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이 과연 주인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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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 과연 주인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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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달에 '청소년위원회'에 부친다

 
   
  ▲ 청소년특별위원회 발족식에서 (4월30일 공동위원장 최영희(여성) 김성재(남성)
ⓒ 박선협
 
 

29일 청소년특별위원회가 닻을 올렸다. 지난27일의 "위원회(위원장 최영희)의 임명에 따른 제1차 후속조처다. 이날 출범식에서는 공동위원장을 맡은 김성재(KYSC 이사장)씨가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공이 아니라 오늘의 주인공이다"라는 선언적인 천명이 그것이다. 김 위원장은 그 이유의 배경에 관해 "유럽제국이 이미 15세전후의 청소년을 사회구성원으로 설정함으로서 선진국의 대열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나아가 김성재씨는 "한국에 있어서의 청소년의 개념이 산업사회의 노동인력 확보라는 차원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지금세대는 디지털이라는 문화혁명적 발달로 인해 청소년이 오히려 성인에게 배움을 주는 역기능의 시대에 들어섰음"을 천명했다.

따라서 김위원장은 "앞으로 이 기구의 주인공도 청소년이 되어야 하며 추진위(단)는 다만 '조력자'라는 위치에서 청소년의 활동을 살펴준다"는데 의미가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는 청소년특별위의 주축세력이 내놓은 이러한 세대규정의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에 대해여 몇가지 경계치 않을 수 없는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어째서 청소년이 이 시대의 주인공인가? 라는 원론적 의문이다. "주인공"이란 수사적 세대개념은 무엇보다 "타력의존"이 아니라 "자력갱생"을 1차적 존재가치로 드는 사회적 용어에 다름아니다.

청소년특위가 규정하는 9세에서 24세까지의 어린이 또는 청소년이 과연 시간과 공간이란 역사, 철학,문화, 과학적 단위세대에서 주인공으로서 행세하고 그것을 모든 계층이 수용할 수 있느냐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깔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 기본법을 만든 장본인들은 청소년이 아니라 단순히 대통령의 선거공약실천이라는 사명감에서 비롯한 행정,입법기관을 형성하는 중추적 세대인 여론계층이라는 점에서도 출발당초부터 엇박자가 형성됐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회다.

김위원장의 주장대로라면, 청소년이 국가기간을 형성해야 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예술, 과학 등 제반분야의 주인공노릇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하고 국회의원은 물론 사법기관의 중추적 요원으로 행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디지털기능만을 강조한 나머지 숲과 나무를 구분하지 못하는 발상의 전환이라면 시작부터 결과적 성공 물 을 보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철리에 다름아님을 모르지 않는다.

이미 역사적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5.16군사혁명시대를 살아 온 우리는 그 당시에 바로 이런 발상이 등장, 청소년을 사회의 한 축으로 보되, 발전과 향상을 위한 대상으로 규정하면서, "배움(Learning)"에 바탕을 두고 어떻게 하면 "교육(Education)"마인드를 탈피, 공유하느냐는데 중심을 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사회정화대책회의"라는 기구의 탄생이 그것을 방증하는 자료다. 새삼 "청소년이 세대의 주인공"이라는 규정은 그리하여 그 때를 지나 되풀이 되는 한갖 선전자료 내지는, 구호에 그칠 우려를 안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있는 것이다.

이미, 특별위와 추진위(단)를 구성한 대다수의 인원들이 마치 청소년에게 시혜를 주려는 인상을 보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러한 새대착오적 발상의 한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청소년들에게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참여자임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시스템의 보완이 급선무다. 법적장치에서 괴리를 두고 제아무리 선언적 규정을 강구한다하더라도 다만 연목구어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장 빠른 방안은 청소년 그들이 위원장이 되고 위원(단)이 되어야 한다. 현실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지금 출범한 기구의 누가 그것을 실행시킬 수 있을 것인가? 사회적 관행을 드려다 보면 청소년들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세대다. 이른바 교육과 배움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세대지 주인공의 세대는 아닌 것이다.이것은 동서고금이 한결같다.

우리가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임을 쳐드는 소이다.

청소년 특위의 출범은 오히려 기득권세력이자 계층의 자기보신과 자리확보의 과시를 위한 책동으로서 청소년을 특별대우 한다는 이름을 빌어 시스템을 강구한다는 비판의 도마를 피해 갈 수가 없을 지도 모른다. 이미 그런 유유상종의 조직이 형성된 배경에 그런 그림자가 깔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을 우리는 29일의 현장에서 목격한 바 있다.

새 조직을 이끌고 실현할 인재를 청소년층이 공감하는 천하의 인재로 뽑았다는 근거를 우리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가 없음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처지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 조직이 그 조직인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의 한계점에 지금의 인물군이 운집해 있는 것은 아닌가?

대통령을 만나고 국무총리를 면담, 청소년의 정책적 발상을 구현코자 한다하더라도 그것은 이벤트로서는 가능할 수 있어도 직시,직면,직통의 현실적 대안시스템으로서 작동하기는 불가능 하다는 것이 예를 살펴 온 우리의 관점이다.

우리가 1969년 12월4일 "성년의 날"을 제창할 때만 해도, 청소년들에게 성인으로서의 금도를 일깨우는 의식을 통해 사회구성원이자 주인공으로서 자리매김하자는데 그 뜻을 부여한바 있었던 것도 그에서 유래한다. 그것이 범정부 차원에서 "국가기념일"이 되고 33회를 맞이 하는 오늘에 이르기 까지 이어오고 있으나 청소년이 주인공이라는 것은 수사적 의미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배움과 교육이 혼용된 청소년기의 성장발전을 하나의 스타트라인화함으로서, 진입하고 맞이하는 성숙된 모습의 일대장전임을 기록코자 함에 그 의미가 있었다. 성년이전의 청소년은 어떻든 배움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사회규범과 철리에 입각한 발상이었다.

지금, 청소년특별위원회가 청소년들에게 사회주인공임을 선언하고 이를 사회적 공감대로서 영속시키려 든다면, 가장먼저 그들의 기득권적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 선결과제다. 그리하여 그 자리를 청소년으로 채워야 한다. 그것이 마땅한 일이라 하더라도 과연 가능한 일인가 자문해 보면 안다. 그렇게 되고자 하는 청소년이 과연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을 통한 사회적 규범이나 시스템은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무엇인가 베풀어 주려는 행동이 어른들의 사치스런 감각적 가치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정작 청소년들에겐 강 건너 불구경의 대상에 다름아닐 수 있음을 우리는 경계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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