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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같이 멋있는 쿠데타면 100번 해도 좋다!

정치꾼들, 조중동을 위시한 언론들, 뭘좀 안다는 우익식자들까지도 5.16을 놓고 박근혜에 시비를 건다. 오늘(9.10) 아침 동아일보 사설도 그랬다. “5·16 경제 발전의 공은 있지만 ‘쿠데타’는 맞다”는 제하의 동아일보 사설에는 아래와 같은 글들이 있다.

 8월 10일 자 동아일보 사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5·16이 일어난 직후 민주당 신파의 장면 총리에게 비판적이었던 구파의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고 말했다. 극심했던 민주당 신·구파의 정쟁과 사회 혼란상이 5·16을 불렀다는 인식이었다. 나중에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 된 장준하 씨는 1961년 ‘사상계’ 6월호에 ‘(5·16은)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적도 있다. 5·16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에는 5·18과 달리 ‘무혈 쿠데타’라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5·16 당시 한국은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됐고, 보리 이삭이 팰 무렵이면 식량이 떨어져 끼니를 굶는 보릿고개가 존재했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은 박정희 18년 집권을 거치며 산업화의 기틀을 다진 것이 동력으로 작용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전직 대통령으로 항상 박 전 대통령이 꼽히는 이유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그 후 역사적 평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쿠데타는 비합법적인 무력 또는 군사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은 군 일부를 동원해 헌정질서를 짓밟고 합법적인 장면 내각을 무너뜨렸다. 5·16은 이 점에서 쿠데타가 맞다. 산업화의 역사적 공(功)을 인정한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 관계까지 뒤집을 수는 없다.”

"박 의원은 아버지 박정희의 유산에 크게 기대고 있는 대선 주자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은 정확해야 한다. 이것은 5·16의 공과(功過)를 따지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박 의원은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고 유신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죄송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사과 했다. 박 의원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인권을 유린한 유신의 과(過)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바람 불면 각료 모두가 쥐새끼들

▲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근대화 이룩한 민족중흥의 영웅
대한민국 사회를 큰 기운으로 꽉 채워오던 박정희가 10월 26일, 과대망상증에 걸린 정신병자 김재규에 의해 시해됐다. 박정희가 총을 맞은 시각은 7:40, 이 순간 이후 국무총리 최규하를 비롯한 모든 각료들이 보인 행동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생쥐 새끼들이었다.

김계원을 보자, 그는 김재규에 박정희 시해를 부추겼고, 시해 후 김재규로부터 “형님,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시신을 처리하고 보안조심 하시오” 라는 말을 듣고 시신을 이웃 국군병원 분원에 이동한 후 철저한 보안을 시켰다.

정승화를 보자, 김재규는 맨발에 피 묻고 화약 냄새 진동하는 와이셔츠를 입고 이웃 별채에 와 있던 정승화와 함께 국방부로 갔다. 정승화는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걸 차속에서 알았고, 국방부 건물 지하 벙커로 오자마자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직접 전화기를 들고 계엄군 배치를 명령했으며 초법적 월권을 하여 수경사로 하여금 청와대 경호실을 포위케 했다. 경호부대가 시해현장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

최규하를 보자, 그는 오후 8:40분, 청와대에 도착하 자마자 김계원으로부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들었으면서도 이후 내내 함구하고 김재규에 아부 했다. 최규하는 비상국무회의를 청와대에서 소집했어야 했지만 김재규의 강압에 못 이겨 국방부로 가서 밤 11;30-00:25까지 비상국무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이 때 각료들의 반은 도망가고 없었고, 회의에 참석한 각료들은 누구 하나 나서서 범인이 누구냐에 대해 묻지 않고 철저히 함구했다.

이 순간 비상국무회의는 단지 10.27일 새벽 4시에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할 것과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합동수사 본부장에 전두환을 임명한다는 것만 의결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최규하는 국방장관실에 앉아있는 김재규에 가서 이 결정된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김재규가 범인 인줄 뻔히 알면서. 최규하가 끝내 입을 열지 않은 것은 그에게 이런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김재규의 범죄를 충동질한 김계원은 11:40분, 노재현과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행에 사용했던 권총을 내놓으면서 시해범이 김재규라는 것을 폭로 했다. 배신을 한 것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노재현은 정승화에게 김재규를 당장 체포하라고 명했다. 정승화는 전두환과 헌병감 김진기를 불러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명했다. 체포하는 흉내만 내라는 것이었다.

정승화의 명령과는 달리 전두환은 보안사 오일랑 중령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 했다. 체포 명령을 받은 오중령은 김재규를 유인 포박하여 안가로 데려가는 도중 김재규가 “내가 세상을 바꾸었다”는 요지의 말을 들었다. 그 후 전두환은 김재규를 곧장 서빙고 조사실로 끌고 가라 했다. 이후부터 김재규를 처벌하려는 전두환과 김재규를 살리려는 정승화 사이에 물밑 암투가 지속되었고, 끝내는 12.12를 맞게 됐다.

12.12가 없었으면 세상은 틀림없이 김재규-정승화의 세상이 됐을 것이다. 10월 26일, 오후 7:40분 이후의 대한민국은 그야 말로 무주공산이었다. 위의 요약된 줄거리만 보아도 박정희 밑에 있었던 모든 국무위원들은 물론 최규하 총리까지도 권력이 누구에게 가는가에 대해 눈알을 반질반질 굴렸다. 이 어찌 생쥐새끼들이 아닌가? 전두환이 아니었으면 김재규가 왕이 됐을 것이고 그는 약점이 많기 때문에 엄청난 독재를 했을 것이다.

세상은 정보를 가진 사람으로 가게 돼 있다. 당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국가의 건강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 보안사였다. 1980년 초반은 김대중의 내란음모 계절이었다. 그는 사실상의 혁명내각인 ‘국민회의’를 이끌고 국가를 내란의 장으로 몰고 갔다. 김대중이 이끄는 내란모의 핵심 26명은 4월 10일, 5월 1일, 5월 10일, 5월 12일 연속해서 북악파크에 모여 전국봉기와 내각점령을 통한 혁명모의를 연속했다. 거사일은 5월 22일.

김대중은 5월 19일까지 최규하 임시내각이 자진 해산하고 전국 내각을 구성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해 정부를 전복하겠다는 노골적인 성명을 냈다, 제2차 ‘민주화촉진 전국민선언문’이었다. 정부가 죽느냐 김대중이 죽느냐, 사생결단의 순간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김대중 일당을 잡아넣은 것이 바로 5.17조치였다.

그러면 김대중이 4차례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혁명모의를 하고 있다는 정보는 누가 캐냈는가? 전두환이 이끄는 보안사였다. 정보를 가진 전두환이 최규하에 이런 정보를 보고하고 특단의 조치를 건의한 것이다. 5.17은 사실상 정보를 많이 수집하고, 국가의 건강상태를 늘 연구하는 보안사가 주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김대중의 내란음모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전두환이 최규하에게 시의적절 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건의사항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이 나라는 그 때 김대중에 의해 적화통일 됐을 것이다. 이런 간단하지만 핵심적인 역사를 알고서는 12.12와 5.17에 대해 신문쟁이들이나 사이비 지식인들이 지금처럼 함부로 여물지 못한 입을 내두르지는 못할 것이다,

고건의 생쥐 행위

월간조선 2002년 11월호를 인용해본다.

"고건씨가 전두환 장군 측의 강압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던 5.17 직후, 사표도 안내고 20일 간이나 행방을 감추었다."

5.17 비상 계엄시에 정무장관으로 있으면서 무단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문이다. 수배하여 찾고 보니 병원에 있었다 한다. 왜 그랬느냐 물었더니, 군사정권이 싫어서 그랬다 한다. 그런데 그는 전두환 시절 9년 내내 2개의 장관을 했고, 민정당 국회의원을 했다. 군사정권이 싫어서 청와대 자리를 오랫동안 비우고 의도적으로 행방불명이 됐다던 사람이 왜 9년 내내 전두환의 직속 꼬봉이 되었는가?

그는 정치 내무 국방 등 주요 업무를 관장하는 대통령 정무수석 비서관으로서, 국가의 비상 시기였던 1980년 5.17 당시, 대통령의 눈과 귀 그리고 머리가 되어야할 상태인데도, 자신의 직무를 유기하고 20일 간이나 행방을 감췄다는 것은 고위 공직자로서는 물론, 인간적으로도 용서받기 어려운 배신행위라고 비난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에 재직한 인사들 대다수도 그때 고건의 행동에 대해 아직도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고건은 자신의 당시 행동에 대해, "비상계엄 확대를 위한 국무회의에 배석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나는 비상계엄조치가 군정을 의미한다고 해석을 했고 절대로 군정은 찬성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표를 써서 사신과 함께 비서실장에게 전하도록 부속실장에게 <비서실보좌관>주고 장위동 집에 칩거했습니다." 고 반박했다.

그러나 당시 비서실장 보좌관 이었던 김상영은, "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고건수석을 만났거나 사신이나 사표는커녕 종이쪽지 한 장 받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사표를 냈건 안냈건 간에 고건이 당시 매우 민감한 때에, 정상적으로 정무수석기능을 하지 않았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고건은 전두환 정권에서 교통부장관 농수산부장관 국회의원 내무부장관을 지내는 등 중용 되었다.

5.16 같이 멋있는 쿠데타면 100번 해도 좋다!

5.16전야는 그야말로 난장판이고 희망이라는 것은 ‘제로’였던 암울한 시기였다. 못나고 능력 없는 정치인들이 여러 명의 첩을 두었고, 장면과 윤보선이 서로 싸움질만 했다. 빨갱이들이 들끓고, 학생들은 북으로 가자고 연일 데모들을 했다. 깡패들이 천하를 지배하고, 일자리가 없어 공식적인 통계로도 실업률이 30%였다.

이때 만일 박정희가 나타나 주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당시 우리보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2배로 우세한 북한으로 흡수되고 말았을 것이다. 박정희가 나타나자 장면은 수녀들 치마폭에 숨었다. 이런 인간들이 국가를 통치한다고 정권을 쥐고 있었느니 나라꼴이 제대로 됐겠는가?

그때는 국민 대부분이 혁명을 반겼고, 박대통령을 구세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헌정질서의 파괴니 뭐니 공연한 싸움질을 하는가? 쿠데타는 말 그대로 이전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이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국민대다수가 박정희 대통령을 구국의 영웅으로 알고 그분의 덕분으로 세계가 부러워 할 정도로 잘 살고 있다. 그러면 박정희에 고마움을 표현해야지 어째서 쿠데타가 좋은 것이니 나쁜 것이니 하며 참새들처럼 소모적인 입질들을 하는가? 그런 5.16이라면 지금 또 나타났으면 좋겠다.

5.16과 유신은 국민 전체의 역사이지 박근혜만의 역사가 아니다. 그런데 정치꾼들과 언론인들은 어째서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이런 시비를 거는가? 박근혜도 역사에 대한 평가를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 박근혜가 어째서 참새만도 못한 머리와 입을 가진 언론인들이 바라는 답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대다수 국민은 아마도 지금의 이 어지러운 시국에 누군가가 백기사가 되어 제2의 5.16혁명을 일으켜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치권으로부터 시작해서 빨갱이들을 때려잡고, 연좌제를 부활하고, 땅에 떨어진 정의와 도덕을 바로 잡아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헌정질서 파괴? 5.16과 같은 것이라면 그런 무능무지한 헌정을 100번 파괴해도 좋을 것이다.

박근혜는 앞으로 이런 더럽고 유치한 질문 나오면 더 이상 대꾸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냥 "천하에 고마움을 모르는 쓰레기 같은 개자식들아" 이렇게만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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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oh 2012-09-08 09:43:41
참 한심한 사고방식의 구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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