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 독립협회는 일제 앞잡이 대열이었다
백과사전을 비롯 한국의 모든 기록에 오른 것이 있다.
'신문의 날은 4월 7일이고 그것은 '독립신문' 창간을 기념하여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이 대서특필로 돼있는 것이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57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을 기하여 신문의 날을 제정했다. 제1회 신문의 날 행사는 1957년 4월 8일 명동 시립극장에서 개최되었으며 신문윤리강령을 선포하고 6·25전쟁 때 전사한 외국인 기자 7명에 대한 훈장을 수여했다. 그 뒤 각 신문사는 신문의 날에 휴간하고 한 주 동안 신문주간으로 정하여 각종 기념행사를 한다'
필경 여기에 딴 뜻을 매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한국언론의 세대교체'를 주장할 정당한 논리를 발굴 무장했거나, 세르반데스의 동키호테, 이 둘 중의 어느 한 부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대는 어는 부류의 사람인가?
기자는 최근 한 사람을 알고 나서 '혼란'을 겪은 바 있다. 왜냐하면 바로 동키호테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란 생각에서였다. 육순을 훨씬 넘기면서 배워 온 한국의 말이며 글이며 역사(歷史)인데 어느 것 하난 올바르고 제대로 배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 정도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가정 말'과 '남남 말'이 따로 있다는 점을 비로소 알게 된 점에서, 가정에서 며느리가 쓰는 '아버님'을 밖에선 절대 써서는 안된다. '어르신'으로 불러야 한다...라는 지적은 물론, '대한문'은 불한당 문, '대안문' 이 제대로 된 문, 그리고 '한국의 중등교과서 도덕과목의 내용이 도무지 바르게 정립된 것이 없다' '설날'의 '차례(茶禮)'란 말도 그게 어디'절사(節事)'지 '차마시는 례냐? '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끝간데 없이 이어지는 그의 특이한 옹고집 나라사랑에 탄복이 절로 나던 터이다.
그리하여 여기 4월7이 '신문의 날' 혁파론에 이르렀다. 과연 이 주장이 사실이란 여론을 업게 된다면 지금까지 써먹어 온 대한민국 언론의 관행이자 그 역사는 산산 부서진 이름이 되고 마는 경천동지가 발생하게 생겼다.
지금 우리는 '한국언론의 세대교체'를 부르짖는 케치프레이즈 선상에서 날개를 달아 주는 셈이 되느냐 마느냐의 한판 싸움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천하의 내 노란 기자와 논설가와 기라성 같은 춘추필법의 명수들이 버텨 온 한국언론사 !
그들의 명석한 두뇌와 가슴으로 찍어 낸 '신문의 날', 그 날이 어처구니 없게도 이른바 '그렇다, 아니다'로 점철된 소위 일제 앞잡이 가짜 해방투사들의 산실로 부각돼 온 신문 '독립신문' 그 아류에 매몰된 한국의 언론이었다면, 크게 한방 맞고 제 정신을 차리느냐 마느냐의 싸움에 불을 댕길 일이 지금 터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바로쓰기'는 그래서 '언론사 바로쓰기'여야 하며, '언론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는 철리를 그래서 우리는 시간 있을 때 마다 천명하고 호소해 온 터다. 4월7일을 '신문의 날'로 치부코자 하는 한국의 언론은 여지없이 사라져 교체되어야 한다는 사실, 그 주지(主旨)를 오늘은 좌고우면 털끝만큼도 없이 드러내고자 한다.
만일 그대가 그 이유를 찾고자 한다면, 이 아랫 글을 가감 없이 읽어라. 읽고 다시 읽어 그 진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라. '독립신문'과 ;재필 ;완용(역적은 성(姓)을 쓰지 못한다)을 중심으로한 매국노의 행태가 어떠했던가를 바라보라.
"광복후 지금까지 <독립신문>은 우리의 광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배웠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서울대학교 교수자 신모씨는 "독립신문을 아주 좋은 신문이었다"고 했다. 신 교수자는 독립신문을 한번도 읽은적이 없는 강도왜로 앞잡이로 보였다
독립협회도 마찬가지다. 부왜역적들이 결성했고.<독립협회>회장이 역적 완용이었음을 천하가 다 안다.
독립문을 일본간첩 재필이가 세우고 글씨는 완용이 썼다"고 그는 갈파하고 있다.
그러고도 4월7일이 정녕 '신문의 날'이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그대는 '왜정시대 예찬자'의 반열에 선 백 투더 히스토리의 앵무새에 다름 아닐까 두렵다.
만일 그대가 이 글의 진의에 찬성하길 주저치 않는다면, '세대교체'를 부르짖는 한줄기 샘물을 이제야 발견했음을 감사하라! 그리하여 저~ 세종로 네 거리를 지나 서울특별시청 뒷녁에 폼을 잡고 서있는 '프레스센터'를 혁파하라! 거기 골수 '독립 파'들의 잔재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음을 경계하여 한 가닥 훈풍을 날려라!
만일, 쉘리의 서풍이 생각나거든 청출어람이 여기 있음을 들고 일어서 외쳐라. 빼앗아라. 자유와 정의는 차지하는 자의 몫임을 혁파가들의 역사는 증언한다. 하여 겨울이 이제 가고있음을 증거하라. 비록 그들이 '생계 형' 언론인이고 '생존 형' 언론사였을 것임에 다름 아님을 천착하였거든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라! 만일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치 못한다면.
백과사전을 믿을 수 없는 세상 다만 '지식창고'의 쓰레기임을 인정할 처지일진데, 차라리 삼삼한 3월3일은 어떠하며, 사사하게 사즉생의 4월 4일은 어떤가. 오오라 5월 5일도 좋은 것이고, 육갑좋은 6월6일, 칠칠한 7월 7일, 팔팔한 8월 8일은 또 어떤가. 구구한 9월 9일도 좋을 수 있고, 양명한 10월10일이나 남녀부동인 11월 11일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시비가 분분한 12월 12일도 과시 궂지가 않은 새대교체의 신문 날이다. 바야흐로 신문법'마저 고고성이 어늘.
그리하여 진정, 한국언론의 세대교체를 위해 개혁이 무엇인가를 보여라. 돈 다발 그힘이 없다고 말하려 하느냐? 인맥이 빈약하다고 서러워 하려 드느냐? 정치적 파워가 미치지 못한다고 한탄하느냐? 아서라 돈보다 정치보다 더 큰 자판이 그대 앞에 있나니 그대 혼을 불태워 그것을 두들겨라.
얼씨구 절씨구 널리 알려라. 울면서 두글기고 웃으면서 두들겨라. 가슴으로 두들겨라 간단없이 울려 퍼지는 목탁이 되게 하고 '해방의 종'이 되게 하라.
늦었다고 판단했을 때가 가장 빠른 것이라 했다. 그것이 고금동서의 시간이고 공간이며 물질인 동시에 에너지라 했다. 자~ 함께 사연많은 그 글로 여행떠나자. 여기 게시하노니~.
독립문과 일본간첩 (서)재필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만든 일본간첩
최훈영
비애왕 유고가 1933년 7월에 주연선집(珠淵選集)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나왔습니다. 시편에 <慶運宮>이라는 제목이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大漢門> <德壽宮>이라는 말은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거짓이라는 결정판으로 됩니다.
조선나라를 일본에게 넘기도록 만든 일급 흉물이 필립 재슨이었습니다. 일본 고정간첩으로 들어온 흉물이 필립이었습니다. 필립을 정리하여 보기로 합시다. 갑신년 부왜오적(附倭五賊) 서재필(徐載弼)이 19세 까지는 조선사람 서재필이었습니다. 역적 재필이 20세 부터는 미국사람 필립 재슨으로 되었습니다. 그렇게 적어야 합니다. 그렇게 적어야 학자로 될 수 있었습니다. 필립이 31세 때 미국에서 일본에 도착하여 일본국 간첩지령을 받고 조선땅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1897년 에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몰래 옮겨서 일본굴레에서 벗어나서 왕권을 회복하는 운세에 있었으나, 흉물 간첩 필립으로 말미암아 다시 망할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각설. 갑오년에 생긴 부왜내각인 김홍집 내각은 을미년 1895년 5월 10일에 미국 사람인 필립을 외부협판(차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내부대신 유길준이 국고금 5천 원을 미국에 있는 필립에게 송금하면서 그 돈으로 조선에 나와서 <신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필립이 서울에 도착한 것이 1896년 1월 1일이었습니다.
필립은 일본에 머물면서 신문만드는 기계를 주문해 놓고, 조선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가 서울에 들어 왔을 때 홍집이 총리대신이었고, 길준이 내부대신이었습니다. 이들 홍길 두 사람이 필립에게 <외부대신을 맡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필립이 답하기를 <나는 필립 재슨이라고 부르는 미국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정부에 외부대신이 될 수 가 없다>라고 말하고는 <고문관이 되기를 바라오>라고 했습니다.
그러했더니 <홍집 무리가 나 필립을 조선정부의 고문관으로 임명시켜 주더라>고 회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개월 뒤에 홍집은 분격한 서울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고, 길준은 일본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필립은 동지를 잃게 되어서 외롭게 되었습니다. 필립이 비애왕이 내린 추방령을 받기까지 2년 동안(1896년. 1.1~1898 5.10) 조선에 있으면서 했던 일은 <독립신문 만들기> <독립협회 만들기> <독립문 세우기>였습니다.
필립이 독립신문을 만들어서 창간호를 낸 것이 1896년(병신) 4월 7일이었고, 독립협회를 만드는 것이 병신년 7월 이었고, 독립문을 세운 것이 병신년 11월 21일이었습니다. 필립은 일본 고정간첩이 되어 <조선은 청국과 인연을 끊는 독립을 선언하고 그 뒤에는 조선이 일본에 붙어야 된다>는 말을 곳곳에 퍼뜨렸습니다.(고종시대 독립신문)
독립신문을 따져봅시다. 그 제1기는 필립이 사장 겸 주필이 되어 손수 원고를 써서 내었던 시기였습니다. 제2기는 윤치호가 사장이 되어 신문을 내었던 시기였습니다. 제3기는 영국사람 앰벌레가 이름만 빌려 준 사장이었던 시기였습니다. 필립 시대가 2년 1개월이었고, 윤치호 시대가 8개월이었고, 앰벌레 시대가 1년이었습니다.
비애왕 시대 독립신문은 <부왜역적 신문>이었습니다. 부왜역적을 칭찬하고 토왜의병을 나쁜놈들이라고 하는 일본간첩이 만드는 신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필립이 우심했고, 윤치호는 필립 노선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필립 보다 더 심한 글도 있었습니다.
필립이 손수 썼다고 하는 론설은 <토왜의병은 나쁜놈이다.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 되는 것이 좋다. 조선은 철저하게 청국을 배척해야 한다. 일본 사람이 신용이 있다. 일청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기 때문에 일본의 덕택으로 조선이 독립되었다. 조선사람은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고종시대 독립신문)
독립신문을 조선사람과 청국사람이 읽으면 분격하게 되고, 일본사람이 읽게 되면 유쾌하게 됩니다. 필립이 신문 발행 다음으로 만든 것이 동지 포섭이었습니다. 금세말로 하면 <사조직 결성>이었습니다. 그 사조직 이름이 <독립협회>이였습니다. 필립이 만든 사조직 독립협회는 필립재슨 안경수 이완용 윤치호로 그 회장이 이어져 갔습니다. 안경수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독립협회 역대 회장들 이름을 보면 독립협회가 부왜역적 단체였음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독립협회 출발을 보면 필립 자신은 외국 사람이라고 하면서 고문이 되고, 회장으로는 안경수가 되고, 위원장으로는 이완용이 되었습니다. 제2대는 이완용이 회장으로 되었습니다.
나라를 무너뜨려서 일본에게 나라를 넘기자는 집단이 처음으로 나왔는데 그 역적단체 이름이 <독립협회> 였습니다. 독립협회가 하는 일은 나라를 걱정하는 대신들을 비방하고 규탄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와서 고함을 지르는 시위를 했습니다. 윤치호와 이상재가 독립협회 지도자가 되더니만, <만민공동회>라는 거짓 이름을 붙여서 시위 소요 난동을 벌렸습니다. 배재학당에서 필립에게 영어를 배웠던 학생 이승만이 청년 연설자로 뽑혀서 연설을 했습니다. 이승만이 난동 선동꾼으로 잡혀서 감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이승만 아내 박씨가 남편을 구하려고 감옥소 근방을 돌아다니는 것을 독립 신문이 몇 차례 보도했습니다.(고종시대 독립신문)
'신문의 날은 4월 7일이고 그것은 '독립신문' 창간을 기념하여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이 대서특필로 돼있는 것이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57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을 기하여 신문의 날을 제정했다. 제1회 신문의 날 행사는 1957년 4월 8일 명동 시립극장에서 개최되었으며 신문윤리강령을 선포하고 6·25전쟁 때 전사한 외국인 기자 7명에 대한 훈장을 수여했다. 그 뒤 각 신문사는 신문의 날에 휴간하고 한 주 동안 신문주간으로 정하여 각종 기념행사를 한다'
필경 여기에 딴 뜻을 매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한국언론의 세대교체'를 주장할 정당한 논리를 발굴 무장했거나, 세르반데스의 동키호테, 이 둘 중의 어느 한 부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대는 어는 부류의 사람인가?
기자는 최근 한 사람을 알고 나서 '혼란'을 겪은 바 있다. 왜냐하면 바로 동키호테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란 생각에서였다. 육순을 훨씬 넘기면서 배워 온 한국의 말이며 글이며 역사(歷史)인데 어느 것 하난 올바르고 제대로 배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 정도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가정 말'과 '남남 말'이 따로 있다는 점을 비로소 알게 된 점에서, 가정에서 며느리가 쓰는 '아버님'을 밖에선 절대 써서는 안된다. '어르신'으로 불러야 한다...라는 지적은 물론, '대한문'은 불한당 문, '대안문' 이 제대로 된 문, 그리고 '한국의 중등교과서 도덕과목의 내용이 도무지 바르게 정립된 것이 없다' '설날'의 '차례(茶禮)'란 말도 그게 어디'절사(節事)'지 '차마시는 례냐? '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끝간데 없이 이어지는 그의 특이한 옹고집 나라사랑에 탄복이 절로 나던 터이다.
그리하여 여기 4월7이 '신문의 날' 혁파론에 이르렀다. 과연 이 주장이 사실이란 여론을 업게 된다면 지금까지 써먹어 온 대한민국 언론의 관행이자 그 역사는 산산 부서진 이름이 되고 마는 경천동지가 발생하게 생겼다.
지금 우리는 '한국언론의 세대교체'를 부르짖는 케치프레이즈 선상에서 날개를 달아 주는 셈이 되느냐 마느냐의 한판 싸움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천하의 내 노란 기자와 논설가와 기라성 같은 춘추필법의 명수들이 버텨 온 한국언론사 !
그들의 명석한 두뇌와 가슴으로 찍어 낸 '신문의 날', 그 날이 어처구니 없게도 이른바 '그렇다, 아니다'로 점철된 소위 일제 앞잡이 가짜 해방투사들의 산실로 부각돼 온 신문 '독립신문' 그 아류에 매몰된 한국의 언론이었다면, 크게 한방 맞고 제 정신을 차리느냐 마느냐의 싸움에 불을 댕길 일이 지금 터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바로쓰기'는 그래서 '언론사 바로쓰기'여야 하며, '언론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는 철리를 그래서 우리는 시간 있을 때 마다 천명하고 호소해 온 터다. 4월7일을 '신문의 날'로 치부코자 하는 한국의 언론은 여지없이 사라져 교체되어야 한다는 사실, 그 주지(主旨)를 오늘은 좌고우면 털끝만큼도 없이 드러내고자 한다.
만일 그대가 그 이유를 찾고자 한다면, 이 아랫 글을 가감 없이 읽어라. 읽고 다시 읽어 그 진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라. '독립신문'과 ;재필 ;완용(역적은 성(姓)을 쓰지 못한다)을 중심으로한 매국노의 행태가 어떠했던가를 바라보라.
"광복후 지금까지 <독립신문>은 우리의 광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배웠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서울대학교 교수자 신모씨는 "독립신문을 아주 좋은 신문이었다"고 했다. 신 교수자는 독립신문을 한번도 읽은적이 없는 강도왜로 앞잡이로 보였다
독립협회도 마찬가지다. 부왜역적들이 결성했고.<독립협회>회장이 역적 완용이었음을 천하가 다 안다.
독립문을 일본간첩 재필이가 세우고 글씨는 완용이 썼다"고 그는 갈파하고 있다.
그러고도 4월7일이 정녕 '신문의 날'이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그대는 '왜정시대 예찬자'의 반열에 선 백 투더 히스토리의 앵무새에 다름 아닐까 두렵다.
만일 그대가 이 글의 진의에 찬성하길 주저치 않는다면, '세대교체'를 부르짖는 한줄기 샘물을 이제야 발견했음을 감사하라! 그리하여 저~ 세종로 네 거리를 지나 서울특별시청 뒷녁에 폼을 잡고 서있는 '프레스센터'를 혁파하라! 거기 골수 '독립 파'들의 잔재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음을 경계하여 한 가닥 훈풍을 날려라!
만일, 쉘리의 서풍이 생각나거든 청출어람이 여기 있음을 들고 일어서 외쳐라. 빼앗아라. 자유와 정의는 차지하는 자의 몫임을 혁파가들의 역사는 증언한다. 하여 겨울이 이제 가고있음을 증거하라. 비록 그들이 '생계 형' 언론인이고 '생존 형' 언론사였을 것임에 다름 아님을 천착하였거든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라! 만일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치 못한다면.
백과사전을 믿을 수 없는 세상 다만 '지식창고'의 쓰레기임을 인정할 처지일진데, 차라리 삼삼한 3월3일은 어떠하며, 사사하게 사즉생의 4월 4일은 어떤가. 오오라 5월 5일도 좋은 것이고, 육갑좋은 6월6일, 칠칠한 7월 7일, 팔팔한 8월 8일은 또 어떤가. 구구한 9월 9일도 좋을 수 있고, 양명한 10월10일이나 남녀부동인 11월 11일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시비가 분분한 12월 12일도 과시 궂지가 않은 새대교체의 신문 날이다. 바야흐로 신문법'마저 고고성이 어늘.
그리하여 진정, 한국언론의 세대교체를 위해 개혁이 무엇인가를 보여라. 돈 다발 그힘이 없다고 말하려 하느냐? 인맥이 빈약하다고 서러워 하려 드느냐? 정치적 파워가 미치지 못한다고 한탄하느냐? 아서라 돈보다 정치보다 더 큰 자판이 그대 앞에 있나니 그대 혼을 불태워 그것을 두들겨라.
얼씨구 절씨구 널리 알려라. 울면서 두글기고 웃으면서 두들겨라. 가슴으로 두들겨라 간단없이 울려 퍼지는 목탁이 되게 하고 '해방의 종'이 되게 하라.
늦었다고 판단했을 때가 가장 빠른 것이라 했다. 그것이 고금동서의 시간이고 공간이며 물질인 동시에 에너지라 했다. 자~ 함께 사연많은 그 글로 여행떠나자. 여기 게시하노니~.
독립문과 일본간첩 (서)재필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만든 일본간첩
최훈영
비애왕 유고가 1933년 7월에 주연선집(珠淵選集)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나왔습니다. 시편에 <慶運宮>이라는 제목이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大漢門> <德壽宮>이라는 말은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거짓이라는 결정판으로 됩니다.
조선나라를 일본에게 넘기도록 만든 일급 흉물이 필립 재슨이었습니다. 일본 고정간첩으로 들어온 흉물이 필립이었습니다. 필립을 정리하여 보기로 합시다. 갑신년 부왜오적(附倭五賊) 서재필(徐載弼)이 19세 까지는 조선사람 서재필이었습니다. 역적 재필이 20세 부터는 미국사람 필립 재슨으로 되었습니다. 그렇게 적어야 합니다. 그렇게 적어야 학자로 될 수 있었습니다. 필립이 31세 때 미국에서 일본에 도착하여 일본국 간첩지령을 받고 조선땅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1897년 에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몰래 옮겨서 일본굴레에서 벗어나서 왕권을 회복하는 운세에 있었으나, 흉물 간첩 필립으로 말미암아 다시 망할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각설. 갑오년에 생긴 부왜내각인 김홍집 내각은 을미년 1895년 5월 10일에 미국 사람인 필립을 외부협판(차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내부대신 유길준이 국고금 5천 원을 미국에 있는 필립에게 송금하면서 그 돈으로 조선에 나와서 <신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필립이 서울에 도착한 것이 1896년 1월 1일이었습니다.
필립은 일본에 머물면서 신문만드는 기계를 주문해 놓고, 조선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가 서울에 들어 왔을 때 홍집이 총리대신이었고, 길준이 내부대신이었습니다. 이들 홍길 두 사람이 필립에게 <외부대신을 맡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필립이 답하기를 <나는 필립 재슨이라고 부르는 미국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정부에 외부대신이 될 수 가 없다>라고 말하고는 <고문관이 되기를 바라오>라고 했습니다.
그러했더니 <홍집 무리가 나 필립을 조선정부의 고문관으로 임명시켜 주더라>고 회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개월 뒤에 홍집은 분격한 서울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고, 길준은 일본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필립은 동지를 잃게 되어서 외롭게 되었습니다. 필립이 비애왕이 내린 추방령을 받기까지 2년 동안(1896년. 1.1~1898 5.10) 조선에 있으면서 했던 일은 <독립신문 만들기> <독립협회 만들기> <독립문 세우기>였습니다.
필립이 독립신문을 만들어서 창간호를 낸 것이 1896년(병신) 4월 7일이었고, 독립협회를 만드는 것이 병신년 7월 이었고, 독립문을 세운 것이 병신년 11월 21일이었습니다. 필립은 일본 고정간첩이 되어 <조선은 청국과 인연을 끊는 독립을 선언하고 그 뒤에는 조선이 일본에 붙어야 된다>는 말을 곳곳에 퍼뜨렸습니다.(고종시대 독립신문)
독립신문을 따져봅시다. 그 제1기는 필립이 사장 겸 주필이 되어 손수 원고를 써서 내었던 시기였습니다. 제2기는 윤치호가 사장이 되어 신문을 내었던 시기였습니다. 제3기는 영국사람 앰벌레가 이름만 빌려 준 사장이었던 시기였습니다. 필립 시대가 2년 1개월이었고, 윤치호 시대가 8개월이었고, 앰벌레 시대가 1년이었습니다.
비애왕 시대 독립신문은 <부왜역적 신문>이었습니다. 부왜역적을 칭찬하고 토왜의병을 나쁜놈들이라고 하는 일본간첩이 만드는 신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필립이 우심했고, 윤치호는 필립 노선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필립 보다 더 심한 글도 있었습니다.
필립이 손수 썼다고 하는 론설은 <토왜의병은 나쁜놈이다.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 되는 것이 좋다. 조선은 철저하게 청국을 배척해야 한다. 일본 사람이 신용이 있다. 일청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기 때문에 일본의 덕택으로 조선이 독립되었다. 조선사람은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고종시대 독립신문)
독립신문을 조선사람과 청국사람이 읽으면 분격하게 되고, 일본사람이 읽게 되면 유쾌하게 됩니다. 필립이 신문 발행 다음으로 만든 것이 동지 포섭이었습니다. 금세말로 하면 <사조직 결성>이었습니다. 그 사조직 이름이 <독립협회>이였습니다. 필립이 만든 사조직 독립협회는 필립재슨 안경수 이완용 윤치호로 그 회장이 이어져 갔습니다. 안경수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독립협회 역대 회장들 이름을 보면 독립협회가 부왜역적 단체였음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독립협회 출발을 보면 필립 자신은 외국 사람이라고 하면서 고문이 되고, 회장으로는 안경수가 되고, 위원장으로는 이완용이 되었습니다. 제2대는 이완용이 회장으로 되었습니다.
나라를 무너뜨려서 일본에게 나라를 넘기자는 집단이 처음으로 나왔는데 그 역적단체 이름이 <독립협회> 였습니다. 독립협회가 하는 일은 나라를 걱정하는 대신들을 비방하고 규탄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와서 고함을 지르는 시위를 했습니다. 윤치호와 이상재가 독립협회 지도자가 되더니만, <만민공동회>라는 거짓 이름을 붙여서 시위 소요 난동을 벌렸습니다. 배재학당에서 필립에게 영어를 배웠던 학생 이승만이 청년 연설자로 뽑혀서 연설을 했습니다. 이승만이 난동 선동꾼으로 잡혀서 감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이승만 아내 박씨가 남편을 구하려고 감옥소 근방을 돌아다니는 것을 독립 신문이 몇 차례 보도했습니다.(고종시대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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