왕비에 동전을 던진 까닭은?

그 다음 향한 곳이 바로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선대왕인 아버지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에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74년 광개토 대왕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인 386년 태자로 책봉되고, 아버지가 일찍 죽자 17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392년, 396년 두 차례에 걸쳐 백제를 공격해 사흘만에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켜 한강 북쪽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396년에는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무너뜨렸다. 광개토대왕이 이처럼 백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광개토대왕이 백제 근초고왕에게 목숨을 잃은 고국원왕의 손자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한편 비석에는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명의 원군을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비석에는 총 1775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중 1590자만 알아 볼 수 있는 상태인데 일본이 신라를 점령해 광개토대왕이 이를 토벌했다는 내용은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 한 대원이 관련서적을 펴보며 광개토대왕비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 뉴스타운^^^

광개토대왕비는 교과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모양과는 달리 방탄유리로 보호되어 있다. 유리 안으로 들어가 올려다보려니 답답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거대한 영토를 호령했던 광개토대왕을 떠올리면서 비석을 관찰한 대원들은 방탄유리벽 너머에 자리를 지키고 섰는 중국 관리자들을 한 번씩 쳐다봤다. 그리고 누군지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던졌던 동전들을 보며 주머니에서 어렵싸리 꺼낸 중국 동전들을 광개토대왕비에 하나 둘 던진 뒤 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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