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리에 있던 남로당 도당본부가 경찰의 습격을 받은 후 북촌리로 옮겨질 정도로 북촌리는 거점 역할을 했다

서론: '순이 삼촌'의 무대,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는 제주시에서 동쪽 10k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어촌마을이다. 마을 서측에는 함덕해수욕장과 접한 서우봉 오름이 위치하고, 마을 앞 일주도로에는 제주4.3 당시 희생되었던 마을 주민들을 기리는 ‘너븐숭이 4.3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북촌리는 4.3 당시 비극적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던 마을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지가 되는 마을이다. ‘순이 삼촌’은 실제보다 과장되기는 했지만, 제주4.3의 비극적인 면모를 알리는 데 상당한 일조를 했으며, 또한 북촌리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너븐숭이’는 북촌리 사건이 발생했던 장소의 속칭 지명이다.
비극의 전말: '조천면 북촌리 사례'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되었던 ‘북촌리 학살 사건’은 제주4.3이 절정기로 치닫던 1949년 1월 17일 발생하였다. 노무현 정부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이하 4.3정부보고서)’에 나온 ‘조천면 북촌리 사례’에는 정확한 피해 숫자는 나오지 않고, ‘4백여 채 가옥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고 하고, ‘마을 주민들은 이날 희생된 주민들이 대략 300명에 이른다고 증언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4.3정부보고서의 같은 단락에는 북촌리 학살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1월 17일 오전 북촌리 큰길에서 발생하였던 ‘북촌리 군인 차량 습격 사건’도 소개하고 있다.
1월 17일에는 해안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 가장 비극적인 세칭 ‘북촌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아침에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 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 당황한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담아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간 10명의 연로자 가운데 경찰 가족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살해 버렸다. 그리고 장교의 인솔 아래 2개 소대쯤 되는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4.3사건의 배경과 '지옥의 계절'
1948년 4월 3일 발발한 제주4.3사건은 48년 10월부터 49년 3월까지는 ‘지옥의 계절’이었다. 4.3사건의 피해자와 물적 피해 거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발생했다. 48년 10월까지는 주로 유격대가 공세적 입장이었던 반면, 군대와 경찰은 협조도 안 되고 수세에 몰린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양민 학살 사건은 대부분 유격대에 의해 산발적이고 소규모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이들은 무차별 학살이 아니라 ‘문서’에 의한, 최소한의 근거를 가지고 납치와 살인을 일삼았다. 이들의 목표는 주로 경찰, 우익 인사, 경찰 가족, 협력자 등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경찰이나 군인이 전투 중이 아닌 상황에서 고의나 실수로 사람을 살해했다면 그에 응당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했다.
복잡다단한 원인과 규칙의 붕괴
그러나 이런 최소한의 규칙이 무색해진 것은 48년 10월 이후부터였다. 원인은 복잡다단했다. 8월과 9월에는 남한과 북한에 각각 이질적인 정부가 들어섰고, 남한에는 제주4.3사건에 이어 여순반란이 발생하여 남한 정부는 남로당에 대한 위기감과 신생 정부의 생존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 정권은 제주인민해방군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고, 북한 정권 탄생으로 용기백배한 제주인민해방군은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까지 했다. 대한민국은 제주4.3에 대하여 단순한 봉기가 아니라 신생 국가에 대한 도전과 반란으로 받아들여졌다.
계엄령, 소개령, 그리고 양쪽의 대규모 학살
대한민국 정부가 11월 17일 선포한 계엄령과, 48년 겨울부터 시작된 소개령과 축성은 제주인민해방군을 극한으로 몰아부쳤다. 계엄령 선포 당시는 법제가 미비하여 대한민국의 계엄령은 일제가 쓰던 일본 계엄령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제의 계엄령에 기반했던 ‘즉결 처분’이 다시 살아나 4.3에서 많은 비극적 장면을 연출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기반이 되었던 중산간 마을에서 주민을 해안마을로 이동하는 소개령은 인민해방군과 이를 지원하던 좌익 주민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생존이 급해진 인민해방군은 해안 마을을 습격하여 식량과 물자를 탈취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하여 마을 주민들은 마을 주변에 돌담으로 성을 쌓는 ‘축성’을 하여 마을을 습격하는 폭도들에게 대항했다.
이런 상황이 시작되면서 양쪽은 대대적 규모의 학살 사건들을 일으켰다. 10월 이후부터 군.관.민으로 구성된 진압대는 주로 입산자 가족이나 수배자, 소개령을 위반하여 소개된 마을에 머무는 사람들을 인민유격대나 동조자로 규정하여 즉결 처분하는 사태가 빈발했다. 이런 경우에는 ‘문서’에 의한 최소한의 선별이 이루어졌는데, 그 최소한의 ‘문서’는 남로당 명부, 남로당 입당원서, 백지 날인 명부, 재산잔비 명부, 좌익 주모자 명단 등이 그것이었는데, 이것은 살생부나 다름없었다. 북촌리 사건에서도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에 의해 마을 사람들을 양편으로 구분했다.
반면에 이 시기부터 인민해방군은 ‘문서’에 의한 학살 방식과 무차별 학살을 병행하다가 점차 무차별 학살로 진화되었다. 무차별 학살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마을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마을 습격에서 공포심을 조장해 약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방화와 학살은 필수적이었다. 그들은 마을 입구에서부터 방화하여 마을에 불을 지르고 지서를 포위한 채로 무차별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는 한편 체포조와 약탈조는 맡은 임무에 따라 움직이며, 체포조는 우익 인사들의 집을 ‘쪽집게’ 습격하여 선별 살해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선별’ 기준은 47년 3.1기념식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가 될 정도로 증오감에 찬 것들이었다. 이런 방식은 48년과 49년의 겨울 내내 좌우 양쪽에서 보복과 보복이 악순환되며 자행되었고, 북촌리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이런 시기의 절정기였다.
학살의 트리거는 무엇이었나? 기록의 재조명
그런데 4.3정부보고서에는 인민해방군이 군인 차량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사망한 것이 사건의 발단인 것처럼 기술해 놓았다. 과연 군인 2명의 죽음이 북촌리 주민들의 대량 학살을 일으킨 방아쇠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당시에 북촌리는 인민해방군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인민해방군들이 ‘휴가지’로 삼을 정도로 ‘민주 마을(좌익 마을)’이었다. 그리고 신촌리에 있던 남로당 도당본부가 경찰의 습격을 받은 후 북촌리로 옮겨질 정도로 북촌리는 거점 역할을 했고, 김완배, 이달군, 김완식 등 남로당 조천면당의 핵심 인물들이 북촌리 출신들이었다. 그리고 북촌리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군경들 사이에서는 ‘언젠가 한 번 손을 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48년 6월 15일: 북촌리 포구 피습 납치 사건
48년 6월 15일 북촌리에서 ‘북촌리 포구 피습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 북촌리 포구에서 벌어진 사건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북촌리의 본색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6월 15일 오전 11시 우도에서 제주읍으로 가던 큰 풍선배 한 척이 풍랑을 피해 북촌 포구로 들어섰다. 이 배에는 우도지서 양태수 경사와 진 순경, 이장 김응석(37), 지서 급사 양남수를 비롯하여 경찰 가족, 주민 등 15명이 타고 있었다. 읍내에 자취하러 가는 중학생의 쌀과 부식도 실려 있었다.
이때 마침 북촌리에는 산에서 ‘휴가’ 나온 인민해방군 핵심 참모장인 김완식을 비롯한 7~8명의 폭도들이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배가 선창에 닿자, 밀짚모자에 갈베옷을 입은 청년 3명이 다가왔다. 2명이 임검을 하겠다고 배 위로 올라와 양 경사가 있는 선실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총을 뺏으려 양 경사와 진 순경에게 달려들었고 싸움이 벌어졌다. 양 경사가 총을 쏘았으나 배 바닥을 뚫었고 총소리에 선창에 있던 폭도가 배에 올라와 총으로 양 경사와 진 순경을 차례로 살해했다. 그들은 나머지 승객들을 구타하며 배에서 내리도록 했다.
20여 명의 청년들이 몰려와 그들을 포박하고 주먹질을 하더니 산으로 끌고 갔다. 벌건 대낮이었다. 배 안에 있던 쌀과 의복을 탈취하던 폭도들은 진 순경이 아직 살아있는 것을 보고 마구 폭행하더니 끌어내어 진 순경의 등을 죽창으로 마구 찔러 살해했다. 승객들은 산에 잡혀 있다가 산중 인민재판에 부쳐졌고 전원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사형 집행 몇 시간을 남겨둔 시각에 경찰 가족의 납치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폭도들의 본부를 공격해 왔다.
경찰이 공격해 오자 폭도들은 여자들을 그냥 놔둔 채 남자들만 데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남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탈출을 시도했고, 폭도들은 총소리가 나면 경찰에게 위치가 들킬까 봐 총을 쏘지 못했다. 다행히 이들은 납치된 지 일주일 만에 무사히 구출되었다.
생포했던 폭도의 자백으로 이튿날 폭도를 앞세워 폭도들이 숨어있는 북촌리 굴을 찾아갔다. 폭도의 수갑에 줄을 연결하여 굴속으로 들어가도록 했지만 경찰이 줄을 놓쳤고 폭도는 나오지 않았다. 불을 피워 굴속으로 연기를 집어넣자, 앞의 집 마당에서 연기나 나왔다. 결국 경찰이 권총과 손전등을 들고 들어가 6명을 체포했다.
김덕선의 증언: "배 선창에서 폭도 두 명과 양 경사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을 때 그는 현장에 있었다."
이 내용은 2011년 제주자유수호협의회에서 발간한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에 실려 있는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이 책에는 당시 제주농업학교 4학년생으로 나이 21살인 김덕선이 타고 있었다. 그는 4.3으로 학교가 휴교되었다가 다시 개학이 결정되자, 쌀과 고구마 한 가마씩을 싣고 우도에서 읍내로 가는 길이었다. 배 선창에서 폭도 두 명과 양 경사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을 때 그는 현장에 있었다. 배에서 내릴 때는 폭도에게 발길질로 얼굴을 얻어맞아 바다로 떨어지는 바람에 그는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김덕선은 나중에 경찰에 투신하였고, 퇴직 후 2011년에는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 실무위원회에서 우파적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2011년 6월에 제주자유수호협의회 사무실에서 사건의 진실을 증언했다.
교차하는 증언들: 16일과 17일, 두 번의 습격
두 번째 사건은 북촌리 학살 사건의 전날 발생했다. 이날도 군인 차량에 대한 습격이 있었다. 즉 군인 차량에 대한 습격은 학살 사건의 당일(17일)과 전날(16일)에 연이어 두 번이 발생한 것이다.
16일 사건의 전모: 김봉현 김민주의 '4.3무장투쟁사'
16일 사건의 전모는 김봉현 김민주가 1963년 일본에서 저술한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이하 4.3무장투쟁사)’에 기록되어 있다. 김봉현은 교사 출신으로 4.3 활동을 하다가 4.3 직전에 일본으로 도망갔고, 김민주는 4.3 당시 학생 신분으로 인민해방군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수용소 생활, 인민군에 편입되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김봉현과 함께 극좌적 시각의 4.3무장투쟁사를 저술했다.
"49년 1월 말 (음력 12월 18일) 함덕 주둔 토벌대들이 동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즉각 세밀한 계획과 공격 태세를 유루 없이 수립한 다음 북촌리 속칭 ‘넓은숭이 동산’ 소남 밭 주위에 철벽의 포위진을 치고, 매복 대기하였다가 토벌 군병과 군수기재를 만재한 트럭 3대와 버스 1대가 이곳에 다다르자, 지휘자의 ‘탕!’하는 공격 개시의 야무진 총성에 전투원은 놈들에게 건곤일척의 불벼락을 이루고, 마치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용동하듯, 돌격 함성을 찌르며, 용맹 과감한 결사전을 집중하여 적들의 수송 체계를 여지없이 교란 파괴하였다. "(중략)
"이 전투에서 유격대는 99식 보병총 100정 (탄알이 없어 사용치 못하였음), M1 3정, 카빙총 5정을 탈취 로획하였고, 유격대원 1명은 원쑤를 무찔러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함덕 주둔 토벌대들은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다가 마침내 밭에 매몰되어 있던 밥그릇을 발견하고는 이것은 북촌리 부락민들이 빨치산들에게 식물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떠들어대면서 이날 아침부터 북촌리 부락민 1,000여 명(당시 300여 호, 1,400여명)을 북촌국민학교 교정 연병장에 강제로 끌어내었다."
이 기록은 16일 사건을 증언하는 기록 중 거의 최초에 가까운 기록이다. 기록에서 전사자 숫자는 유격대원 1명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이 흠이다. 그리고 탈취한 무기가 99식 보병총이라면 차량은 함덕 주둔 토벌대들이 동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중대 본부가 있는 구좌면 지역에서 함덕으로, 즉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시는 2연대의 총기를 M1으로 교체하는 시기였고, 99식 구식 총은 반납하기 위해서 중대 본부에서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가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인민해방군은 교체하는 무기를 노리고 이 시기에, 이 근방에서 비슷한 습격 사건을 많이 일으켰다.
혼재된 기록: 16일의 '밥그릇' vs 17일의 '들것'
현재 여러 저서에서는 17일 북촌 학살 사건의 트리거가 된 17일 오전의 군인 차량 습격 사건을 인용하면서 16일 사건과 17일 사건의 상황이 혼재되어 등장한다. 16일 사건과 17일 사간의 가장 다른 특징은 16일 사건에는 ‘밭에 매몰되어 있던 밥그릇’이 등장하고, 17일 사건에는 ‘들것을 든 노인들’이 등장한다. 이글의 초기에 인용된 4.3정부보고서 내용은 17일 사건으로, 이 내용의 원전은 소설가 오성찬이 채록하여 1988년에 발간한 ‘한라의 통곡 소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증언자는 북촌리 출신의 홍순식으로, 4.3 당시 그는 18세로 민애청 산하 소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고 한다.
홍순식의 증언과 오성찬 버전
비극의 날은 1948년 음력 12월 19일이었다. (양력은 49년 1월 17일).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일의 발단은 구좌읍 세화리 주둔 제2연대 3대대 7중대가 대대 작전에 합류하기 위해 대대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함덕리로 오다가 바로 동쪽 마을인 북촌리의 본동과 해동 사이 길가에서 게릴라의 기습을 받고 2명의 군인이 사망한 데서부터 발단한다. 군부대는 급했던지 2명의 전사자를 내버린 채 본부로 가버렸다. 그들이 가버리자 마을에서는 8명의 연로자들이 두 군인의 시신을 담가에 들고 함덕리 본부로 찾아갔다. 그들이 갔을 때 대대장은 부재중이었다. 하급 장교들은 담가를 들고 간 노인들을 함덕 해변 서우봉 기슭으로 끌고가서는 모두 사살해 버렸다.
17일 오전 사건을 기록한 오성찬 버전과 4.3정부보고서 버전은 노인들 숫자가 다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다른 버전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16일 버전과 17일 버전이 혼용되어 있다. 16일 버전에 등장하는 ‘매몰되어 있던 밥그릇’은 다른 기록에서는 ‘수색 중 발견한 따뜻한 밥그릇’으로 등장하기도 하여 독자들에게 폭도들이 밥을 먹다가 금방 사라진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런 기록은 인민해방군이 군인 차량을 습격했다는 기본적 뼈대 위에 17일의 ‘노인들의 들것’보다는 16일의 ‘수색 후 발견된 식지 않은 밥그릇’이 주로 등장하는 특징이 있다. 아마도 4.3 자료의 빈약성 때문에 이것이 두 개의 사건이라는 인식이 부족한 바탕 위에서, 군인의 행위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북촌리 학살 사건의 원인을 ‘군인 두 명의 전사’보다는 ‘수색 후 발견된 식지 않은 밥그릇’이 북촌 마을을 수색하다가 학살하게 됐다는 방어 기제에 좀 더 유리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었다.
진실의 규명: 이틀 동안 8명의 군인 전사
16일 사건과 17일 사건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자료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가 2014년에 발간한 통권 14호 143쪽에 나타난다. 이 자료에서 보면, 16일 차량 습격의 장소는 북촌리 ‘개여물 동산’이었고, 군인 4명과 민간인 운전사 1명이 사망한 것이 나타난다.
17일 사건이 북촌 너븐숭이 동산에서 발생했다면 16일 사건은 북촌 개여물 동산에서 발생했다. 17일 사건에서 차량은 기록상 동에서 서로 가는 방향이었고, 16일 차량은 서에서 동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17일 사건에는 군인 2명이 전사했고, 16일 사건에는 군인 4명과 버스 운전사 1명이 사망했다. 정확하게 실명도 등장한다. 3대대 12중대원 김원식, 김건조, 김현수, 박병규 등 4명이 전사하고, 사망한 민간인 운전사는 법환리 사람 강유효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에서 발간한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4집’에는 사망한 운전사 강유호의 아들 강은보(36년생)의 증언이 있다.
4.3으로 시외버스가 군에 차출되면서 부친 강유호도 군속 신분으로 버스로 군인 수송을 맡았다. 1949년 1월 16일 부친 강유호는 버스는 군인차보다 속도가 느리므로 앞에 섰고 군인차가 뒤따랐다. 구좌면 월정리 부근에서 폭도들이 고랑에 숨어있다가 기관총을 난사해 탑승했던 군인 18명과 함께 강유호는 전사했다. 이날 성명 미상의 조수는 살아남았으나 이튿날 돌아오다 폭도의 기습으로 숨졌다.
강은보의 증언은 16일 날짜는 맞으나 장소와 전사자 숫자에서 상이하게 나타난다. 원전(原典)인 4.3무장투쟁사에서 사건 장소는 월정리 부근이 아니라 북촌리 부근이었고, 월정리로 가는 차량이었다. 전사자는 앞 자료에 실명이 등장하기에 18명보다 4명이 맞아 보인다. 그런데 강은보는 증언에서 부친 강유호의 제사를 음력 12월 17일로 지내고 있었다. 양력으로 치면 1월 15일이다. 16일도 아니고 17일도 아닌 15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공적 저서에 등장하는 날짜도 오락가락하는 판에 개인에게 날짜 오류가 생기는 것은 그 당시 다반사였다.
북촌리 차량 습격 사건에서 증언자마다 상황이나 숫자가 조금씩 어긋나는 것은 당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가 거의 없었고, 4.3이 끝난 후에 소문으로 얻은 정보에 자기의 상황을 꿰맞췄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이 시기, 이 근방에서 차량 습격 사건은 많이 터졌다. 위 기록에서 16일 습격에서 살아남았던 ‘성명 미상의 조수’가 이튿날 돌아오다 폭도의 기습으로 숨졌다고 하니, 이 근처에서 폭도의 습격이 얼마나 빈번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선교 목사의 저서 ‘제주4.3사건의 진상’에도 ‘북촌마을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북촌리 포구 납치 사건과 17일 차량 습격 사건이 등장한다.
49년 1월 17일 2연대 3대대가 함덕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2연대 3대대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가던 중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폭도들의 기습을 받고 2명의 국군이 전사하였다. 신고를 받고 국군이 북촌마을에 출동하니 폭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먹다 남은 음식은 아직도 따뜻하였다. 진압군은 주민들을 초등학교에 집합시켰다.
여기에서 17일 사건의 기록은 대부분 원전과 다르지 않으나, 16일에 등장하는 ‘밥그릇’이 17일에 등장하는 것으로 나온다. 즉 16일 원전과 17일 원전의 내용이 혼재되어 있다.
나종삼 전 4.3전문위원이 2013년에 저술한 ‘제주4.3사건의 진상’에도 북촌리 피습사건이 등장하는데, 내용은 이렇다.
군은 무장대로부터 피해를 입으면 주민들을 보복살상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49년 1월 17일 발생한 해안마을인 조천면 북촌리 사건이다.
이날 아침에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이 숨졌다. 피습현장에는 돼지고기와 쌀밥 등 무장대들이 먹다가 버리고 간 음식이 있었다. 이에 군인들은 이 음식이 마을에서 제공한 것으로 단정하고 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와 내통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여기에도 원전으로만 따지면, 16일 버전과 17일 버전이 믹스되어 있다. 대체로 우파 저서에서는 북촌리 피습 사건에서 ‘먹다 남은 음식’은 단골로 사용되는 소재이다.
월간조선 2025년 4월호 ‘심층 인터뷰’에는 한철용 예비역 장군과의 인터뷰 내용 중에도 북촌리 사건의 언급이 나타난다. 한철용 예비역 장군은 2025년 4.3실화소설 ‘눈’을 발표했고, 이 내용으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 동복리 굴왓 학살사건도 같은 날에 벌어진 거죠.
“너븐숭이 학살사건과 같은 날인 1949년 1월 17일, 동복리에서도 86명의 양민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전날 1월 16일 월정리를 향해 달리던 군용 차량이 개여물동산에서 인민유격대의 매복공격을 받아 군인 4명과 민간인 1명이 죽습니다. 이튿날 아침 또 인민유격대가 북촌리 어귀 마가리동산에서 매복작전으로 군인 차량에 탄 4명을 죽입니다.
여기에서 한철용 예비역 장군은 16일과 17일, 양일에 각각 4명씩 전사했다고 발언했다. 그런데 17일 사건에서 전사자가 2명이라는 기록은 소설가 오성찬이 최초로 채록했고, 4.3정부보고서에도 이 기록을 이어받았다.
그만큼 그날의 상황과 숫자는 저서마다 다르게 나타나다 보니 저자들도 서로 다른 숫자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개인적 증언들이 난무했고, 그 난무하는 증언에 자기 개인사를 얹어서 발언하다 보니 그만큼 진실은 오리무중이었고, 그만큼 북촌리 군인 차량 습격은 빈번했는데 4.3자료는 빈약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다만 중요한 것은 16일과 17일의 사건이 별개 사건임을 확실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2019년 '4.3추가보고서'의 인정과 여전한 의문
이런 상황들이 펼쳐지자, 드디어 2019년 제주4.3평화재단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이하 4.3추가보고서)’에는 16일에 군인 차량 습격 사건이 더 있었음을 인정하고 확인했다.
셋째, 북촌 대학살의 발단이다.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이 사망한 사건이 전날 한 건 더 있었음을 추가로 확인했다. 식량영단 운전수로 근무하던 이명수(당시 21세)의 트럭이 징발되어 2연대 군인들이 군수품을 농업학교 연대본부에서 싣고 함덕 대대본부를 거쳐 김녕리로 가던 중 동복리 지경에서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몇 명이 죽고 본인은 총상을 입었다. 이날 사망한 2연대 군인은 총 4명으로 확인된다. 다음 날인 1월 17일 북촌 마을 어귀에서 연속적인 무장대 기습으로 3대대 군인들이 희생됨으로써 북촌리와 동복리에 대한 보복 주민 집단학살을 집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4.3추가보고서의 내용은 김봉현 김민주의 4.3무장투쟁사에 나타난 내용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16일 사건의 의문점들을 해소시켰다. 차량 방향은 구식 무기를 반납해야 했기에 동에서 함덕 방향인 서쪽으로 진행했을 것이라는 필자의 예측도 틀렸다. 차량은 무기 반납이 아니라 군수품 배급이었기에 함덕에서 중대 본부가 있는 구좌면 지역의 동쪽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장소가 동복리로 나온 것은 북촌리와 동복리는 붙어있는 마을이고, 사건 발생 장소인 ‘개여물’이 근처에 있다면 동복리가 될 수가 있다. 그리고 차량은 버스가 아니라 군수품 트럭이었다. 안개 속에 있던 16일 사건은 4.3추가보고서에서 어느 정도 상황 정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돈을 많이 들여 추가로 만드는 두꺼운 정부보고서임에도 전사자 숫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군인 몇 명이 죽고’라는 표현은 정부보고서에 쓸 단어는 아니다.
그렇다면 2명이 전사했다는 17일 사건은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일까. 4.3정부보고서에는 2명이 전사한 것으로, 한철용 전 장군은 전사자 4명으로 발언했다.
김영중의 명쾌한 정리: '이순범, 이영준, 김선락, 최하중 등 4명이 전사'
17일 사건은 김영중 전 경찰서장의 저서 ‘제주4.3사건 문과 답’에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김영중 전 경찰서장은 평생을 경찰에 투신했고, 퇴직 후에는 제주도재향경우회장 등을 역임하며, 노무현 정부의 4.3정부보고서의 왜곡에 맞서서 제주4.3의 진실 수호 운동에 여생을 바치고 있다. 그는 ‘남로당 제주도당 지령서 분석’ ‘레베데프 비방록’ ‘내가 보는 제주4.3사건’ 등 제주4.3의 왜곡을 바로 잡는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다.
‘제주4.3사건 문과 답’에서는 북촌리 피습 사건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북촌사건이란 1949년 1월 17일 발생한 북촌리 주민 집단총살사건을 말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사건 전날 오후 구좌면 월정리 주둔 제2연대 3대대 12중대원이 조천면 함덕리에 있는 대대본부에서 월정리로 가던 도중 동복리와 김녕리 사이‘개여물동산’에서 공비 매복조의 기습으로 김원식, 김건조, 김현수, 박병규 등 4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운전사 1명이 살해당했으며, 그 뒷날 아침에 위 부대원이 월정리에서 함덕으로 이동 중 북촌리 어귀 ‘마가리동산’에서 다시 매복조 기습을 받고 이순범, 이영준, 김선락, 최하중 등 4명이 전사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습니다."
"이틀 동안 전우 8명을 잃은 3대대 군인들은 이성을 잃게 되었고, 마침 군인을 기습한 무리 일부가 북촌리 안으로 도망갔으며, 교전 현장에서 돼지고기 반찬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발견되자 공비들을 이 동네사람으로 본 3대대 군인들이 북촌리를 포위한 후 전 주민을 북촌국민학교에 집결시키고, ‘마을로 도망친 폭도는 나와라’고 몇 번 말했으나 나오지 않자 주민 중 군경가족을 제외하고 집단 총살한 사건입니다."
여기서는 16일과 17일 군인 전사자의 실명이 정확하게 등장한다. 즉 이틀 동안 군인 8명이 전사한 것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오리무중이었던 17일 전사자 4명의 출처는 제주4.3평화재단에서 나온 ‘제7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2014)’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제주4.3평화재단은 2014년에 이미 17일 사건의 실체를 밝혀놓고도, 2019년에 거액의 혈세를 들여 800여 페이지에 가까운 두꺼운 4.3추가보고서를 만들면서도 17일 사건의 진실은 고의로 은폐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단체가 4.3정부보고서를 쓸 자격이 있을까.
엇갈리는 기록과 또 다른 사건들
한수섭의 증언: "현장에서 직접 ‘돼지고기와 쌀밥’을 목격했다."
그리고 여기서 또 17일 사건에 ‘돼지고기 반찬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등장한다. 김영중 전 서장님과의 인터뷰에서 이 내용의 출처를 요청 드렸더니, 이 내용은 2003년 4.3정부보고서 발간 당시 제주경우회에서 수정 의견으로 제출한 내용 중의 하나였다. 당시 이 내용을 제보한 사람은 제주경우회 회원인 한수섭(31년 생)이었다.
한수섭은 당시 오현중학생으로 북촌리 해동 마을에 살고 있었다. 북촌리 해동 마을은 17일 사건 장소인 너븐숭이와 지척에 있는 동네다. 17일 사건이 벌어지자, 마을 사람들은 모이라는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한수섭은 현장에 갔다가 직접 ‘돼지고기와 쌀밥’을 목격했다. 그렇다면 돼지고기와 쌀밥은 16일 사건의 소재가 아니라 17일 사건에 등장하는 소재였던 것이 된다. 이 증언은 그동안 여러 자료에서 사건 현장의 음식물로, 16일과 17일로 뒤죽박죽 인용하던 북촌리 피습 사건의 상황을 한방에 정리해 주는 증언이 될 수 있다.
강은보의 증언과 2월 4일 사건의 미스테리
그리고 16일 사건에서 김영중 버전에는 민간인 사망자가 등장하지만, 추가정부보고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보고서에는 사망한 버스 운전자 대신 부상당한 트럭 운전사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강은보의 부친 강유호가 운전했던 버스는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강은보의 증언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강은보의 증언을 다시 보자.
"4.3으로 시외버스가 군에 차출되면서 부친 강유호도 군속 신분으로 버스로 군인 수송을 맡았다. 1949년 1월 16일 부친 강유호는 버스는 군인차보다 속도가 느리므로 앞에 섰고 군인차가 뒤따랐다. 구좌면 월정리 부근에서 폭도들이 고랑에 숨어있다가 기관총을 난사해 탑승했던 군인 18명과 함께 강유호는 전사했다. 이날 성명 미상의 조수는 살아남았으나 이튿날 돌아오다 폭도의 기습으로 숨졌다."
이 증언에서 특이한 것은 장소와 전사자 숫자이다. 장소는 북촌리가 아니라 월정리로 나오고, 전사자는 무려 18명이나 된다. 월정리 지역 도로에서 2연대 18명이 전사한 사건이라면, 이 사건은 1월 16일 사건이 아니라 2월 4일에 발생한 사건이다. 북촌리 도로에서 연이틀 차량 습격 사건이 벌어지고, 약 20일 후에는 북촌리에서 동쪽으로 수km 떨어진 김녕리(김녕리는 월정리 옆 마을이다) 지역 도로에서 군인 차량이 습격을 받아 군인, 경찰, 민간인 등 총 19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건이 벌어졌다.
1월 19일~20일: 또 하나의 북촌리 차량 습격 사건
2월 4일의 사건으로 가기 전에, 다른 사건을 먼저 보고 가자. 북촌리 차량 습격 사건 며칠 뒤에 또다시 북촌리 도로에서는 인민해방군에 의한 차량 습격 사건이 벌어진다.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에서 2015년에 발간한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5집’에는 앞의 두 건(16일과 17일 건)과 다른 또 하나의 ‘북촌리 차량 습격 사건’이 등장한다. 정확한 날짜는 등장하지 않으나, ‘북촌리민 총살 사건이 있은 2~3일 뒤’라는 내용으로 보아 날짜는 1월 19일~20일 정도에 발생한 사건이다.
1949년 1월 17일 (음력 12월 19일) 북촌리 폭도 투척 습격과 북촌리민 총살사건이 있은 2~3일 뒤 오후 경찰서로부터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경찰서장이 북촌리에 현지 조사를 가기 때문에 호위기동대로 출동하는 것. 서장 짚차 앞에 기마대 전원이 스리쿼터를 타고 호위하면서 북촌리 옛 북촌초등교(현재 북촌초교 동쪽) 현지에 도착했다. 정확한 위치는 북촌 서부락 입구에 초소가 있었고 초소에서 100m쯤 떨어진 ‘너븐숭이’ 빌레(땅에 넓적하고 평평하게 묻혀진 돌)에 100년이 넘은 팽나무 고목이 남쪽 일주도로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월정리 주둔 부대 버스가 북촌리를 지나간다는 연락을 받은 폭도가 이 팽나무에 올라가서 기다리다 수류탄을 버스에 던졌다. 또 매복했던 폭도들이 일제 사격으로 군인 4~5명이 전사하여 북촌리 총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경찰서장이 고목나무 아래에서 현장을 살피는 동안 경계 임무를 띈 선발대가 고목에서 500~600m 떨어진 동산에서 군인이 탄 버스(당시 버스는 화물차에 천막을 덮은 것)가 폭도의 습격을 받은 것을 발견했다. 길에는 폭도들이 군복을 벗겨가 내복을 입은 채인 군인 4~5명과 일반인 3~4명이 총상을 입어 신음하고 뒹굴고 있었다.
증언: 김창옥(당시 제주경찰서 기마대 근무)
증언자는 구좌면 송당리 출신 김창옥(26년생)으로, 4.3 당시 제주경찰서 기마대에서 근무했다. 17일에 발생한 군인 차량 습격 사건의 현지 조사를 나가는 경찰서장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아, 19~20일 경 서장을 호위하여 북촌리 현장을 방문 조사하던 중에 그 근처에서 그날 몇 시간 전에 습격을 당한 버스를 발견한 것이다. 이 버스는 군의 무기를 운송하는 징발 버스가 아니라 여객을 운송하는 일반 버스로 보여진다. 그리고 17일 습격 사건에서 폭도가 팽나무 위에 매복했다가 수류탄을 던지면서 공격이 시작되었고, 버스라는 것이 화물차에 천막을 덮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이날은 7~8명의 부상자만 발생하고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복이 탈취되었는데, 4.3시기 내내 군복은 인민해방군의 약탈 품목 중 선호하는 상위권 품목이었다. 군인은 자주 군복이 벗겨진 시신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군복이 활동성도 좋았겠지만, 탈영병 출신의 ‘군복 입은 폭도’는 일종의 엘리트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미군 자료에는 인민해방군이 프로파간다를 위해 계획적으로 군복을 수집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4.3희생자 숫자에도 ‘군복 입은 폭도들’ 소행이 국군의 소행으로, 국군이 누명을 쓴 것들이 많다고 봐야 한다. 한참 기울어진 비율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것은 전수 조사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이다.
주민 사살의 이면: 오인과 처형
17일 북촌리 사건에서 ‘들것을 든 주민들’이 시신을 운반해 갔다가 함덕 대대본부에서 사살되었다. 왜 사살되었는지 이유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이 사살되었던 이유는 당시 대대본부에 있던 정보원에 의해 운반자들 대부분이 자위대에 가담했거나, 입산자의 연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군 정보를 입수하기 위하여 시체 운반을 구실로 온 것으로 오인, 처형당한 것으로 안다는 증언이 있다.
2월 4일: 김녕리 부근의 대형 습격 사건
49년 2월 4일, 인민해방군이 군인 차량을 습격하여 대량의 피해가 발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번에는 북촌리에서 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김녕리 근방이었다. 이때까지 발생했던 차량 습격 사건보다 피해가 큰 대형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미군 자료에 나타난다.
2월 4일 호위병 20명을 태우고 일본 99식 총 150정을 수송하던 한국군 트럭 2대가 KUMNYONG(970-1150) (김녕- 필자주) 인근에서 매복해 있던 폭도들에게 기습을 당했다. 폭도들에 의해 호위병 15명이 피살되고 2명은 부상당했으며, 무기 일체를 탈취 당했다. 교전으로 경찰 1명과 주민 1명이 피살되고 폭도 1명이 사살되었다. (한국군 보고)
사건이 발생한 김녕리는 강은보 부친 강유호가 사망했다는 월정리의 바로 옆 동네다. 김녕리와 월정리 중간 지점에서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건 보는 사람에 따라 발생 장소가 김녕리나 월정리가 될 수 있다. 미군 자료에는 사망자가 경관과 주민 포함 총 17명이고, 강은보 증언에는 사망자가 강유호 포함 총 19명으로 비슷하다. 그리고 당시 버스가 화물차에 천막을 덮은 것이라면 이것도 보는 사람에 따라 버스도 될 수 있고 트럭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강은보 부친 강유호의 사망 날짜는 2월 4일일 확률이 높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망자 ‘주민 1명’은 강은보의 부친 강유효일 수도 있다. 제삿날이 틀렸다고 슬퍼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 당시 제삿날을 모르는 제사는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전사자 수수께끼: 돌에 새겨진 증거
그리고 이 사건도 북촌리 도로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에서 발간한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2집에는 강재훈의 미발표 원고 축약본을 싣고 있다. 강재훈(29년생)은 애월읍 납읍리 출신으로 평생을 경찰서 정보과 대공분실에서 일을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4.3자료들을 모아 정리해 놓은 ‘제주4.3의 실상’ 원고를 만들었는데, 그 원고에 2월 4일의 군인 차량 습격 사건이 나온다.
북촌리의 비극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1949년 2월 4일 오후 2시 경 북촌리 부락 동쪽 약 200여m 거리의 일주도로에서 구좌면 월정리 주둔 중이던 2연대 2대대 9중대 0소대(소대장 박재규 중위) 37명이 민간인 버스 편으로 부대를 함덕리로 이동 중 미리 부대 이동 정보를 입수한 재산 공비 중 제1연대(일명 3.1지대) 대장 이덕구가 지휘하는 주력부대와 북촌과 동복리 자위대 등 약 100여 명 대병력이 북촌리 부근 일주도로 변에 사전 잠복해 있다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군인 37명 중 23명이 전사하고 4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동승했던 함덕지서 부원하 순경이 사망하는 참상이 벌어졌다.
여기서는 2월 4일 사건이 북촌리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전사자는 23명으로 소개하고 있다. 미군 자료의 전사자 15명과는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 미스테리는 곧 풀렸다.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4집에서 편집자가 23명의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23명은 북촌리 사건 현장에 세워졌던 군인 전사자 추모비에 나타난 전사자 명단의 숫자였다. 즉 23명의 전사자는 북촌리 근처 도로에서 인민해방군의 습격으로 전사한 전사자의 총 숫자라는 것이다.
날짜별 사건 및 피해 현황 요약
1월 16일부터 2월 4일까지, 약 20일 동안 북촌리 근처 도로에서 발생한 군인 피습 사건은 여기에서 언급된 것만 해도 총 다섯 번이다. 날짜별로 사건과 피해자를 구분해 보면 이렇다.
1월 16일 : 군인 4명 전사. 민간인 1명 사망. (북촌리 너븐숭이)
1월 17일 : 군인 4명. (동복리 개여물)
1월 19~20일 : 부상자 7~8명. (북촌리 근처)
2월 4일 : 군인 15명 전사. 경찰 1명과 주민 1명 사망. (김녕리)
날짜 미상 : 사망자 미상, 강유호 버스 습격 당시 생존한 버스 급사 이튿날 귀환 길에 폭 도들의 재습격으로 사망. (북촌리와 김녕리 사이)
여기에 나타난 전사자들을 합하면 정확히 23명이 된다. 종이 자료들은 오락가락하는 데 돌에 새겨진 사료는 이렇게 정확하게 역사를 증빙하고 웅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추모비는 그동안 쓰러져 있어서 모를 수밖에 없었다. 북촌리에 세워졌던 군인 전사자의 추모비는 누군가에게 공격당해 풀밭에 쓸쓸히 누워있다가, 도로가 확장될 당시에 다행히 신흥리에 있는 조천면 충혼묘지로 옮겨 세워졌다고 한다.
사건 장소의 정밀 확인
북촌리 피습 사건에서 상황들이 헷갈리고 전사자 숫자가 오락가락한 것은 날짜와 장소가 비슷하고, 피습 상황이 비슷하다 보니, 이 사건과 저 사건을 정확히 구분 못하고 같은 사건으로 오인한 데서 기인했다. 그래서 정확한 장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사건 장소는 한철용 전 장군과의 인터뷰에서 정확한 위치가 드러났다. 한철용 전 장군은 군인 출신답게 미군 자료에 기록된 위치 좌표를 이용하여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
17일 사건의 ‘너븐숭이동산’에는 현재 너븐숭이 4.3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너븐숭이는 군인 피습 장소이면서 주민 학살 장소이기도 하다. 너븐숭이는 북촌리사무소에서 서쪽으로 약 700m가량 지점이다. 그 북쪽으로 북촌리 해동 마을이 있다.
16일 사건의 장소는 북촌리 ‘개여울동산’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개여울동산은 북촌리 옆 마을인 동복리 지경에 있었다. 북촌리사무소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km 지점 부근이다. 동복 마을 동쪽에 있는 대로길 삼거리 교차로 일대 부근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2월 4일의 사건 장소는 미군 자료에는 김녕리로 나와 있고, 강재훈 원고에는 북촌리 부근으로 나와 있다. 정확한 위치는 동복리 개여울 동산 지점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 김녕리 입구 삼거리 교차로에서 서쪽 직선거리 약 850m 지점 부근이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김녕리 지경으로 김녕리와 동복리 중간에 위치한다.
결론: 진실 은폐를 넘어 '수정보고서'를 촉구한다
북촌리 군인 피습 사건들이 발생 장소는 북촌리, 동복리, 김녕리 등 여러 장소에서 발생했지만, 그동안 북촌리 사건으로 묶어서 통용된 데는 이유가 있다. 17일의 군인 피습 사건으로 이어진 주민 학살 사건이 주는 충격파가 너무 크고 대단해서 그 충격파가 이런 세세한 사건들을 덮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북촌리 근처 도로 군인 피습 사건이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묶어져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날짜는 혼동되고 상황은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지금이라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서 다행이지만, 이런 진실을 찾는 역할을 해야 할 정부보고서가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되어 진실보다는 선동에만 목을 매다 보니 이런 난마 같은 상황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제주4.3에서 군인 피습 사건은 항상 냉대받았다. 북촌리에서만 이렇게 많은 군인 피습 사건이 발생했는 데에도, 4.3정부보고서에는 단 1건만이 겨우 수록되어 있었다. 전사자 숫자는 책자에 따라 오락가락하는데도 하필 전사자 2명이라는 아주 약소한 것을 골라 실었다. 4,3정부보고서는 군인에 의한 피해자 숫자는 부풀리고, 인민해방군에 의해 피해는 축소하는 편파적이고 일방적으로 작성되었다.
이 글에 실린 북촌리 피습 사건은 민간인들이 자비를 들여 탐문하고 채록하여 만들어낸 책자에서 참조한 내용들이다. 이 사건들은 이미 10여 년 전에 민간에서 밝혀낸 사건임에도 수십억, 수백억의 혈세를 들여서 공적 기관에서 만들어낸 4.3정부보고서에는 이런 내용들이 나오지 않는다. 4.3정부보고서는 ‘군경의 학살’에만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민간인들이 만들어낸 보고서보다도 부실하고 4.3의 진실을 은폐하는 보고서가 되어버렸다.
아직도 4.3정부보고서는 쉬지 않고 4.3추가보고서가 나오고 있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4.3정부보고서를 내놓을 기세다. 일개 재단에서 일개 동아리 패들이 모여 보고서랍시고 만들어내서 정부보고서라고 칭하고 있는데, 문제는 여전히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4.3을 바라보는 우물 안 4.3보고서의 재탕이라는 것이다. 4.3은 양쪽의 시각이 있고, 양쪽의 시각이 융합되어야 제대로 된 코끼리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동아리 보고서는 이제 그만 쓸 때가 되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만들어낸 4.3정부보고서는 왜곡과 날조로 얼룩져 있다. 4.3추가보고서를 쓸 여유가 있다면 먼저 수정보고서를 써야 마땅하다. 왜곡과 날조의 정부보고서를 만들어놓고서도 수정이나 반성도 없이 추가보고서만을 양산하는 것은 혈세 뜯어먹기에 다름 아니다. 제주4.3 기간 당시 한 달여 기간의 북촌리만 들여다보아도 4.3사건의 진실이 얼마나 편파적인지, 얼마나 안개에 가려있는지 느끼고도 남는다. 4.3추가진상조사보고서를 쓰는 사람들에게 좌우의 균형된 시각과 좌우의 균형된 집필진으로, 4.3추가보고서를 쓰기 전에 먼저 4.3수정보고서를 만들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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