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에게 바란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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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에게 바란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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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통일을 앞두고 혼노사에서 소수의 경호원들과 머물렀던 오다 노부나가를 기습 살해한 아케치 미스히데가 부하들에게 한 말
10.26 현장검증/MBC뉴스
10.26 현장검증/MBC뉴스

"적은 혼노지에 있다." 이 말은 일본 역사의 기점이된 전국시대말 전국영주이자 천하통일을 앞두고 혼노사에서 소수의 경호원들과 머물렀던 오다 노부나가를 기습 살해한 아케치 미스히데가 부하들에게 한 말이다. 미스히데는 탈번했으나 지성과 실력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발탁되어 대영주가 된 인물이었다. 이것은 또한 3.15 로 알려진 카이사르(Julius Caesar/시저)의 암살과도 연관되어 동서고금의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실지로 카이사르는 진정한 귀족주의와 관용주의의 모델이다. 그는 카르타고와의 전쟁 이후 거듭된 내전으로 혼미해진 로마의 공화정을 제정으로 재건한 인물이다. 그는 이를 위해 루비콘 도하와 12년에 걸친 원정(전쟁)을 치룬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마리우스와 술라라는 군사지도자들이 쿠데타후 살생부를  통한 공개숙청을 거부하고 관용하고 경호팀을 해체했다. 

하봉규 부경대 명예교수
하봉규 부경대 명예교수

하지만 역사는 관용은 고마움 보다 적개심을 초래했음을 보여준다. 그가 아끼고 용서했던 부하들과 적들은 경호관이없이 등장한 카이사르를 난도질하고 달아났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역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적용된다. 자신의 고향 친구이자 군동료였고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재규의 배반에 목숨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재규의 반역은 암살 1년 전부터 준비되고 첫 기점은 자신과 가까운 정승화의 육참총장 임명을 위한 대통령 독대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구에 대한 배려는 결국 육참총장으로 생각해 온 인물대신 정승화 총장 임명 이었다. 이후 정승화 총장은 군단장, 특전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 등에 자신의 인맥을 임명해 자신의 군맥을 구축한다. 

10.26의 현장이 된 곳(삼청동 안가)은 청와대와 중정의 공동구역이자 중정이 1차 관할하는 곳이다. 10.26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대통령과 경호실 몰래 그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것은 육참총장이 위수령을 벗어난 것이며, 군사반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10.26에 보여 준 내각과 보안사령관의 일관성과 민첩성은 박 대통령의 카리스마가 국가위기의 순간에 빛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총리와 장관들은 줄기차게 박 대통령의 유고 경위를 추궁했고, 반란수 김재규의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 정보기관 보안사는 김재규의 암살을 확인하고 제압하여 반란수괴를 신속히 체포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정승화 사령관에 대한 심판은 어려웠다. 심지어 10.26 당시 정승화에 대한 의혹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국방장관마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자 말을 바꾼다. 군내부도 반역(대통령  암살)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계엄사령관의 미묘한 혐의에 의견이 통일되기 힘들었다.  

12.12는 국군의 역사 뿐 아니라 한국사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보안사령관(전두환 장군) 이자 합동수사본부장을 위시해 신군부로 지칭되는 정규육사 출신들이 앞장서고 군내 선배들도 동참한 미완의 궁정쿠데타에 일격을 가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군사혁명은 1차적으로는 군에 의한 혁명, 2차적으로는 군 정보기관에 의한 혁명이란 패턴도 자주 목격된다. 

문제는 조선의 문약하고 미국의 민주주의에 몰각하는 편협성이었다. 12.12 이후 과도정부는 정국의 주도권을 보여 주지 못하고 박 대통령 사후 권력공백을 틈탄 대남공작과 여적 세력이 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5.16 당시 수도원으로 긴급  피난했던 장면 총리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결국 광주사태가 발생한다. 이것은 1960년대 무력도발에서 1970년대와 유신체제에 발맞추어 민주화와 지역화에 전념해 온 대남기구에 크나 큰 기회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비자금 등 북과 결탁하여 1970년 초 대선에서 이미 향토예비군제 폐지, 4대국 보장론 등 진보적 공약으로 국가안보와 정책기조를 흔든바 있다. '서울의 봄'은 김대중과 북한(김일성)의 공조로 진전되기 시작했다.  

광주사태는 세계공작(게릴라)사의 전설이 되었다. 무엇보다 전선과 멀리 떨어진 대도시에 600여 명의 북한특수군이 작전을 펼쳤을 뿐 아니라 내부 협조자들과 합세하여 코뮨을 만든 것이다. 선전선동을 성공시키고, 수많은 예비군 무기고를 급습하여 무장하고, 군경을 무력화하고, 도청을 접수하고, 마침내 광주교도소를 무력 기습하는 그들의 행적은 한편의 성공신화이나 교도소 기습의 실패는 주력을 잃게 된다. 

이후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으로 이행되자 민주화의 망령이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의 유지를 존중한 신군부는 유능한 참모진과 일관된 경제정책 나아가 과학, 정보통신, 대기업의 국제화 등으로 국가경영의 신기원을 이루었으나 존중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한일국교정상화, 월남전 참전, 고속도로건설 등에 반대를 위한 반대에 임했던 야당과 재야세력에게 자율보다 질서가 앞서며, 권리보다 책임을 우선시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대원칙을 제시하는 지적 기반 조차 없었다. 

불행한 것은 1970년대 미국의 명문대학들과 지성들도 한국의 전략적 위상 나아가 독재와 경제발전이 결합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훗날 마거릿 대처(영국)와 리콴유수상(싱가폴)의 사례가 나타나자 한국의 군사정부에 대한 재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좋은 예가 마케팅계의 구루 필립 코틀러교수가 '국가마케팅'에서 1980년대 성공과 실패사례로 한국과 브라질을 들었다. 또한 5공 정부의 긍정적 평가는 국제경영학의 주류가 되었다.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역사를 바꾼 배신이나 암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위대한 지도자였으나 사후 현충원 뿐 아니라 자신이 바란 곳에 묻히지 못하고 있는 딱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예우문제를 거론하고 싶다. 한국이 반지성과 저질성으로 치닫는 것은 종북주사파의 지독한 역사와 영웅에 대한 펌하 때문이다. 월남전 참전용사이자 석학인 80 노령 지만원박사님이 보수정부인데도 사면되지 못하는 것과 함께 국군이자 전관에의 기본 예우도 잊은 것이다. 역사와 영웅에 관심있는 필자는 우리의 적은 내부에 있고, 바로 우리의 무지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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