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사(聖師)인 사명대사의 탄생지는 경남 밀양 삼강동이고, 입적(入寂)한 곳은 합천 해인사 홍제암(弘濟菴)이다. 해인사에는 사명대사의 입적에 대하여 속세에 대한 대외비(對外秘)로 전해오는 사명대사의 암살 설에 대한 전설이 있다.
토요토미 헤데요시 일본 관백이 오랜 고질병인 영주간의 전쟁으로 백성이 피폐 해질 대로 피폐한 국민에게 천하태평(天下泰平)의 선정을 베플지 않고,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리자”는 자신의 명을 재촉하는 책략으로 심복명장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좌우 선봉부대장으로 하여 조선을 침략하여 조산의 관병과 백성을 조총과 창, 칼로 집단 학살을 할 때, 당시 왕인 선조(宣祖)는 제살기 위해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 북한 땅의 의주(義州)를 지나 중국 명나라 땅으로 도피하려고 했었다.
그 무렵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대사를 불러 “백성을 왜군의 총칼에 도륙 당하듯 하고 있다. 백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맞서 싸우라!“는 특명을 내렸고, 서산대사는 조선팔도의 승려들에게 의승병으로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뿌렸다. 호국(護國)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의승병은 서산대사와 제자 사명대사의 기의(起義)에서 전국 의승병들이 궐기하여 전선에서 죽어갔다.
사명대사의 속성은 풍천임씨(豊川任氏)요, 이름은 유정(惟政)이며, 자(字)는 이환(離幻)이고, 호(號)는 종봉(鍾峯)과 송운(松雲) 또는 사명(四溟)이라 하고, 시호(諡號)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한다.
사명대사는 이조 중종 39년(서기1544) 갑진(甲辰) 10월 17일에 밀양의 삼강동에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명대사의 선조는 풍천망족(豊川望族)으로서 증조할아버지 효곤(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고, 할아버지 종원(宗元)은 괴과(魁科)에 급제하여 강계부사를 지냈다. 아버지는 교생(校生) 수성(守成)이다. 따라서 집안 가계는 전통적인 유학자요, 학문하는 족보있는 가계의 후손이라 하겠다.
사명대사는 무슨 인연으로 승려가 되었을까? 사명대사가 갑오년 9월에 선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신은 풍천임씨의 후예로서 조부 때 영남 밀양에 이적(移籍)하여 밀양부민이 되어 살았는데 불행하게도 신의 나이 15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연달아 16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거목무친(擧目無親)이요, -중략- 부평초 같은 신세가 되어 산림에 들어가서 생애를 운조(雲鳥)와 함께 하였습니다.”라는 것을 보면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신세가 되어 불문에 의지한 것 같다. 사명대사는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에 소년시절 입산하여 신묵화상(信默和尙)의 제자가 되어 촌음을 아끼어 불경의 학문을 정진하였다. 당시 불교계는 조정의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으로 박해받아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조정의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 때문에 당시 불교계는 고통속에 신음하고 있을 때, 지옥에서 지장보살을 만나듯 좋은 인연이 나타났다. 불심 깊은 문정왕후가 어린 아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되었고, 문정왕후는 자신이 신앙하는 불교를 중흥시키고자 승려 인재를 널리 구하였다.
문정황후는 첫째, 폐지된 승과(僧科)와 도첩을 부활시켰다. 당시 봉은사에서 행한 선과(禪科) 고시에는 서산대사가 급제하여 대선(大選)이 되었고, 이로부터 10년후 명종 16년, 사명대사는 불과 18세의 나이로 선과에 장원급제를 하니 불가의 칭송은 물론이요, 유학계에서도 경탄해 마지 않았다. 사명대사는 어사화(御史花)를 관에 꼽고 도성을 돌지는 않았지만, 조정과 도성에는 대화제가 되었고, 명망있는 유생들은 다투워 사명대사를 만나 대화하고, 시문을 주고 받기를 원하였다.
사명대사의 문제자 해안(海眼)이 사명대사가 열반에 든지 31년째 되는 인조(仁祖)18년에 지은 사명대사 행적(行蹟)에 의하면, “사명대사가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에 들어가 병을 치료하고 있을 때, 임금은 여러번 약을 내리셨다. 경술년 가을에 임금이 염려하시고 서울에서 치료하게 하려고 방백(方伯)으로 도우라고 명령하였다.”고 하였다.
그 해 8월 26일에 사명대사는 모든 승려들을 모아놓고 유언 하기를 “네 가지 요소(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진 이 육신은 이제 진(眞)으로 돌아 가려 한다. 무엇하여 번거로이 오고가고 하면서 이 허깨비 몸을 괴롭히겠는가. 나는 지금 죽음에 들어 자연의 큰 조화에 순응하려 한다.”하면서 시자에게 몸을 씻게 하고 간 뒤에 조용히 앉아 열반에 들었다. 사명대사의 세속나이는 67세요, 법납(法臘)은 53년 3개월이다.
자, 사명대사에 관한 숫한 이야기는 줄이고, 본론으로 들어가 사명대사의 암살 설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끝난 것은 전쟁을 일으킨 히데요시가 우연 득병하여 변석에 신음하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새로이 정권을 잡은 도꾸가와는 선조에게 강화조약을 맺자고 사신을 보내라고 청하였지만, 겁쟁이 대신들은 두려워 피하기 급급하였다. 마침내 사명대사가 선택되어 특명사신으로 부산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큰 배에 수행원들과 승선하게 되었다. 사명대사는 승선하기 전 살펴보니 전송하는 벼슬아치 가운데 동래부사가 보이지 않았다.
사명대사가 수하에게 동래부사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하문하니 “중한테 내가 왜 예를 갖춰 전송하나?” 하고는 병을 핑계로 빠져 실상은 기생들과 가무주연(歌舞酒宴)을 즐기고 있다는 보고 였다.
사명대사는 일순 분개 했으나, 참고 일본에 건너가 도꾸가와와 강화조약을 맺고 남치해간 포로 3,400여 명을 데리고 고국에 귀환을 하는 고금역사에 없는 외교적 성공을 거두고 부산포로 돌아왔다. 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환영식에 또 동래부사가 없었다. 사명대사는 또 하문하였다. 수하의 보고인즉 “흥, 왜 내가 중한테 예를 갖추어야 하나?”고 기생들과 가무주연(歌舞酒宴)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 사명대사는 “저러한 수령이 있기에 임진왜란 초기에 부산포에서 패하고, 백성이 도륙당한 것이다.” 소리쳐 질타하고, 왕의 특명대신의 권한으로 부사를 잡아와 추상같이 꾸짖고 먼저 목을 베고 뒤에 보고하는 즉 선참후계(先斬後啓)식으로 참수하고 말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사명대사는 추상같은 법을 집행했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인과의 씨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사명대사는 일본국과의 성공적인 외교 성과에 당시 조야(朝野)는 사명대사를 영웅대접하였다. 그 때, 서산대사의 밀봉(密封)의 서한이 전해졌다. 서산대사는 제자 사명에게 “장안에서 영웅대우에 자족하지 말고 어서 산으로 가라”는 공수신퇴(功遂身退)의 글이었다. 사명대사는 스승인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봉대하여 곧바로 해인사 홍제암에 은거한 것이다. 얼마 후 사명대사는 우연 득병으로 신음하는 신세가 되었다.
왕은 약첩과 조속 쾌유를 바라는 서한을 보냈다. 이 무렵, 어느 날 젊은 의원이 찾아와 자신이 사명대사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무료로 약첩과 침으로 시술하게 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의원은 사명대사와 조용히 단 둘이 되자 의원은 표변하여 눈감고 누워있는 사명대사에게 침이 아닌 비수로 사명대사의 급소를 찔렀다. 사명대사가 눈을 뜨고 이유를 물은 즉 의원은 “저는 아들로서 부친을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는 겁니다.” 놀랍게도 그 의원은 과거 부산포에서 선참후계(先斬後啓)한 부사의 아들이었다. 사명대사는 인과응보라는 것을 깨닫고 소리 쳐 제자들을 부르지 않고 의원에게 신속히 달아날 것을 명했다 한다. 이 비사(秘史)는 진실 여부는 해인사의 노승과 노승에게 전해지는 또다른 인과응보에 대한 전설이니 너무 애통해 할 것은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사명대사에 관한 기록은 사명대사가 입적한 지 3년째인 광해군 4년에 간행한 사명집(四溟集)과 홍길동의 저자 허균(許筠)이 지은 석장비문(石藏碑文)과 사명대사가 입적한 지 32년만에 제자 해안혜안(海眼)이 지은 ‘사명대사의 행적’과 130년 후인 영조(英祖)14년에 간행한 ‘분충서난록’이 있다.
내가 분석한 바는 사명대사는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조화를 자유자재로 하는 신통력이 있는 승대장(僧大將)으로 묘사되어 숭배 되어오고 있는 데 이것은 중생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그는 열심히 불경과 제자백가의 글을 독파하고 선수행을 하고, 호국과 백성을 구하려는 진짜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상가요, 대문장가(大文章家)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문집을 근거로 하는 나의 분석이다.
독자 여러분이 홍제암을 찾게 되면 호국의 성사인 사명대사의 비석이 네 조각으로 조각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제시대 못난 합천경찰서 일인서장이 조선 민족의 호국사상을 촉구하는 사명대사의 비석을 네 조각으로 만들어 풀숲에 내던져 버렸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뜻있는 불자가 다시 조각난 비석을 찾아 땜질을 해서 맞추어 세웠다고 한다. 더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홍제암에서 입적한 사명대사에 대한 다례제(茶禮齊)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제암이 아닌 해인사 산내 암자 모든 승려들이 1년에 한번씩 사명대사의 대한 다례제(茶禮齊)를 지내면서 호국사상을 다져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사명대사가 태어난 밀양에는 조정에서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호국사상을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수년 전 표충사 전 주지 모승(某僧)은 비밀리에 사명대사의 부모가 있는 모역(墓域)까지 표충사의 땅을 50억 가까운 돈을 받고 팔아 먹고 외국으로 도주하면서 도박을 하여 돈을 탕진하고 지금은 감옥에 있다고 한다. 이 자가 감옥에서 도술(盜術)을 더욱 배워 돌아와 돈을 들고 총무원장에 입후보하면 어찌 될 것인가? 두둑한 돈봉투만 주면 지옥의 악마에게라도 선거의 표를 줄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 있다는 주장은 난무한지 오래이다. 속인은 돈선거를 하지 않고 만약 하면 의법 조치 되는 한국 사회인데, 속인 뺨치는 선거를 고수하는 자들이 무슨 세속을 향해 정의구현을 외치고 요구할 것인가.
끝으로, 작금에 대부분의 한국 승려들은 극빈속에 호국불교 사상을 실천하고 있지만 일부 승려는 고려 말의 부패하고 타락한 불교 보다도 더 심하게 타락했다고 나는 주장한다. 근거로 부처님을 팔아 돈벌이에 혈안이 된 승려들과 친북, 종북에 광분하는 붉은 까마귀같은 자들이 도처에서 한국불교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깨어난 사부대중은 의승병이 봉기하듯 호국(護國), 호불교(護佛敎)는 물론, 국민에 헌신봉사하는 불교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나는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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