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때로 갑자기 불쑥불쑥 나타나 남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하는 그 싱거운 모습이 그리 나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또 내가 부모님께 받은 교육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교육의 진정한 의미는 쉽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말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울이 두텁게 내려 붙은 어느 날 내 머리에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기라도 하면, 그래서 남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엉뚱한 제안을 하기라고 하면 친구들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오를까. 참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애를 쓰는 그 얼굴이 차츰 일그러져 가고, 마침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입술 사이로 "푸하하" 하고 웃음이 튀어나오는 걸 바라보는 재미가 얼마나 고소할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조금 불행하다. 그러나 고만한 것에 기죽지 않는다. 나의 장기는 기죽지 않는 끈질김에 있다. 남들이 "우습지도 않어!"라고 딱 잘라서 말하는 시시한 농담이나, 어디에서 읽은 철 지난 우스개 소리를 쉬지 않고 이야기해도 아무도 내 말에 웃어주지 않는다. 아니다. 피식 황당함을 표현하는 그 웃음을 보이면 나는 그것으로 흐뭇하다.
그렇게 웃는 것도 결국 웃음은 웃음이지 않은가. 나도 사람을 웃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게 재미있어서 계속 우스광을 떤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처럼 더 웃어 주지는 않는다. 결국은 제 풀에 지쳐서 가만히 않아있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멋있다. 그래, 김형은 역시 그런 자세가 어울려!" 그러나 나는 그런 자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혀 싫은 것은 아니지만 내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은밀한 욕구를 해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석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나는 무척 진지하다. 특히 환자를 진료할 때의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참 진지하다. 별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요모조모 생각하고, 주의사항을 구구절절 일러준다. 그리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이 들면 요약까지 해 준다. 때로는 환자가 그것을 숙지했는지 말해보라고 시키기까지 한다.
요즘은 많이 줄었지만 얼마 전까지는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책을 찾아서 그 부분에 대한 입장이 어떤 것인지 확인을 한다. 그리고 진료 중 조금이라도 자신이 없는 부분이 있으면,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큰 병원을 소개해 준다. 가정의학이란 자신이 자신 있게 아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얼마 전 내가 아는 임형의 부인이 병원에 찾아 왔다. VIP 중의 VIP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정말 성심성의껏 진료를 했고,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털어서 오랫동안 설명을 했다. 목이 조금 아파왔다. 처음에 열심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임형의 부인의 얼굴에 피로의 기색이 살짝 엿보이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VIP 신드롬이 또 생긴 것이다. "너무 지나친 친절은 모자란 것보다 못한 것인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나의 싱거움이 불거져 나왔다.
엄숙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하던 나는 진료를 끝내면서 임형의 부인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근데 나 멋있었어요?"
임형의 부인의 얼굴에 갑자기 혼선이 빚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의 표정과 색깔이 미묘하게 꼬이기 시작하며, 한참 눈알을 돌리는 것이 마음 속에 복잡한 생각들이 이리저리 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잠시 후. "하하하하……." 진료실 안을 거의 넋이 나간 여자의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가 뒤흔들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놀라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여다보아도, 그 웃음소리는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그 뒤로 임형의 부인은 어디서이건 나만 보면 손바닥을 치며, 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멈출 줄을 몰랐다.
나는 입이 헤벌어지게 좋은 걸 감추느라 혼이 났다. '그럼 그렇지. 내 개그의 수준을 알아주는 사람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야!' 나는 그동안 온갖 수모를 참으면서 한여름 무더운 날씨를 서늘하게 해 주느라고 고생을 했던, 나의 아마추어 개그맨 시절을 회상하면서 뿌듯한 만족감에 젖는다.
그러나 좀처럼 멋진 제2의 후속탄이 나타나지를 않는다. 한달 정도를 보내고 나니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사람들이 또 슬슬 약을 올리기 시작한다. "또 시작이야. 아이구 저 주책." 그러면 광수네 엄마가 고맙게도 한 마디를 거든다. "그래도 그땐 재미있긴 재미 있었제, 잉?"
뉴스타운
뉴스타운TV 구독 및 시청료 후원하기
뉴스타운T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