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후보 역사 인식 문제 놓고 여야 간 갑론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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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후보 역사 인식 문제 놓고 여야 간 갑론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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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인민혁명당 사건' 대법원의 최종판단 존중해야

 
이번 한 주 정치권에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역사 인식 문제를 놓고 여야 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70년대 대표적 공안 사건인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에 대해 박 후보가 대법원의 판결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 게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박 후보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도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입장으로 말을 했다.

아마도 유신시절의 공과는 역사가 판정해 줄 것이라는 총론적인 판단을 배경으로 한 발언일 것이다. 물론 박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 정권시절 고초를 겪은 분들에게 대통령 딸로서 사과드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민혁명당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 정권 때 발생한 대표적인 공안사건이다. 인민혁명당 사건은 1차, 2차(‘인혁당’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지난 64년과 74년 두 차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특히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알려진 2차 인혁당 사건은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은 사건이었다.

1975년 당시 법원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을 조종하고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을, 나머지 17명에게 징역 15년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특히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 8명은 판결이 내려진지 불과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해 대내외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시간이 흘러 노무현정권이 집권한 다음 인민혁명당 사건 유족들은 의문사위 조사결과 등을 근거로 2002년 법원에 재심 신청을 냈고 2005년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사건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사형이 집행된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며, 검찰이 항소를 포기해 판결이 확정됐다.

■ 1차, 2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은 64년 8월14일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에 있다”고 발표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이 있은 지 10년이 흐른 74년 4월, ‘2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더 잘 알려진 소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74년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을 수사하면서 배후, 조종세력으로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지목, 이를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 내 지하조직이라고 규정한 사건이다.

유신 2년째인 74년은 재야 단체와 학원가의 반체제 데모가 잇따르고 일부 언론인, 교수, 종교인, 재야인사들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개헌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고 있던 시기였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는 것이 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의 발표 내용이었다.

민청학련 1천24명이 연루된 ‘인민혁명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 사건에서 2백53명이 구속 송치됐고 이 가운데 인민혁명당 관련자 21명, 민청학련 관련자 27명 등 1백80여명이 긴급조치 4호,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죄명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기소됐다.

75년 2월 이철, 김지하 등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대부분 감형 또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지만, 결국 75년 4월8일 대법원은 도예종 등 인민혁명당 재건위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고 국방부는 재판이 종료 된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로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나 관련자 혐의에 대한 증거 불충분과 조사 과정 중 일부 고문까지 주장해 민주화운동 탄압을 위한 유신정권의 용공조작이라는 의혹이 제기도 했다.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

2002년 9월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다고 밝혔다. 의문사진상위는 당시 중앙정보부는 도예종씨 등 23명에 대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구성, 학생들을 배후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했지만, 조사결과 이를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혐의는 모두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 위조를 통해 조작됐음이 확인됐다고 밝히며,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다.

■ 인민혁명당 사건 재심 청구

인민혁명당 사건 유족들은 “인민혁명당 사건이 고문 등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2002년 조사 결과를 근거로 그해 12월 법원에 재심 청구를 냈다. 그러나 재판부는 2003년 9월과 11월 두 차례 심리를 연 뒤 기록검토 등을 이유로 심리를 미뤄오다가, 1년8개월 만인 2005년 7월에 심리를 재개했고, 2007년 서울중앙지법은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 8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64년 1차 인민혁명당 사건 당시 반국가 단체라고 발표된 인민혁명당은 서클 수준의 단체였으며, 수사과정에서 각종 고문이 자행됐다는 점이 인정됐다. 그리고 2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중심이었던 ‘인민혁명당 재건위’는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 발표했다.

2006년 1월23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인민혁명당 사건이 수사당국의 가혹한 고문에 의해 조작됐고, 이 사건 관련자들의 행위가 민주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민주화운동이라고 판단돼 관련자 1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인민혁명당 사건' 대법원의 최종 판단에 김창종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새누리당 박 후보의 발언이 나온 날 국회 법제사법위 인사청문회에서 이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재심에 의한) 최종적인 견해가 최종 결론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법원 판결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배제하고 사법체계를 정상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답변을 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혹여 이 사건의 재심 결정과 판결의 내용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입장이라 해도 사법체계를 뒷받침하는 헌법정신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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