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스크롤 이동 상태바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사회 밝혀온 횃불

한국사회 밝혀온 횃불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종교계의 큰어른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87년의 생애를 신앙 속에서 살다가 16일 선종(善終)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대구시 남산동 에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나 조부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집안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소년으로 군위공립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을 여의고 어려움을 겪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따라 세 살 많은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가 사제 서품을 앞두고 고른 성구는 시편 51장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였으며 그는 회고록에서 "과연 한평생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라고 밝혔다.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오른 김 추기경은 뮌스터 대학에 적을 두고 7년간 그곳에 체류했다. 그 때 만난 요셉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그리스도 사회학'은 김 추기경이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이론적 토대가 없었다면 이념논쟁 등으로 요동쳤던 1970-80년대 한국사회를 헤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에게 회프너 교수를 소개해준 인물은 일본 상지대학의 은사이자 '영적 스승'의 역할을 했으며, 뒷날 서강대를 설립한 독일 출신 테오도레 게페르트 신부였다.

독일 유학시절은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가 열리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공의회 정신에 따라 시대에 걸맞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변화와 쇄신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쇄신운동이었다.

이에 대해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가톨릭교회가 쇄신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바람은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강한 바람이었다"면서 "독일에서 겪은 그런 체험은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자신이 차분하게 앉아서 공부할 팔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고해성사와 미사는 물론 어려운 일만 있으면 김 추기경을 찾았다. "도와 달라"는 동포들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여기저기 불려다니다 보니 학업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가족제도'에 대한 논문주제를 붙들고 씨름하던 그는 결국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내며 교회 언론의 초석을 다졌는가 하면, 1966년에는 신설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고 그로부터 2년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은 그로서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주한 교황대사 히폴리토 로톨리 대주교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전갈을 받고 대사관에 들어선 김 추기경은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놀라운 말을 듣는다. 주교가 된 지 2년 밖에 안 된 주교단의 막내인 그에게 당시 빚에 쪼들리고 사제들이 분열되는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울대교구는 무겁고 부담스러운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시골뜨기 주교'에서 일약 한국 천주교의 중심인물이 된 김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현대사의 한복판이 됐던 명동성당과 함께 한국사회의 영욕을 몸소 겪어야 했다.

서울대교구장 취임미사 강론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에 따라 '세상 속의 교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던 그는 이듬해인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된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그러나 추기경이 되었다는 영광은 잠시였다. 1970-80년대 격동의 시대 속에서 세상과 교회를 모두 돌보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1970년대 가톨릭교회와 명동성당은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인식됐다.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당시 본의 아니게 여러 사건과 사태를 겪으면서 인권 사회 정의 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다" 면서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내 심경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고백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하면서 교회의 현실 참여문제로 내부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19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제들이 옥살이를 하는 등 교회와 정부의 골도 깊어져만 갔다.

그러나 이 시기에 김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의 현실 참여는 옳은 방향이라고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도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 굵직한 행사를 치러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등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도약하는 계기를 만든 행사들이다.

종교인이자 사회지도자로서 시대의 한복판에 섰던 김 추기경은 교황청에 사임 의사를 밝힌 지 6년 만인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은퇴 이후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는 등 북한 선교를 위해 노력했고,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너와 너희 모두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길을 제시해온 시대의 예언자인 그는 "당신들이 대한민국을 어디로 이끌고 가려하는가!" 지금 대한민국 어디로 가나!의 회견문을 옮긴다.

大韓民國 어디로 가나!

<김수환추기경 특별회견>

김수환 추기경은 20일 본보와의 회견에서 "대한민국의 헌법을 존중하는 위정자라면 대한민국의 정체성 위기에 대해 심각하게 대응해야 한다"며 "아무리 통일이 우리의 염원이지만 자유와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않는 통일은 단호히 반대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20일 천주교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 추모 행사 참가 차 내한한 프랑스 주교 및 신부들과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 근처 식당에서 오찬을 함께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들을 배웅하고 주교관으로 돌아온 김 추기경은 본보 취재진을 만나 대한민국의 정체성 위기, 공직자의 말 뒤집기, 과거사 청산 문제, 천주교의 생명윤리운동 등 폭 넓은 이슈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1시간여 동안의 인터뷰 내내 조용조용한 어조로 말했으나 대한민국의 정체성 위기에 이르러서는 가슴 속 깊이 있는 생각을 토해 내듯 어조가 단호했다.

- 강정구 교수의 발언파문과 관련해 국내의 이념갈등과 혼란이 확산되고 있는 데요.

"이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돼 있다고 봅니다. 강정구 교수가 말한 요지는 '6·25전쟁은 김일성이 일으킨 남침' 이었고, '6·25 전쟁 당시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한 달 내에 통일이 됐을 것',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아쉽고, 이 때문에 미국이나 맥아더가 원수다'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강 교수가 말한 내용 중 6·25 전쟁이 '남침' 이었다는 말은 그쪽 진영의 사람들 입에서는 오랜만에 듣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6·25 전쟁에 대해 늘 북침이었다고 말해 왔지요. 소련도 북한을 따라서 북침이라고 했고요. 그런데 '6·25가 남침'이라는 말이 강정구라는 사람을 통해서 처음으로 실토됐어요. 그 말은 옳은 말입니다.

또한 강 교수 발언 중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그들의 의도가 좌절됐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쉽다고 말하는 것은 조선인민공화국이 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이 그 때 무너졌어야 하는데, 무너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때 미국이 참전하지 않고,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하지 않았으면 실제로 그랬을 겁니다.

당시 저는 부산까지 피란 갔었는데 사람들은 실제 그런 위기를 느끼고 있었어요. 부산과 대구라는 아주 조그만 여백에만 대한민국이 남아 있었지요. 며칠 내에 낙동강전선이 무너지고 오도 가도 못하게 될 것 같은 위기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러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함께 피난 갔던 신부님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습니다.

마치 '제2의 광복'을 맞이한 것처럼 그렇게 기뻐했지요. 그것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때 대한민국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을 그렇게 아쉽게 생각하고 있어요. 대한민국이 조선인민공화국이 안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가 아닌가요.

만일 그 때 대한민국이 무너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 같은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 신부님들도 다 죽었을 겁니다. 실제로 6.25 전에 평양에서 나와 함께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대학 동창 신부 3명이 죽음을 당했고, 잘 아는 선배 신부님들도 다 죽음을 당했습니다.

6.25 전쟁 발발 후 남측으로 피란 온 이후에도 북한군의 진격에 따라 숨어 있던 동창, 후배, 선배 신부님들이 발각돼 모조리 끌려가서 다 죽었습니다. 부산까지 왔다고 하면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만일 현재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인민공화국이라고 가정해 보세요.

우리가 보고 있는 천주교회는 이렇게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김수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신부님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모습도 없었을 겁니다.

강 교수가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여과 없이 말한 것은 대한민국이 없어지기를 바랐고,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인민공화국을 세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기 때문일 겁니다.

대한민국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북한 인민공화국의 지배 하에 있었을 겁니다.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상상해봅시다.

종교의 자유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고, 신체의 자유도 없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 갇혀서 숨도 쉬지 못하는 상황에서 김정일의 지배 하에 살고 있을 겁니다. 대학교수라는 지성인이 어떻게 자유가 없는 김정일의 독재체제 하에 있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 하는지."

- 강 교수 논란에 대한 정부의 개입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강 교수에 대해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리려고 할 때 대한민국의 헌법을 존경하고 지켜야 하는 제대로 된 위정자라면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위정자가 이런 사람을 다스리는 검찰에 대해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인권을 보호한다고 견제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북한에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인권이 무시되고 짓밟히고, 감옥에 가고, 죽음까지도 당합니다. 이러한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안 하는 사람들이, 인민공화국이 안 된 것을 아쉬워하고 대한민국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겠다고 합니다.

청와대가 나서고, 장관이 나서는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현재 정말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살고 있는지, 간판만 대한민국이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영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때는 (위정자들에게) 솔직히 말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대한민국을 어디로 이끌고 가려하는가라고. 북한이 '우리는 하나다'며 민족만을 앞세워 선전하는 통일로 이끌어 갈 것인가.

자유민주주의도 없고, 시장경제도 보장 안 되고, 개인 인권도 무시되는 체제인데도 '민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렇게 통일이 돼야 하는가…. 통일은 누구나 소중히 생각하고, 누구나 염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통일은 정말 남이나 북이나 모든 국민이 사람답게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통일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다'고 외치면서 한반도기를 흔들면 순간적으로 감정적으로 반짝 기쁠 뿐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뭐가 될지도 모르는, 자칫 잘못해서는 모두가 김정일 체제하에서 살게 되는 그런 의미의 통일을 우리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통일이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해서 막아야 합니다.

대통령을 포함해 청와대에 계신 분들이 수고가 많으신데 이런 의문을 풀어 주기 바랍니다.

어째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살린 사람을 원수나 적으로 보고, 결과적으로 현행법에 저촉되는 말을 한 사람을 청와대와 장관이 나서서 그렇게 보호하는가. 우리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그 까닭을 말해 주기 바랍니다.

정말 걱정입니다.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대로 가면 우리가 적화통일 될 수도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까 별 문제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벌써 제거대상 리스트에 들어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현재 이 땅에 사는 국민 모두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는지, 참으로 암담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른바 군사독재 아래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딛고 나름대로 인권과 정의를 위해서 노력해왔습니다. 지금 현재 386세대로 불리는 지배세력만 (민주화에 기여) 한 것이 아닙니다. 자화자찬 같지만 나 같은 늙은 사람도 나름대로 미력이나마 힘을 썼습니다. 지금 나서서 나라 걱정 하는 사람들 대부분도 지난 시절 나름대로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수구보수로 몰고, 과거에 탄압했던 계층의 사람들로 분별없이 매도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정말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걱정 때문에 80이 넘은 노인 분들이 나서는 겁니다. 나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이런 말 오랫동안 참았습니다. 솔직히. 그래서 다시 묻건대 어디로 나라를 끌고 갈 것인지."

- 최근 한 민간단체가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했습니다. 현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의견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것은 필요한데, 그게 몇 사람이 모여서 그냥 단순한 잣대로 그렇게 처리할 문제는 아닙니다.

특히 친일문제 같은 것은 우리가 36년간 일본통치하에 있던 그동안에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속에서 살아온 그분들을 참으로 한 분 한 분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들이 친일이라고 말을 하지만, 우리나라를 위해서 너무나 많은 일을 하셨던 분들입니다. 그 점도 참조하고, 전문가들이 깊이 연구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역사를 판단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은 전쟁 마지막 시기에 국민총동원 취지로서 각 단체마다 총동원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 단체의 책임을 진 사람은 그 단체의 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노기남 대주교가 대표가 되고, 신자들의 대표로는 장면 박사가 됐습니다. 단순히 그런 것을 보고 친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가볍습니다.

그런 어른들에 대한 모독이라고도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일 그 잣대로 보면 저도 학병을 갔다 왔고, 창씨개명을 했고, 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도 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창씨개명은 부모로부터 물려 내려오는 성을 바꾸는 반윤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해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전쟁말기 배급이 끊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대부분 집에서 그러한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어쨌든 창씨개명을 해서 이름을 바꿨으니까 그런 잣대로 보면 친일 아닌가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어른들을 봐야 합니다. 그런 단체에 가입하면서 정말로 민족에 해를 끼치는 일을 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장면 박사의 경우에는 대표적인 신자였기 때문에 이름이 올라갔는데, 그걸 단순하게 친일이라고 매도하고 돌을 던진다는 것은 참으로 지나칩니다.

저는 성경 말씀에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하지 않느냐는 바리새인에게 '너희들 중에서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고 하셨다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들 가정에 아버지가 창씨개명을 안했거나, 학교 다니면서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있거든 이 분들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군대나 경찰의) 계급으로 따질 것이 아니라, 순경이라도 동포들을 정말 괴롭힌 사람들 중 악질이 있었다면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8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들어라 2009-02-17 12:47:56
지혜가 부르지 않느냐?
슬기가 목청을 돋우지 않느냐?
지혜가 길가 언덕에서 부르고
슬기가 네거리에 자리잡고 목청을 돋운다

마을 어귀 성문께에서
대문 여닫히는 곳에서 외친다

"사람들아, 내말을 들어라."
"사람의 아들들아, 내말을 들어라."
"풋나기들은 처세하는 길을 배우고
미련한 자들은 마음을 바로 잡아라
들어아, 나는 곧은 말만 하고
바른 소리만을 입밖에 낸다

내 입은 진실만을 말하고
내 혀는 그른 소리를 꺼려한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옳은 말뿐
내말에 잘못이나 거짓이 없다

어진 사람은 내말을 밝히 알고
지식있는 사람은 내말을 옳게 여긴다

네가 받아야 할 것은 은이 아니라 내 교훈이고
순금이 아니라 지식이다.

지혜는 붉은 산호보다 값진 것
네가 원하는 그 무엇을 이에 비하랴.

프리존 2009-02-18 16:10:05
국보법 폐지 반대했다고 "극우" 매도하더니..
故 김수환 추기경 생존 당시 자신들의 ‘인민재판’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던 좌익 언론이 김 추기경의 선종 이후에는 고인을 애도하고 칭송하는 논조로 일관해 눈길을 끈다.

은 고인의 선종 직후인 16일 저녁 라는 제목의 기사로 고인을 칭송했다.

신문은 “한국 현대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종교 지도자라는 수식어만으로 아우르기가 불가능하다”며 “그는 가톨릭을 넘어 많은 국민에게 정신적 지주였고, 1970~80년대 폭압의 시대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한 행동하는 지성이었으며, 늘 낮은 땅에서 어려운 이들과 함께한 이웃이었다”고 그를 추모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당시 한겨레는 공격적인 어조로 김수환 추기경을 맹공격한 바 있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던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김 추기경도 반대 의사를 밝힌 2004년 12월, 한겨레는 “남북화해시대를 거스른 김 추기경의 발언은 김 추기경 개인과 한국 천주교의 이미지에 적잖은 타격이 되었다”는 자의적인 기사로 김 추기경을 공격했다.

2006년 6월 7일에도 한겨레는 “가톨릭은 2000년대 들어 김수환 추기경의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등 연이은 극우 보수적 발언과 신자들의 급격한 중산층 보수화로 진보의 과실만 독차지한 채 70년대 이전의 종교의 모습으로 회귀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는 자의적 논리로 김 추기경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대다수 국민이 주장한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를 ‘극우 보수적 발언’으로 매도한 것이다.

故 김 추기경은 최후의 순간 국민들에게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평생 못 가진 자들을 돕고 민주화에도 헌신했던 고인은 국가보안법에 대해 대다수 국민들과 유사한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말년에 좌익들로부터 박해를 당했다.

그는 자신들을 박해한 자들마저도 용서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용서받아야 하는지 알고 있을까

프리존 2009-02-18 16:21:45
김수환 추기경을 회고하는 기사들 대부분은, 김수환 추기경이 7,80년대 민주화 투쟁에서 민주화의 주요 거점이었다는 점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고, 이를 부각시키고 있었다고 할 만 하겠습니다.
1990년대 말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김수환 추기경이 정권을 거머쥔 자칭 민주화 주체 세력으로부터 오히려 반민주인사로 낙인찍히고, 공격의 대상이 되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로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자칭 민주화세력들은 김수환 추기경이 쓴소리 좀 했다고, "김수환 추기경의 민주화에 대한 기여, 역할이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했고, 더 나아가 김수환 추기경의 일제때 만주군 복무기록을 갖고, 그 분을 "친일파"로 몰아가는 작태마저 서슴치 않고 자행했었습니다.
우리 언론이 김수환 추기경을 회고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근대 천주교이성의 구현자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근대 한국이 꼭 필요로 해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런 분을 근대 한국이 가졌다는 것은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다.


민주화란 사실 질적 근대화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질적 근대화라는 포괄적인 원망이 민주화라는 하나의 정치적 용어로 접근된 경우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란 분명 정치적인 용어이지만, 한국사회의 7,80년대에는 보다 포괄적인 보편성과 연결되는 용어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할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게, 한국사회가 민주화의 주술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사회의 자칭 민주화 주체 세력이라고 하는 자들이 오류를 범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쓴소리를 듣고, 김수환 추기경에게까지 저주의 주문을 외게 되는 원인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적 근대화의 달성 없이도 질적 근대화의 성립이 가능하다고 봤다고 하는 것이지요. 비유하자면, 우물에 가서 숭늉을 찾는 격, 그게 우리 사회 자칭 민주화 주체 세력이라고 하는 자들의 인식구조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합리적인 근대이성의 소유자였던 반면, 한국사회의 자칭 민주화 주체세력이 소유한 이성은 탈근대이성 아니면 현대이성이었지요. 보다 발전된 근대이성 이후의 이성을 지녔다고 자부했으니 이것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깔보고, 김수환 추기경을 친일파로 몰아가면서, 그분을 감히 역사 밖 무의 공간 속으로 몰아내려는 작업마저 서슴없이 자행한 것일 터입니다.

이것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박통과 같은 친일파로 몰아세운 데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는 일이긴 하겠습니다. 박통이나 김수환 추기경이나 합리적인 근대이성의 소유자였다고 하는 것이지요. 합리적인 근대이성의 소유자들은 자칭 민주화주체세력에게는 모두 친일파로 보일 게 틀림없는 일이니까요.

한국사회의 자칭 민주화 주체 세력이라고 하는 자들이 두가지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소유하고 있는 탈근대이성 내지는 현대이성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가 이미 파산했고, 역사의 과거로 입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이미 지난 20세기에 말이지요.

그리고 둘째는 근대이성이 곧 친일은 아니며, 근대이성과 친일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오만이요 맹목이며, 더우기 결코 정답일 수 없는 오류라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영면을 접하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추기경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혜인수녀 2009-02-19 18:31:37
언젠가는 이렇게 당신과의 마지

죄인을 용서하소서 2009-02-19 18:43:51
역시 교황님이시다.

선종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