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솔한 우정의 끈은 동아줄보다도 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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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한 우정의 끈은 동아줄보다도 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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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추석도 이젠 채 한 달도 안 남았네요. 하지만 요즘은 대졸자들도 취업이 안 돼 난리라니 걱정입니다.

제가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때는 경기(景氣)가 연전의 IMF 도래 직후 때처럼이나 아주 어렵던 198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당연히 저의 취직 역시도 마음만 굴뚝같았지 현실은 화중지병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가정형편은 제가 군에 입대할 때와 마찬가지인 그대로 빈한지경의 처지였던지라 제가 다만 한 푼이라도 벌어야만 밥술이라도 뜰 수가 있었기에 백수로 빈둥빈둥 놀 수만은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발이 부르트도록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제 맘에 드는 직장을 구하기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여 동안이나 밖에도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하다가 하루는 저보다 두어 달 먼저 군에서 전역하여 직장을 잡아 일을 하고 있다는 고향의 막역지우를 찾아갔습니다.

저와 그 친구는 고향의 불알친구인데다가 초등학교 역시도 함께 다녔기에 절친하기가 마치 '한음과 오성'과도 같았지요. 그 친구 집에 찾아가니 그 친구의 어머님께서는 "아이구~ 넌 언제 제대했냐?"며 버선발로 뛰쳐나오시면서 저를 반가워해 주셨습니다.

이윽고 땅거미가 지자 그 친구가 집으로 들어섰는데 친구의 어머님께서는 새로 지으신 하얀 쌀밥에 걸죽한 막걸리도 한 주전자를 방에 들여 넣어주시고 나가셨습니다.

"나, 이제 제대는 했는데 직장 잡기가 무척이나 어려우니 어쩌면 좋냐?"고 하소연을 하였더니 친구는 대번에 "번듯한 직장을 잡기 전까지 나랑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함께 하자."고 하더군요. 당시 그 친구 역시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군대를 다녀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던 터여서 새벽마다 공사장으로 막노동을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튿날부터 그 친구와 함께 공사장으로 나가 아르바이트로 막일을 시작했는데 공사장의 일이라는 것도 특별한 기술, 예를 들자면 벽돌을 잘 쌓는다든가, 아니면 목수 일을 잘 한다든가 따위의 세련공이라면 일당을 많이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 친구나 저는 그저 몸뚱이만 달랑 있는, 그러니까 말 그대로 '막노동꾼'(잡부) 이었기에 일당 역시도 가장 쌀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집을 짓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공사로서 집터를 다지기 위한 땅 파기로부터 벽돌 지어 나르기, 미장일을 하는 기술자의 심부름, 목재 운반에 이르기까지 ... 아무튼 공사장의 잡부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잡무의 연속이었습니다.

1층집을 다 짓고 2층을 올릴 때는 콘크리트 타설을 해야했는데 지금처럼 레미콘 차량이 와서 순식간에 콘크리트를 붓고 가는 것은 돈이 많이 들었음으로 대개는 사람들이 큰 철판을 깔고 잡부들이 질통에 메고 올라온 모래와 자갈, 그리고 물과 시멘트를 적당히 비비고 섞어서 손수 삽으로 떠서 콘트리트 타설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힘은 들었지만 콘트리트 타설만 끝나면 그 날 일이 바로 종료되는 관계로(콘크리트가 완전히 굳기 전까지는 일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작업이 가장 환영받는 일이었습니다. 일당도 일을 마치자마자 그날 금방 주는 데다가 집주인이 직접 현장에까지 나와서 "콘크리트 좀 꼼꼼하게 잘 넣어달라!"며 당부를 함은 물론이요, 얼큰한 돼지고기 찌게와 밥과 술까지 맘껏 먹도록 해주었으니까요 ...

아무튼 새벽마다 그처럼 공사장에 나가서 공사감독님께 인사라도 잘 해 둬야 그나마 일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일당을 받고 나서 그 친구와 선술집에 들어가 나눠 마시던 술은 왜 그리도 꿀맛이었던지 지금 생각해 봐도 입에 군침이 자르르 흐르곤 합니다.

당시 그 친구나 저는 마찬가지로 늘상 돈이 쪼달리던 처지였는지라 단골 선술집에 들어서면 으레 우리는 소주 두 병과 안주로는 두부 한 모를 시켜서 김치와 먹는 게 고작이었지요.

그렇게 일을 하던 어느 날이었는데 하루는 아침부터 몸이 으실으실 추우면서 몸살기운까지 느껴지기에 일을 안 하고 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날에 이미 일을 맞춰놓았던지라 억지로 공사장에 나가긴 했는데 오전 열 시가 좀 지나자 도저히 더는 일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몸이 아파 왔습니다.

질통에 모래를 담아서 3층으로 메고 올라가는 일이었는데 자갈이 떡자갈(물로 세척이 된 순수자갈이 아닌 진흙이 잔뜩 묻은 자갈을 이렇게 부르는데 삽으로도 잘 떠지질 않는다)인 데다가 몸마저 아프니 그 일을 계속하다가는 3층에서 아래로 떨어져서 죽을 것만 같더군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는 심정으로 냅다 집으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날 저녁에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꿍꿍 앓고 있는데 친구가 제게로 찾아왔습니다. 친구는 제가 그날 공사장에서 달아난 자초지종을 듣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었습니다.

친구는 "그 공사장의 오야지('현장감독'을 일컫는 일본어의 잔재)가 네가 일을 하다가 말도 없이 도망갔다며 날 찾아와서 화를 버럭 내고 갔으니 앞으로 그 현장에서는 일을 계속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다"며 걱정을 해 주더니 동네 약방에 가서 몸살약을 지어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잠시 전에 걸려왔습니다. "오는 추석에 고향에 올 거냐? 참~ 아들은 군에 잘 입대했고? 근데 녀석은 올 추석은 훈련소에서 보내야 되겠구나..." 늘 친구를 챙겨주는 그 친구의 전화를 받고 보니 벌써 20년도 더 된 시절에 있었던 그 친구와 새벽을 열며 노동을 했던 과거의 추억이 새삼스레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친구나 저는 이제 불혹의 언덕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나 저는 박봉의 샐러리맨으로서 예전과 무변하게 애면글면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친구와 저의 질기고도 굳건한 진솔한 우정의 끈은 동아줄보다도 더 질깁니다.

그 친구가 예나 지금이나 늘 변하지 않은 것은 자신은 없어도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한다는 것과 친구들을 자기 친형제이상으로 그렇게 살펴주고 보듬어 준다는 것이지요.

F. 베이컨은 "참된 벗을 갖지 못한 것은 대단한 고독이다, 벗이 없으면 이 세상은 황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가요. 언제 찾아가도 제 고민을 함께 풀어줄 줄 아는 그 친구가 있어 저는 아직도 행복한 사람이자, 어찌 보면 부자란 생각도 듭니다.

지금은 유수와도 같은 세월의 흐름에 부식(!)되어 제 몸도 예전처럼 건강이 좋질 않아 그토록 즐겼던 술도 현저히 줄였습니다. 하지만 20여년 전 그 친구와 노동의 아침을 함께 했던 기억을 새롭게 반추하면서 오는 추석에 다시금 그 친구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은 저 자신, 아직도 젊다는 반증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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