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꽃을 피우는 사쿠라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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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꽃을 피우는 사쿠라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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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역주행은 사쿠라 근성이다

요사이 서울에는 벚꽃이 가지마다 늘어졌다. 얼마 전, 사쿠라지마(櫻島)에 갔을 때, 왠지 모르나 사쿠라 나무가 눈에 띄지 않았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사쿠라 꽃으로 뒤덮인 섬일 거란 기대가 거품처럼 사라졌던 아쉬움이 남았던 것이다. 사쿠라지마는 바다 가운데 떠있는 섬이다. 화산으로 솟아오른 섬의 높이가 1,117m, 둘레는 약 55km 된다. 산비탈은 나무와 풀로 푸르게 덮여있었으나 진회색의 화산재가 그 틈새로 깔려있었다. 그때 차도 옆 인도로 어린이 몇몇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모두가 제복 같은 노란 헬멧을 쓴 것이 특히 인상 깊었다. 

우리는 예전부터 왜 열도를 삼도(三島)라고 불렀다. 대마도 건너편에 “큰 섬 세 개가 서로 이마를 마주대고 있는 지방” 같은 개념으로, 일찍부터 우리들의 선조들이 들락거렸던 곳이었다. 이렇게 정착한 이주민들은 섬을 시마 또는 지마로 발음했고, 해안에 형성된 마을이나 지역까지 그렇게 불렀다. 이런 관행은 바다를 통하여 한반도로 오가는 섬의 출입구라는 뜻일 게다. 규슈(九州) 남단에는 가고시마(鹿兒島) 현이 있다. 현의 명칭도 시마지만, 현 내의 거점도시인 가고시마 시, 기리시마(霧島) 시 등에서도 시마는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가고시마 지역은 천연의 요새요 항구다. 동쪽의 오스미(大隅) 반도, 서쪽의 사쓰마(薩摩) 반도 두 개의 팔로 긴코(錦江) 만을 호수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만은 사쿠라지마를 여의주처럼 아름답게 품고 있다. 그러나 사쿠라지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버섯구름을 품어내며 화(?)를 벌컥 내는 활화산이며, 긴코만을 끓이는 아궁이다. 가고시마 전역은 온통 온천장으로 덮여있고, 바닷가의 모래까지 따끈하게 데운다. 사쓰마 반도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이부스키(指宿) 시에서 태평양 쪽을 바라보며 즐기는 흑모래 찜질도 좋은 관광 상품이다. 

사쿠라지마는 조용히 구름 꽃을 피우는 섬이지만, 백년 정도마다 한번 씩 무섭게 폭발하는 성층화산이다. 최근의 분화 장관은 1914년에 일어났다. 그 결과로 남봉(南峰)이 새롭게 형성되었고, 그곳에서 밖으로 품어낸 엄청난 양의 용암과 화산재는 섬을 동쪽 반도와 연결시켰다. 그런 과정에서 섬과 주변이 황폐해진 것은 물론이다. 그 99년 전의 대재앙은 한일합방 만행에 대한 땅의 분노였을 것이다. 만일 조만간 대형 폭발이 터진다면, 그것은 “사쿠라” 같은 아베의 극우로 향한 역주행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패륜을 결단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안진삼(安晋三), 이 이름에 곱절 배(倍)를 붙여 왜식으로 발음하면 아베신조(安倍晋三)다. 아베(安倍)는 안(安)을 부풀린 꼴이니까, “사쿠라 안씨”로 부르고 싶다. 만약 아베의 종가집이 한반도에 있다면, 그에게 “한국정복”은 “고향수복”을 간절하게 바라는 절규와 다르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근래 침략이란 말을 한사코 비벼대는 그 자의 태도가 이해(?)될 법도 하다. 일본열도의 실향민은 사실 그 자만이 아닐 것이다, 천황을 비롯하여 주민 대다수가 원형적으로 “가출한 아이”의 처지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1600년 그해, 왜 열도는 역사의 축을 뒤바꿀 내전을 겪었다. 이른바 세키가하라 전쟁이다. 쇼군 가문이 서군의 도요토미(豊臣)에서 동군의 도쿠가와(德川)로 넘어가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말살로 이어지는 종교적 고비였기 때문이다. 1598년 히데요시는 천벌을 받아 죽었다. 그리고 7년간 끌어온 임진왜란(1592)도 함께 끝났다. 노량대첩으로 조선은 최후의 승전을 거두었지만,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을 잃는 아픔도 받았다. 이때 패주하면서 이순신을 저격한 왜군 함대의 장수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였다. 

요시히로는 비록 적장이지만 칭찬받을만한 인물이다. 그는 노량진이 지형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이순신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하였다. 그것은 그의 주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를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고니시는 그때 순천왜성에서 항거하며 퇴로를 찾던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두 왜장만큼은 한반도 탈주에 성공했다. 한편 침략군의 좌우 양팔이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1562-1611) 역시 그즈음 울산성에서 농성하다가 생존하여 간신히 열도로 도주했다. 

고니시에게 가토는 적보다 더 험악한 관계의 앙숙이었다. 히데요시는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고니시를 가신으로 믿지 않았다. 고니시 연합군은 대다수 천주교인으로 구성되었는데, 히데요시는 처음부터 이들을 소모시키고 싶었던 병력이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시동출신인 가토가 최후의 승전 깃발을 휘날리는 장면을 내심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한양 입성은 동대문을 통과한 고니시가 더 빨랐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에서 막상 가토는 동군에 가담했고, 오히려 고니시가 서군의 주축이 되었다. 생포된 고니시는 할복자살을 거부함으로써 이에야스를 격분케 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니시를 따라 서군에 가담했다. 승패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그날 오후 서군 모두가 무너지고 동군의 포위망에서 홀로 남았을 때 요시히로 휘하의 병사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그때 그는 노량해전의 역발상 작전을 펼쳤다. 이에야스 본진을 돌파하여 혈로를 뚫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급하게 뒤쫓는 동군을 향해 부하들은 돌아서서 장렬한 최후를 맞으면서도 주군의 퇴로를 터줬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이 장면에서 크게 감동 받고, 추격군들을 철수시켰다. 사쓰마 영지로 돌아온 요시히로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은 은퇴하고 아들을 번주(藩主)로 내세우는 조건으로 쇼군과 화해했다. 

가고시마는 옛 사쓰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으로 막번 체제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체제로 전환되면서 지역명칭도 바뀌었다. 이와 같은 일대변혁을 일으킨 진원지가 바로 사쓰마였고, 시마즈의 하급무사들이 그 주역이었다. 세키가하라 전쟁 이후 260 여년 만에 시마즈 가문 출신들이 도쿠가와 가문에게 앙갚음을 한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말이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유신을 막고 도쿠가와 가문을 지켜내려 애썼던 덴쇼인(天璋院)은 비록 양녀였지만, 시마즈 번주의 딸이었다. NHK의 대하드라마 “아츠히메(篤姬)”가 바로 그녀다. 

가고시마의 센간엔(仙巖園)에 가면, 드라마에서의 아츠히메가 실물 크기의 사진 모습으로 손님을 반긴다. 여기서 바다 건너로 펼쳐지는 사쿠라지마의 파노라마가 일품이다. 이에야스에게 쫓겼던 요시히로는 일단 사쿠라지마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가 말년에 이곳에서 사쿠라지마를 바라보며 깊은 감회에 젖지 않았나 싶다. 그것은 네코가미사마(猫神樣)를 모시고 있는 고양이 신사 때문이다. 그가 한반도로 원정 갔을 때 고양이 아홉 마리를 데리고 갔는데, 그중 두 마리만 살아서 돌아왔단다. 그는 전투 중에 고양이의 눈을 보고 시간을 짐작했다고 한다. 

센간엔은 요시히로의 손자가 번주로서 가독을 이었을 때 시마즈 가문의 별장으로 조성된 곳이다. 오늘날에는 박물관, 본체, 정원, 대포 등의 다채로운 사적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입 구자(口) 형의 회랑을 가진 본체에서 말차(抹茶)의 시음체험도 그럴 듯하다. 찻잔이 사쓰마 야끼(陶窯)다. 요시히로가 남원성에서 끌고 온 도공 중에 세계적인 브랜드로 알려진 심수관 가문이 유명하다. 시마즈 가문 역시 도래인이었을 것 같다. 몇 차례 성씨 세탁 끝에 12 세기말 무렵 가마쿠라 막부시대에 이르러 도진성(島津城)을 영지로 받으면서 큰 가문으로 번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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