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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화와 조국 근대화에 모든 열정을 바치신 박정희 대통령종합제철 건설은 朴 대통령의 특별 관심사였기 때문에 경제기획원에서는 1965년 9월 일본 정부에 철강 조사단 파견을 요청했다. 그리고는 이 조사단의 보고서를 토대로 연산 50만 톤 규모의 개략적인 건설 계획안을 작성, 66년 7월 경제장관회의에 상정, 확정시켰다. 이에 따라 종합제철공장 건설사업은 제2차 5개년 계획에 있어 석유화학과 함께 양대 전략사업으로 등장하게 된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
朴 대통령, 종합제철 건설에 강한 집념
1961년 혁명 당시 우리나라의 철강 수요는 연간 10만 톤 정도로 종합제철을 건설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시 북한에서는 일제 때부터 가동하던 황해 제철소(舊 겸이포 제철소)와 김책 제철소(舊 청진 제철소)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와는 별도로 구식공법을 사용하는 입철법(粒鐵法)식 제철소도 몇 개 가동하고 있었다.
선철(銑鐵) 생산능력은 약 100만 톤이었는데 이 선철을 처리할 정도의 제강(製鋼) 시설과 압연(壓延) 시설도 갖추고 있어서 북한은 철강 생산국으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철강으로 본격적인 병기 생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朴 대통령으로서는 남북한 대결상 크게 부담이 되었다. 朴 대통령은 종합제철 건설에 대해서 강한 집념을 갖게 되었고 손수 챙기기 시작한다. 朴 대통령 프로젝트로 변해갔다는 뜻이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작성시 상공부의 철강부문 입안자는 연간 30만 톤의 종합제철공장 건설사업을 포함시켰다. 당시 북한에서는 15~20만 톤 용량의 용광로 4기(황해 제철소 2기, 김책 제철소 2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30만 톤이라는 규모를 생각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최형섭(崔亨燮) 당시 광무국장은 일본의 고베(神戶)제철소를 시찰(본인도 동행)하고 난 후 30만 톤 규모의 제철소는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테크노크라트로서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 결과 1963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축소 수정할 때 종합제철 건설이라는 항목은 없어지게 됐다.
KISA (Korea International Stell Associates)에 의한 종합제철 사업
종합제철 건설은 朴 대통령의 특별 관심사였기 때문에 경제기획원에서는 1965년 9월 일본 정부에 철강 조사단 파견을 요청했다. 그리고는 이 조사단의 보고서를 토대로 연산 50만 톤 규모의 개략적인 건설 계획안을 작성, 66년 7월 경제장관회의에 상정, 확정시켰다. 이에 따라 종합제철공장 건설사업은 제2차 5개년 계획에 있어 석유화학과 함께 양대 전략사업으로 등장하게 된다.
종합제철 건설에 거대한 자금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제기획원에서는 다른 일은 다 제쳐놓고 차관 얻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방법으로는 미국 코퍼스社를 중심으로 국제 차관단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 6일 미국의 코퍼스社가 주축이 되어 블로녹스, 웨스팅하우스社와 서독의 데마그, 지멘스 2개社, 영국의 웰먼(Wellman)社, 이탈리아의 임피안티(Impianti)社 등 4개국 7개사가 모여 4일 간의 협의 끝에 소위 대한국제제철차관단(對韓國際製鐵借款團,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약칭 : KISA)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이 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은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 차관단이 1억 달러, 한국이 2,500만 달러를 출자한다」라는 것이었다.
1966년 12월 12일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는 IECOK(對韓援助國際經濟協議體)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정부는 과거 미국과 일본에 의존해 왔던 외자를 IBRD, IMF 등 국제금융기관과 서독,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까지 확대한다는 목적과 국제적으로 채무상환 능력을 인정 받기 위해 이 기구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 회의에는 미국, 일본, 대만,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캐나다, 호주 등 8개국 외에 영국이 참가하고 IMF, IBRD, UNDP 등 국제금융기구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정부는 이들 회원국들에게 종합제철 건설 지원을 요청하였다.
KISA는 67년 4월 건설사업 계획서 및 자금조달 계획서를 한국 정부에 제출, 동년 10월 20일 한국 정부와 KISA 간에 종합제철공장 건설 기본계약이 체결됐다. 이 때 규모를 60만 톤으로 확대했다. 한편 KISA와의 기본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던 10월 3일 정부는 포항 현지에서 종합제철 공업단지 기공식을 가짐으로써 종합제철 건설에 대한 한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국내외에 천명하였다.
즉 여기서도 공업 단지화(團地化) 작전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11월초에는 종합제철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다음 해인 68년 3월에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투자비율 : 정부 75%, 대한중석 25%, 사장 : 박태준)를 창립하여 4월초부터 포항에 공장용지 300만 평을 매수, 조성작업에 들어갔다.
차관 확보 실패로 KISA 안 좌절
IBRD(세계은행)에서는 KISA 안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KISA로서는 세계은행 등 공공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차관은 기대할 수가 없게 됐다.
1968년 7월 김정렴 상공부 장관이 제2회 한미상공장관 회담차 워싱턴으로 떠나게 됐는데(본인도 동행), 이 때 朴 대통령은 세계은행 총재를 만나서 종합제철에 대한 차관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라는 특별 임무를 부여했다.
金 장관이 세계은행 총재에게 한국의 종합제철에 대해 차관을 요청하자, 그는 "세계의 개발도상국은 정치적인 목적 때문인지 종합제철을 갖기를 원한다. 한국의 60만 톤 제철소는 경제성이 없으니 차관을 줄 수 없다. 다만 한국의 석유화학 프로젝트에는 차관을 주기로 방침을 세웠다"라고 했다. 그러자 金 장관은 "석유화학보다 종합제철의 우선 순위가 높으니 석유화학에 줄 돈을 종합제철에 돌려 달라"고 했다. 석유화학 건설을 담당한 상공부 장관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 朴 대통령의 종합제철에 대한 강력한 집념을 잘 나타내 준다. 그러나 세계은행 총재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공공차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경제기획원은 68년 10월 12일 미국 수출입은행에 정식으로 차관 예비신청서를 발송하였다. 이 때 정부는 미국 수출입은행의 69년도 대한(對韓)차관 중에서 종합제철 사업을 제1순위 사업으로 명기했다.
자금의 용도는 미국의 KISA 회원사이며 설비 메이커인 코퍼스, 블로녹스, 웨스팅하우스 3개社로부터 설비를 구입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기했다. 완전한 컨소시엄식 상업차관이라는 것을 한국 정부가 스스로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 해 11월, IBRD 조사단은 "한국은 종합제철 건설에 앞서 기계공업 발전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라는 뜻밖의 건의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것은 한국 정부가 발송한 차관 예비신청에 대하여 미국 수출입은행을 대신해서 IBRD가 보낸 공식적인 거부반응이었다. 상업차관도 안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1969년 2월 7일에는 코퍼스社 포이 회장으로부터 한국 정부가 KISA 회원국과 직접 교섭을 해달라는 공한을 보내 왔다. KISA는 차관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
1969년 4월 박충훈 부총리가 제3차 IECOK 총회 참석차 파리로 떠났는데, 朴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종합제철에 대한 차관을 마련해 오라는 강한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김학렬 경제수석도 함께 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朴 부총리는 종합제철에 관계되는 모든 인사를 이끌고 갔는데, 경제기획원의 황병태(黃秉泰) 협력국장, 양윤세(梁潤世) 투자진흥관, 재무부의 홍승구(洪承九) 외환국장, ADB(아시아개발은행)의 천병규(千炳圭) 이사, 그리고 상공부에서 내가 주요 멤버였다.
나는 당시 상공부의 기획관리실장이었기 때문에 종합제철이나 차관문제에 관해서는 아무 관련이 없는 데도 테크노크라트의 대표라는 입장에서 지명됐다. 朴 부총리는 이 회의에서 종합제철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본협력을 요청하고 朴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도 함께 전했다.
그런데도 IECOK의 의장직을 맡고 있는 세계은행은 경제성 문제를 들어 타당성의 재검토를 주장하였다. 미국의 수출입은행 총재와 서독측도 이에 동조했다. 이로써 KISA는 사실상 깨지고 말았다.
朴 총리는 IECOK 총회가 끝난 후에도 차관공여국(借款共與國) 중 가장 비협조적인 서독과 미국을 설득하기 위하여 본과 워싱턴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4월 29일 미국 수출입은행 컨스 총재와의 회담에서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은 경제적 타당성 면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차관을 줄 수 없다는 최종 방침을 통보함으로써 KISA를 통한 제철소 건설방침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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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차 IECOK 미팅 후 KISA의 회원인 서독의 데마그社 공장 시찰주황색 원 (박충훈 경제기획장관 <당시 사절단 단장>), 초록색 원 (김학렬 경제수석), 자주색 원 (오원철) ⓒ 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 | ||
치밀한 엔지니어링 작업없이 자금확보에만 주력
이상 내용을 요약해 본다. KISA에 의한 종합제철 건설에는 3者가 등장하는데 경제기획원, KISA, 세계은행이다. 포항종합제철(株)은 피동적으로만 움직였다.
먼저 경제기획원의 입장을 보자. 경제기획원에서는 외국 기관으로 하여금 종합제철 건설에 대한 용역을 실시하게 하고 이코노크라트들이 종합제철 건설안을 작성했다. 석유화학 건설 때는 테크노크라트가 치밀한 엔지니어링 작업을 했는데 이코노크라트는 이러한 과정을 완전히 배제했던 것이다.
경제적 타당성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으며 국제경쟁력을 갖고자 하는 대책조차 세우지 않았다.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작용했다. 경제기획원의 이코노크라트는 소요자금 특히 차관을 어떻게 마련하는가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세계은행은 뱅커(銀行家)의 입장에서 검토한 결과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이유로 차관을 거절한다. 그리고 IECOK의 회장은 IBRD에서 맡고 있기 때문에 IBRD에서 반대하자 다른 나라에서도 동조하고 차관을 거부했다.
결론적으로 경제적으로 타당성도 없는 KISA 안을 갖고 차관을 얻으려고 4년간을 노력하다 결국은 실패했다는 내용이다. 만일 KISA 안대로 추진했더라면 포항종합제철은 거대한 부실기업체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세계은행이 KISA 안에 대해 반대해 준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다.
대일청구권자금에 의한 종합제철 건설
朴 부총리 일행은 IECOK 회의 후, 서독과 미국을 방문하고 동경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박태준 사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에게 종합제철에 대한 그간의 교섭내용을 물어보기에 IECOK의 분위기를 설명하니 몹시 우울해 했다. 사절단 일행은 호텔에 모여 그간의 교섭 내용을 정리하는 회의를 가졌다.
朴 대통령의 특명사항인 종합제철에 대한 차관 획득에 실패했으니 모두 암담할 뿐이었다. 이 때 양윤세(梁潤世) 투자진흥관이 대일청구권자금을 요청하면 가망성이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나는 이 말을 듣자마자 회의장 밖으로 나와 주일 대사관 직원에게 부탁해서 일본 통산성 담당국장과의 면회를 신청했다.
통산성에서 만난 수출진흥국장은 화학국장을 역임했던 고도(後藤正記) 국장이었다. 나는 고도 국장에게 "우리는 제철소를 꼭 짓고 싶소. 일본의 제철소 건설능력은 이미 세계 일류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해외에서 종합제철을 건설한 실적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한국에 건설한다면 일본의 종합제철건설 능력을 세계 각국에서 높이 평가할 것이며 앞으로 수주가 늘 것 아니오"라고 말을 꺼냈다. 고도 국장은 소신 파 같았다.
그는 "못할 것도 없소. 그런데 60만 톤이란 장난감 제철소요"라고 한다. 나는 "물론 60만 톤을 고집하지 않소. 100~150만 톤으로 하고 정부가 모든 지원조치를 하겠소. 우선 항만, 철도, 전기가설 등 모두 정부에서 무상으로 해 주겠소. 국내에서 필요한 돈은 전부 출자금으로 해서 이자는 없앨 작정이요. 대일청구권자금을 쓸 수만 있다면 이것도 출자조치해서 이자나 상환문제를 없애도록 하겠소. 그리고 부족한 자금은 저리장기 차관을 얻는다면 100만 톤 제철소도 충분히 채산을 맞출 수 있다고 보오"라고 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 물건을 파는 것이 되니, 일본 철강업계에 활기를 넣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소"라고 덧붙였다. 고도 국장은 한참 생각하다 부하 직원을 모두 불러 소개하고 캐비닛에서 위스키를 꺼내더니 "술이나 한 잔 합시다"라고 했다.
그는 부하직원에게 "우리 국의 소관업무는 수출 진흥이다. 종합제철 설비를 수출한다는 것은 즉 우리의 임무이다.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러더니 나에게 술잔을 권하며 "나는 윗사람에게 보고 할 테니 당신도 한국 정부에 보고하시오"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국장의 발언이라는 것은 업계 입장까지를 대표한 의사를 뜻한다. 그렇다면 고도 국장은 한국의 종합제철에 대해서 이미 모든 사항을 파악하고 있으며 철강업계와는 자주 논의해 왔다는 뜻이 된다.
(註 : 고도(後藤) 국장이 정부에서 퇴임한 후 나를 만나고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그는 "일본 철강업계에서는 KISA 때부터 참여할 것을 생각했었으나 주도권이 미국(코퍼스社)에 있기 때문에 중지시킨 일이 있다"라고 했다)
물론 청구권 자금을 관장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대장성(大藏省)이고 결정권은 일본 정계에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해결방법의 실마리는 찾았다는 감이 들었다.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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