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양복 쇼는 천박한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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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양복 쇼는 천박한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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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살 길은 핵 포기, 살인폭압독재 공포통치 종식 뿐

▲ 33세 김일성은 1945.10.14 소련군 정치 장교 레흐레프 인도로 소련군 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양복차림으로 등장한 이래 레닌복(인민복)만 고집하다가 1975,5.22~6.10 유고 등 동구권 5개국 순방시 양복을 입은 이후 양복차림을 즐겼다. 32세 김정은은 2016.5.6 제7차 당대회에 즐겨입던 레닌복을 벗고 양복차림으로 나왔다. 김일성이 그랬듯이 김정은의 양복 쇼도 3류 코미디로 끝날 것이다. ⓒ뉴스타운

남침전범 국제테러집단 풋내기 도살자 김정은이 1980년 6차 당대회 이래 36년 만에 열린 7차 당대회에서 양복 차림을 했대서 언론과 일부 전문가(?)들이 김정은이 최고위를 표현하는 새로운 호칭을 갖게 될 것이라는 둥 변화의 조짐이라는 둥 부산을 떨고 있다.

김정은 양복 차림은 북한 주민에게 영원한 주석으로 각인 된 김일성 이미지를 연출, 김일성이 누린 우상화 효과와 권위의 후광을 차용(借用)하려는 선전수법으로 간주하면서도 어떤 변화의 조짐(兆朕:indication)으로 애써 해석하려는 시각도 있다.

이는 김정은이 2013년 3월 31일 소위 3월 노동당중앙위원 전원회의에서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병진노선'을 채택 했음에도, 핵개발에 주력하면서 경제를 희생시킨데 따른 주민의 불만과 민심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한 '변화의 암시'로 풀이 된다.

김정은 양복 차림은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 엉성한 양복 차림으로 등장한 이래 인민복(레닌복)만 입다가 월남 적화 직후인 1975년 5월 22일~6월10일 사이 20일간 비동맹 지도국인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동구권 5개국 순방 후 부터 간간히 양복 차림으로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1975년 당시 월남적화통일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이 '제2의 6.25 남침'을 위한 중.소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자 루마니아 알제리 모리타니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구 5개국을 순방, UN에서 주한미군철수와 UN사 해체 결의안 채택 지지를 끌어 내고 전쟁준비에 필수물자인 석유획득(=구걸)에 나서면서 부득이 양복 차림을 한 것이다.

김일성의 양복 외교는 비동맹국 지도자인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토와 회담을 끝으로 아무런 소득 없이 빈손으로 귀국한 후 궁여지책으로 유고식 경제 관리 개선을 꾀하면서 1962년에 제기 된 이래 4대 군사노선 에 눌려 빛을 못 보던 '독립채산제'를 재강조하는 것으로 경제 운영에 변화를 모색했다는 정도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김일성이 유고 방문 후 '노동자 자주관리제'라는 특유의 경제제도를 극히 제한적으로나마 흉내 낸 것이 독립채산제 타령이며, 굶주리고 허기진 주민의 불만을 달래 보려고 집단 농장 텃밭과 뙈기밭을 허용하는 미봉책을 들고 나온 것 말고는 어떤 대책도 어떤 변화도 보여 주지 못하는 변화의 한계만 드러냈다.

김정은의 양복이 가져올 변화 역시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배급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북한경제가 원시적이나마 시장경제에 의존하게 됐다는 사실을 감안 할 때 신흥부자인 돈주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시장통제를 완화 하거나 1958년 이래 60여년을 고집해 온 집단농장제도에 최소한의 변화를 모색하는게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김일성-김정일 주의를 유일적 지도사상으로 내세우는 한, 농업 발전도 경제 개혁도 한낱 구호로 그치고 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일성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최대의 업적으로 내세우는 한 농업 협동화에 손을 댄다는 것은 김일성주의에 항거하는 모반(謀反)이요 우리식 사회주의 구호를 수정하는 것은 김정일에 대한 불충(不忠)이기 때문에 김정은 양복 효과는 쇼로 그칠 것이다.

김정은이 7차 당대회에서 2016~2020년 국가 경제발전 5개년전략을 제시 했다고 하지만, 농업생산의 증대와 산업의 자율성이 보장 되지 않는 한 공허한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며, 국제관계 개선과 한국의 도움 없이는 전략도 계획도 의미가 없다.

김정은의 선택은 '70~'80년대 김일성이 흉내 내려던 유고식 관리체제 도입이나 협동농장의 부분적 변화로 그칠 수 밖에 없다.

김정은이 어떤 변화도 시도해 볼 수 없는 근본적 원인은 김일성이 모택동의 인민공사를 본 따 농촌집단화를 강행한 후 1959년 1월 5일 전국 농업협동조합대회에서 행한 김일성의 저주(咀呪) 때문이란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김일성은 그날 행한 연설에서 "토지개혁 결과 농촌에 소상품(小商品) 생산적인 농민 경리(經理)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소상품은 자연 생성적으로 자본주의와 부르주아를 생성하는 폐해가 있어 우리 당의 영도 밑에 농촌 경리의 사회주의적 협동화를 완성하였다."고 주장한 이래 농업협동화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김일성이 이룩한 불멸의 업적이라며 이를 절대 불변의 진리 처럼 여기고 있다.

외계어(外界語) 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김일성 연설을 통역 한다면, 스탈린 지령과 소련 군정의 강요로 토착민 경제기반을 무너트려 민족주의를 말살키 위해,1946년 3월 5일 "농토를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앞세워 반제 반봉건 인민혁명의 첫 단추로 지주 토지를 무상몰수, 소작농에게 무상분배 한 것이 토지개혁이다.

그 결과로 6.25 전란을 겪으면서도 그나마 살만해 진 농민들이 여분의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면서 공산혁명의 敵인 자본주의 싹이 움트게 됐는바 이를 짓뭉개버리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농업협동화를 완성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 온 것이다.

김일성 연설이 뜻하는 바는 북한 사회주의 혁명의 최대 업적인 농업협동화는 자본주의와 사유제도의 싹을 잘라내는 두 마리의 토기를 잡은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가치기 때문에 누구도 이룰 수정하거나 변경 할 수 없음을 뜻한다.

설령 손자인 김정은이 오사카 기쁨조 무용수 혈통을 숨기고 백두혈통을 내세우고는 있다 할지라도 이에 손을 댈 수 없음을 뜻하며, 그렇기 때문에 3대 세습독재 풋내기 도살자 김정은으로서는 김일성이 깔아 준 레일위로 김정일이 운행하던 방식대로 북한이란 기차를 파멸로 끌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집단농장 해체와 농업개혁 없이 식량문제 해결은 불가능 하며, 시장개방이 없는 경제노선은 처음부터 실패를 전제한 것이며, CVID 원칙에 입각한 핵 포기와 3대 세습살인 폭압 독재체제 종식이 없이는 국제환경 개선이나 국제제제 완화도, 남북관계 개선이나 대북지원 획득도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 한 것이다.

이제 북한 사회는 폐쇄와 억압, 감시와 통제, 기아와 공포로 무비판, 무저항, 맹종(盲從)할 줄밖에 모르는 노예 사회가 아니다. 언제 어느 구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목전에 닥친 '파멸'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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