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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화 현장을 직접 방문하며 점검 하시는 박정희 대통령석유화학공단은 1968년 3월 22일에 착공, 1972년 10월에 준공식이 거행됐다. (註 : 울산석유화학단지의 각 공장은 가동 첫 해부터 흑자가 났다. 다음 목표는 국제규모 미달의 석유화학공업을 어떻게 해서 국제규모인 30만 톤으로 갖고 가느냐였다). 그 후 우리나라의 석유화학은 급속히 발전해서 1997년 현재 생산능력 약 500만 톤으로 세계 제4위의 석유화학 대국이 되었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
나프타 분해공장에서 나오는 유분(溜分)가격의 국제가격 유지 방안
석유화학은 모체가 되는 나프타 분해공장과 여기서 생산되는 에틸렌 등을 사용해서 제품을 생산하는 여러개의 계열공장으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나프타 분해공장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이하 유분<溜分>)값이 국제가격보다 비싸지면 이것을 원료로 사용하는 계열회사의 제품 값은 물론, 이 제품을 원료로 하는 합성섬유 등의 제품 값 또한 비싸지게 된다. 이러한 악영향의 고리는 최종 수출 제품인 의류 등 경화학 제품(輕化學 製品)의 생산 값에까지 미쳐, 결국 우리나라는 섬유제품이나 화학제품의 수출경쟁력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나프타 분해공장에서 나오는 유분 값을 국제가격으로 유지하는 것은 절대절명의 과제가 된다. 그러나 당시 국제단위는 30만 톤 규모였는데 우리가 건설키로 한 공장은 10만 톤이었으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석유화학 공장용 나프타에 대해 정부에서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해결코자 했으나 정부가 보조를 하려면 우선 국회에서 입법화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매년 정부 보조를 예산으로 확보해야 하니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동적이고 자체적인 해결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석유화학공업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국제경쟁력이 없어 부득이 정부보조금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공장에 합작하고자 하는 외국기업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차관을 주겠다는 곳도 없을 것이다.
국내기업가의 입장도 똑같다. 그래서 필자는 순전히 테크노크라트적인 방법으로 해결키로 했다. 우선, 유분 값을 국제가격으로 고정시켜 놓고 해결방법을 찾기로 했는데, 연구 끝에 다음과 같은 방안이 나왔다.
(1) 정부가 국제가격으로 유분 값을 결정, 이를 고시한다 : 이렇게 되면 나프타 분해공장에서는 적자가 나므로 아무도 공장을 건설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2)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프타 분해공장에서 주원료로 사용하는 나프타(粗揮發油)를 국제가격 이하로 공급해 준다 : 나프타라는 것은 성분상으로는 휘발유와 같다. 석유화학원료로 사용되는 휘발유에 한해 저가로 공급한다면 말썽의 소지가 있다. 그래서 휘발유라든가 나프타라는 명칭은 쓰지 않기로 하고, 「공업용 나프타」라는 새로운 유종(溜種)을 따로 설정, 그 값을 고시하기로 했다.
(3) 공업용 나프타의 값을 싸게 하면 이를 제조 · 판매하는 정유공장에서는 불평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정부는 공업용 나프타 판매로 인한 적자를 기름값 조정 시 보전(補塡)해 주기로 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나프타 분해공장에서 원료로 사용되는 공업용 나프타 값을 싸게 해주는 대가로 석유화학의 각 계열공장의 기초원료가 되는 유분(溜分)가격을 국제가격으로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업용 나프타」값을 싸게 공급하면 정유공장에서 손해가 나기 때문에 손해 보는 만큼 휘발유, 석유, 경유 가격 등을 약간 올려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방안은 석유화학공업추진위원회(위원장 상공부 장관)에서 채택됐고 정부는 유분 가격과 공업용 나프타 값을 고시했다. 이 때 고시된 유분 가격은 파운드 당 3.9 센트(?)였는데 당시 미국이 4.0 센트(?), 일본이 4.5 센트(?)였다.
유분 가격이 국제가격이 됐으니 이를 원료로 사용하는 석유화학계열 공장도 국제가격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10만 톤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면서 30만 톤 규모와 경쟁이 가능하게 됐다. 이 점이 우리나라의 석유화학공업 육성에서 근원적인 원동력이 되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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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화 현장을 직접 방문하며 점검 하시는 박정희 대통령석유화학공단은 1968년 3월 22일에 착공, 1972년 10월에 준공식이 거행됐다. (註 : 울산석유화학단지의 각 공장은 가동 첫 해부터 흑자가 났다. 다음 목표는 국제규모 미달의 석유화학공업을 어떻게 해서 국제규모인 30만 톤으로 갖고 가느냐였다). 그 후 우리나라의 석유화학은 급속히 발전해서 1997년 현재 생산능력 약 500만 톤으로 세계 제4위의 석유화학 대국이 되었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
유분(溜分)은 국제가격으로 공급되어야 석유화학이 살아 남는다.
「나프타 분해공장」이나「 BTX 공장」은 석유화학공업의 어머니격인 공장이다.「나프타 분해공장」은 "나프타"라는 석유제품을 정유공장으로부터 공급받아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등을 생산하고,「 BTX 공장」에서는 "벤젠", "사이크로헥산" 등을 생산한다.
이들 생산품을 유분(溜分)이라고 하는데 석유화학의 각 계열 공장에서는 이들 "유분"을 주원료로 해서 각종 제품을 생산하게 된다. 따라서 유분가격은 제품가격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정부는 이들 유분의 가격을 일본, 미국, 대만 가격보다 싸게 공급토록 했다. 석유화학의 원초적인 기초원료 값에 국제경쟁력을 갖게 함으로써 석유화학단지 내의 모든 공장은 물론 합성섬유, 합성수지, 합성고무 등 최종제품까지도 국제경쟁력을 갖게 된다.
당시 석유값 결정도 내가 담당하는 공업제1국 소관 업무였기 때문에 이러한 발상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대한석유공사(KOSCO)의 합작 회사인 걸프(Gulf)를 설득, 나프타 분해공장에 직접 투자시키는 것이 상책이었다.
똑같은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외국회사와 50:50 합작
석유화학은 그 성격상 나프타 분해공장이라는 모체공장과 10여 개의 계열공장으로 구성된 집단체이다. 그래서 석유화학단지(Petrochemical Complex)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나프타 분해공장이 가동이 안되면 계열공장은 원료를 공급받을 수 없으니 공장을 가동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프타 분해공장에서는 C2(에틸렌), C3(프로필렌), C4(부타디엔) 등 여러 가지 유분(溜分) -나프타 분해공장으로서는 제품- 이와 동시에 계열공장 중 한 공장이라도 가동이 안되면 나프타 분해공장으로서는 생산품 중 한 제품을 팔 수 없게 되니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석유화학단지 내에 있는 모든 공장은 삶과 고생을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어 동시에 가동을 해야 하고 풀 가동을 계속해야 한다.
당시 석유화학공업의 기술발달은 일진월보(日進月步)해서 새로운 공법이 계속 나오고 있을 때였다. 구식 공법으로는 국제적으로 경쟁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우리나라로서는 처음 착수하는 공업이라 운전경험 또한 있을리 없었다.
더욱이 석유화학공업은 거대한 자본 집약적인 장치산업으로서 만의 하나라도 실패하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을 입게 된다. 필자는 이런 입장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해결 방법은 우리나라에서 건설하고자 하는 석유화학의 각 계열공장과 똑같은 공장을 소유하고 성공적으로 가동하고 있는 외국회사와 50 : 50의 비율로 합작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외국 유명회사와 합작을 하면 차관을 얻는 데도 유리하다.
석유화학공업의 「단지화(團地化) 작전」
우선 석유화학단지를 울산(蔚山)에 있는 석유공사 근처에 정하고 정부 예산으로 토지를 구입하여 단지조성 공사에 들어갔다. 이 공단에는 전기, 공업용수, 도로, 철도, 통신 등을 모두 갖추게 된다. 소위 「단지화 작전」인데 단지가 조성이 돼야 외국 투자가들이 정부의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믿고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공장 건설자는 자기 공장만 지으면 되니 공장건설 기간이 단축되고 건설비도 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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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화 현장을 직접 방문하며 점검 하시는 박정희 대통령석유화학공단은 1968년 3월 22일에 착공, 1972년 10월에 준공식이 거행됐다. (註 : 울산석유화학단지의 각 공장은 가동 첫 해부터 흑자가 났다. 다음 목표는 국제규모 미달의 석유화학공업을 어떻게 해서 국제규모인 30만 톤으로 갖고 가느냐였다). 그 후 우리나라의 석유화학은 급속히 발전해서 1997년 현재 생산능력 약 500만 톤으로 세계 제4위의 석유화학 대국이 되었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
필자는 외국 투자가들의 흥미를 더 끌기 위해 몇 가지의 추가적인 조치를 취했다. 다음과 같다.
* 땅값은 공장가동 후 5년간 분할상환
* 공단 내에서 사용하는 전기와 공업용수는 국제가격 이하로 공급(註 : 전기료 : 3.50원/KWH(1.3 美 센트<?>), 공업용수 : 2.0원/MT(0.74 美 센트<?>), 연료 : 34원/M.M.BTU 등)
* 정부예산으로 단지 내에 비상용 발전소와 공동 수리 보수공장 건설(註 : 각 공장은 이들 공장을 따로 건설할 필요가 없어지니 그만큼 투자비를 줄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조치를 취하고 투자선 물색에 나섰다. 맨 먼저 해결해야 할 공장은 석유화학의 모체공장이 되는 나프타 분해 공장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이 공장은 걸프(Gulf)와 합작한다는 조건하에 모든 계획을 수립했다.
더욱이 걸프는 미국 내에 국제규모의 나프타 공장을 보유, 가동하고 있었다. 걸프 본사에서는 신중히 검토한 후,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왔다. 다만 「기타 계열공장이 어느 정도 결정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걸프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할 때에 우리나라 최초의 합작 회사인 울산정유공장(석유공사)에 투자했다. 그리고 진해비료공장에도 투자했다. 그리고 석유화학 공장에도 첫 번째로 투자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걸프는 우리나라의 공업화에 큰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의 조선공업 발달에도 크게 공헌했다.
朴 대통령은 자주 "한국에 투자한 미국 대기업의 존재는 미군 1개사단 주둔과 맞먹는다"라고 말했는데 걸프 등을 뜻하는 말이다. 걸프가 투자 의사를 밝힌 후 필자는 계열공장에 대한 투자유치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석유화학공업의 외국 합작선 물색
계열공장 중 가장 핵심이 되는, 즉 가장 많이 생산되는 에틸렌을 소비하는 PE(Poly ethylen) 공장과 VC 모노마(VC monomer : VC 제조용 원료) 공장의 합작 유치를 위해 먼저 다우(Dow)社로 갔다. 나로서는 초면이었는데 다우는 걸프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어 한국의 석유화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다우에서는 석유화학 부사장과 극동판매담당 부사장이 참석했는데, 이 회의는 완전한 기술자끼리의 회의였다. 다우측은 VC 모노마 생산의 원료가 되는 EDC(Ethylen dicloride)의 생산과잉으로 고민 중에 있었다(註 : EDC는 소금과 에틸렌을 원료로 해서 만드는데 다우는 암염(岩鹽) 지대에 공장을 건설했기 때문에 소금은 무진장 있었고 값도 쌌다. 그래서 거대한 EDC 공장을 건설했던 것이다).
다우 社는 이 과잉 생산되는 EDC를 한국에서 수입하고 울산석유화학단지에서 생산되는 에틸렌을 써서 가공, VC 모노마를 만들어 준다면 다우가 동남아에 팔겠다는 안을 냈다. PE나 VC 모노마의 판매에는 자신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우리나라로서는 PE나 VC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고 따라서 에틸렌의 소비도 커지니 이익이 된다. 결국 기술자끼리의 회의에서 쌍방이 좋은 해결책이 나와 다우와는 합작을 하게 됐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한국의 석유화학 계획을 약간 수정했다. EDC 생산공장건설을 중지하는 대신 EDC를 수입키로 하고, 그 대신 VC 모노마 공장과 PE공장의 규모를 늘리기로 했다.
한편 스켈리(Skelly Oil)社는 영남화학에 투자한 회사이기 때문에 이미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남화학은 내가 과장 때부터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친분이 있는 간부가 많았다. 그래서 아크릴 섬유의 원료를 생산하는 AN(Acrylonitrile) 공장에 합작키로 했다.
시설비가 많이 드는 중추적인 공장들의 합작선이 결정되니 나머지 공장들도 합작선을 찾게 됐는데 주로 일본과 독일 회사였다. 이렇게 합작선을 얻을 수 있게 된 이유는, 한국의 석유화학건설 계획은 세계규모 미달의 10만 톤 공장 이지만 정부가 나프타 유분 가격을 국제가격으로 공급해 주겠다고 정부가 보증하고 단지화 작전 등 테크노크라트가 엔지니어링적 작업을 치밀하게 한 결과, 투자회사들이 공장건설 후 제품을 국제가격으로 생산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외국 합작 회사들이 한국 정부의 시책을 믿었다는 점이었다. 신뢰 받는 강력한 정부가 힘의 근원이었다.
투자유치의 마지막 코스로 걸프 본사에 들렀다. 다우와 스켈리에 대한 교섭 성과를 통고하니 걸프측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의 석유화학 제품의 수요가 증가할 것에 대비해서 5만 톤을 늘려서 15만 톤 용량으로 설계하는데 걸프와 합의했다. 초기에는 10만 톤으로 가동하나 수요 증가시 일부 장치만 추가함으로써 15만 톤으로 가동하겠다는 뜻이다.
그날 밤에 있었던 환영파티 도중 서울 상공부에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김정렴 상공부 장관이었는데 "기획관리실장으로 진급 상신을 하겠는데 석유화학 건설사업에 대해서는 (필자가) 계속 책임진다는 조건을 붙여 朴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귀국 후 1967년 4월 24일 기획관리실장으로 발령이 났다. 이렇게 해서 테크노크라트인 나는 기회관리실장의 소관 업무인 국회대책, 국영기업체 관리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기획관리실의 본연의 업무가 아닌― 석유화학공업 건설에 대해서도 계속 일을 추진해 나갔다.
석유화학공단은 1968년 3월 22일에 착공, 1972년 10월에 준공식이 거행됐다. 이 때 朴 대통령은 나에게 그날 표창 받은 인사 중 최고훈장(黃條勤政勳章)을 목에 걸어주었다(註 : 울산석유화학단지의 각 공장은 가동 첫 해부터 흑자가 났다. 다음 목표는 국제규모 미달의 석유화학공업을 어떻게 해서 국제규모인 30만 톤으로 갖고 가느냐였다). 그 후 우리나라의 석유화학은 급속히 발전해서 1997년 현재 생산능력 약 500만 톤으로 세계 제4위의 석유화학 대국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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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려운 내용이네요.
중요한건 저런 과정을 거치고 울나라가 성장했다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