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제2연평해전 교전수칙
16일 해군 제2함대사령부는 유가족들과 함께 제2연평해전 승전 20주년(6월 29일)을 앞두고 서해 NLL 사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는 해상헌화를 실시했다.
故 한상국 상사와 故 황도현 중사의 유가족들은 각각 가족의 이름을 딴 유도탄고속함에 올라 해상헌화에 참여했다. 윤영하함, 조천형함, 서후원함, 박동혁함은 6월 29일 해상헌화를 실시할 예정이다.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일어났다. 북한 경비정 2척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해왔고, 우리 해군 고속정 4척의 퇴거 경고 방송에도 불구하고 남하해서 경고 사격없이 85mm포 기습폭격을 시작했다. 우리 해군의 고속정 참수리 357호 조타실이 화염에 휩싸였고, 이를 시작으로 양측 함정 사이 교전이 시작됐다. 인근 해역에 있던 해군 고속정과 초계정들이 교전에 합류했고, 북한 경비정 1척에서 화염이 발생하자 경비정 2척 모두 퇴각하여 25분 만에 교전이 끝났다.
이 교전에서 우리 해군 6명이 전사했고,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 이전에 있었던 제1연평해전에서는 1999년 6월 7일부터 6일간 약 11회에 걸쳐 우리 해역을 침범하던 북한함정이 6월 15일 소총사격과 함께 25mm 기관포를 발사하며 대한민국 함정을 공격해오자, 해군은 바로 40mm와 76mm기관포로 응사하여 14분만에 북한함정을 격퇴하여 부상자 7명이 있었지만 사망자 한명도 없이 승전했다.
제1연평해전과 제2연평해전의 결과가 이렇게 다른 가장 큰 이유로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교전수칙이다.
제1연평해전 당시는 먼저 경고방송을 한 뒤 이를 듣지 않으면 바로 '차단기동'으로 밀어내버리기였다.
그러나 2002년은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기로 6‧15선언 이후 군에 '선제공격 하지 마라, 도발 행위 하지 마라, 도발을 확대하지 말고 NLL을 사수하되 물리적으로 하지 말고 북쪽으로 밀어내기 식으로 해라'고 지시했다. 정부의 햇볕정책을 의식한 군은 교전수칙도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5단계로 변경하면서, 경고방송 후 시위기동을 통해 위협을 한 뒤, 안되면 차단기동을 하도록 단계를 더 넣은 것이다.
논란이 되자 노무현 정부 시절에 개정되어 경고통신-경고사격-조준사격 3단계로 압축되었다가, 문재인 전 대통령이 9‧19 군사합의 후 경고방송-2차 경고방송-경고사격-2차 경고사격-군사적조치 5단계로 다시 단계를 늘렸다.
2002년 6월 29일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3/4위전에서 대한민국 대 터키와의 3위 결정전이 있었던 날로, 국민들은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축제 분위기였다. 그 당시의 평화는 외롭게 서해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치룬 생때같은 장병 6명의 목숨과 수많은 장병들의 핏값으로 얻은 소중한 평화였다.
해군은 전사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서해수호 의지를 다지기 위해 유도탄고속함(PKG)을 제2연평해전 6용사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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