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의 여행가를 찾아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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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여행가를 찾아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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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알렉산드리아의 대등대(大燈臺) 파로스(Pharos)

^^^▲ 알렉산드리아의 대등대^^^
로도스 섬의 거상을 건립한 시기와 거의 동 시대에 이집트의 알랙산드리아에 7 대 불가사의 일곱번 째인 대 등대가 축조 됐습니다. 같은 이집트의 '기자'의 피라미드' 건조로 부터 약 2 천 4 백년이나 뒤의 것이었습니다.

그 때의 이집트 왕은 '푸도레 마이오스 피라델 피오스'~재위 기원 전 285-247~였습니다.

알랙산드리아는 지중해 연안의 중심도시로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상선商船이 각국 각지로 부터 이 항구에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 왕은 회심의 대 등대를 만들었습니다.

백 대리석 축조의 등대 높이 약 130 m에 달했으며, 하부는 방형, 상부는 원형으로 정상에 광원光源의 불꽃이 큰 그릇 안에서 비쳐 나왔습니다. 이것은 등대였을 뿐 아니라 성채城砦였습니다.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를 정복한 후 자신의 이름을 딴 도읍이라는 뜻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 도시를 장차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키울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의 뜻대로 세계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지중해의 여러 나라는 물론 아라비아, 인도 무역의 중계 무역항이 되었습니다. 그후 알렉산드리아는 세계 최대의 무역항으로써 날로 번창을 거듭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없는 것은 눈 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에 알렉산드리아는 가장 번성을 구가했습니다. 이 당시에
인구가 50-100만 명이나 되었으며 도서관에도 장서가 50-100만 권이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무역항으로서의 발전만 아니라 학문상으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로도스 섬과 거리가 불과 1킬로미터에 지나지 않았고 제방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그 동쪽 끝에는 고대 기술의 정보를 모은 높이 180미터의 거대한 등대가 건립되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데르포스왕(기원전 285년~기원전 247년)의 명령으로 디노크라테스의 아들인 소스트라토스가 건립한 것으로 등대의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지어졌습니다.

오늘날의 등대처럼 가늘고 둥근 모습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빌딩처럼 지어졌으며 꼭대기 부분만 둥글게 하였습니다.

파로스 Pharos

그 둥근 모형 안에 거대한 화로가 장치되어 밤에는 내내 불을 피웠습니다. 땔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램프 뒤에는 거대한 반사용 거울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합니다. 이 등대가 오늘날 등대의 원조로 전해지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현 등대를 '파로스'라고 부릅니다.

파로스 등대는 단순한 항해의 표시였던 것은 아니었고, 등대 내부에는 300개 이상의 방이 있어서 많은 수의 군인들이 묵었으며, 따라서 성곽의 역할까지 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등대는 높이가 상당했는데도 꼭대기까지 연결하는 계단이 없었으며 나선형으로 비스듬하게 길을 만들어 말들이 다닐 정도였습니다. 등대 정상의 전망대에서는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중해는 물론 본토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상인들이나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사람들에게 단연 명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랍인들이 7세기에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이 등대는 빛이 너무 밝아 반사경의 불빛이 43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었으며, 맑게 개인 날에는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의 거리 모습이 거울에 비칠 정도였습니다.

이집트가 아랍인에 의해 점령을 당하고도 상당 기간 동안 이 등대는 잘 보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850년 경 신성 로마 제국과 이슬람교도간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파로스 등대는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아주 유리했으나 로마 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즉 로마군의 상황이 이 등대의 거울에 의해 낱낱이 관찰 당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싸움이 이처럼 불리不利하자 알렉산드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칼리프(회교도의 왕)에게 첩자를 보내, 등대 밑에 엄청난 금은 보화가 있다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칼리프는 즉시 등대 밑을 팠습니다.

파로스의 종말

그러나 적의 계략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반사경이 깨진 상태였고 다시 원상태로 회복 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이때부터 등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파로스 등대는 이슬람교의 사원으로 전락 해버렸습니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는 카이로가 번창함에 따라 점점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등대는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1375년 삼각주를 휩쓴 엄청난 대지진으로 파로스 등대는 그 나마의 모습마저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지진은 후유증이 커서 지진 지역을 정리하는 데만도 약 10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등대의 흔적이 없어지자 자연히 사람들의 입에서도 파로스의 이야기는 꼬리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묻혀 지내던 파로스 등대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고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겨우 등대가 있던 자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 크지 않던 섬에 그렇게 웅장한 등대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으로 그렇게 밝은 빛을 낼 수 있었으며 또 렌즈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등대의 건물에 방이 수백 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혹시 작은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등대의 이름 '파로스'는 보통명사로서 유럽인들 사이에 회자된 언어가 됐습니다. ~프랑스 어로는 프알Phare이라 합니다.~. 1994년 가을에 프랑스 해저 고고학 발굴 팀이 깊이 7m 정도의 바다 속에서 등대의 잔해 수백 점을 건지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오랫동안 수수께끼에 싸여 있던 파로스 등대의 신비가 조금이나마 벗겨졌습니다. 발굴 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4.55m, 무게 12톤의 여신상을 기중기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습니다.

발굴 팀은 아직도 바다 속에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등이 잠겨져 있어 그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에서 발굴된 잔해 또는 조형물마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사람들은 파로스 등대의 비밀이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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