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예요. 민소영.”
“웬일야? 이 밤중에 소영이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태진은 쓰던 원고를 멈추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두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그녀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온 것도 처음이지만, 이 밤중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주무셨어요?”
“아냐, 원고를 쓰고 있었어.”
“다행이네요. 주무시면 어쩌나 했는데…….”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태진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소영이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 내일 오후 5시에 만나요. 탑호텔 커피숍에서요.”
“왜? 무슨 일 있어?”
뭔가 이상한 예감이 뇌리를 빠르게 스쳤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요. 그럼 나오시는 걸로 알고 전화 끊을게요.”
“자, 잠깐만. 무슨 일야? 궁금하잖아.”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끊어요.”
“…?”
왜 갑자기 소영이 만나자는지 알 수 없었다. 만나서 직접 할 말이 있다는 데는 더이상 발뺌을 할 수도 없었다.
‘무슨 일일까?’
태진은 별의별 추측을 다 해 봤지만 짚이는 게 없었다. 방송국이나 다른 곳에서 우연히 만나도 깍듯이 예의를 갖추던 그녀였다. 대부분 이름깨나 알려진 탤런트들은 올챙이 시절을 잊기가 보통이었다. 자신을 음으로 양으로 공들여 키워준 주변 사람들의 은혜를 망각한 채, 저 혼자 잘나서 그렇게 된 양 오만방자했다. 그런 덜떨어진 애들에 비하면, 소영이는 분명히 달랐다. 지금의 자신이 있게끔 다리를 놓아준 태진을 볼 때마다 겸손했고, 커피 한 잔이라도 정성껏 대접하려고 했다. 그때마다 태진이 의식적으로 피해왔지만.
소영은 모자와 짙은 밤색 선글라스를 쓰고 구석 쪽에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는 연예부 기자들의 뉴스거리였다. 사생활조차도 보이지 않는 눈들에 의해 감시 당하고 있었다.
태진은 그녀 앞에 우뚝 섰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소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들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캐쥬얼 차림이었다. 태진이 앉기를 기다려 따라 앉았다. 그녀에게선 늘 맡아지던 향수 냄새, 장미 향기가 은은히 풍겨왔다.
“자리를 옮길까요?”
“불편해?”
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 가지고 왔어?”
“아뇨. 선생님이 가지고 오실 거 같아서 얻어 타려고 택시 타고 왔어요.”
“안 바뻐?”
“오늘은 선생님 만나려고 이 시간 이후 스케줄은 다 비워놨어요.”
“눈이 오는데 교외로 나갈까? 드라이브도 할 겸.”
“말 밥이죠.”
말 밥?
태진은 소영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소영은 그런 태진의 모습을 보며 킥킥거렸다. 태진은 한참 후에야 ‘말밥’이란 말이, 한 때 신세대들이 쓰는 ‘당근이죠’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란 걸 알아차리고 함께 웃고 말았다.
“그럼 커피나 한 잔 마시고 일어서지.”
태진은 헤즐넛을, 소영은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두 사람은 커피를 다 마시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이따금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소영은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태진이 그녀와 이렇게 단 둘이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어쩌다 자리를 함께 한 때는 늘 방송국 사람들과 어울린 자리였다. 그때마다 태진은 차마 소영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곁눈질로 훔쳐보곤 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둘이서만 있자 몹시 어색했다.
태진은 차 시동을 걸었다.
“어디 가고 싶어?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이 있으면 말해 봐. 잘 아는 곳도 좋고.”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요. 전 오늘 끝까지 따라갈 거니까요. 지옥 끝이라고 해도.”
“이거, 은근히 걱정 반, 기대 반 되는데.”
태진은 가속페달을 밟으며 소리내어 웃었다. 소영도 환한 표정으로 따라 웃었다.
눈이 어느 새 함박눈으로 변해있었다. 도시 전체가 흰색 물감으로 덧칠하는 캔버스처럼 하얗게 탈색되어가고 있었다. 소영이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태진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시간 이후 스케줄을 완전하게 비워놨다는 것은 이미 며칠 전부터 오늘을 위해 스케줄을 조정해왔다는 얘기가 됐다.
차 안은 소영에게서 풍기는 화장품과 향수 냄새로 젖어갔다. 여자 특유의 냄새였다. 얼마만에 맡아보는 여자의 냄새인지 몰랐다. 결코 금욕주의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남자 이상으로 금욕주의자가 될 수밖에는 없었던 지난 시간들. 여자를 안아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희미했다.
몇 달 동안 유일하게 접한 여자라곤 진희밖에 없었다. 마주 앉아 식사도 하고, 차와 술도 마시고, 때론 피부의 접촉까지도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진희는 이성의 존재라기보다는 환자와 치료사의 관계라는 측면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했다. 때론 진희를 여자로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감정일 뿐이었다.
이제 차는 복잡한 도심을 벗어났다.
카세트 테이프에서는 비발디의 ‘사계(四季)’ 중 ‘겨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진은 장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여름에 밤낚시하러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기산저수지 위쪽에 있는, '‘들꽃 피는 언덕’이란 분위기 있는 카페가 목적지였다. 장작불을 지핀 페치카 앞에서 눈 덮인 산과 저수지를 보는 것도 운치가 있을 듯했다.
“…… 선생님은 절 어떻게 생각하세요?”
“?”
태진은 소영이 말하는 '‘어떻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감정도 없는 목석인가요, 아니면 성인군잔가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태진은 그때까지도 그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영은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평소에 그녀가 태진을 대하던 태도로 볼 때,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한 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자신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태진이 아는 소영은 결코 이런 짓을 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행동에는 뭔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게 흐르고 있는 무거운 분위기를 깨버리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했다.
소영이 태진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선생님 눈에는 제가 여자로 보이지 않으세요?”
“소영아!”
태진은 몹시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늘 그녀를 생각하고 있던 내밀한 감정을 그만 들켜버린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말한 소영의 얼굴에서도 순간적이지만 곤욕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차마 하기 힘든 말을 가까스로 꺼내고 나서,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난 표정 같기도 했다.
“왜 제 물음에 대답이 없으시죠? 선생님에겐 저란 존재가,
질문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가볍게 보였나요?”
“그게 무슨 말야!”
“지금 저를 대하는 선생님 태도가 그렇잖아요.”
소영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어렸다.
“왜 그래! 나하고 말장난이나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태진은 평소에 그녀를 생각하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화난 듯이 말했다.
“이태진 선생님!”
갑작스런 그녀의 고함에 놀란 태진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꽝꽝 얼어붙은 도로를 달리던 차가 뒤뚱거리며 한참을 쭉 미끄러졌다. 눈 때문에 빠른 속도로 달리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삐끗 잘못했으면 까마득한 언덕 아래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차를 길 한 쪽에 비껴 세우고, 담배를 뽑아 물었다. 핸들을 잡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 상태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소영이었다.
“왜 이러세요, 정말. 절 짱구로 아시는 거예요?”
태진을 노려보는 소영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왈칵 쏟아져 내릴 듯이 눈물이 괴어있었다. 태진은 그런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차창 밖으로 돌렸다. 눈발이 거세지고 있었다.
“…… 저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여자예요. 집념도 강해서, 뭐든지 제가 하고 싶다고 마음 먹은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이기도 하고요. 선생님도 아시죠? 탤런트 시험을 볼 때 합격하기 위해서 제가 어떻게 했는지를…… 선생님 작품인 특집극에 출연해서는, 연예계에 살아남기 위해서, 선생님이 저를 추천해 주신 것에 대한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내 손으로 껍질을 벗긴 살아있는 독사의 머리통도 씹어 먹는 것을 직접 보았잖아요.”
“…….”
새 담배를 꺼내는 소영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눈발 속에 갖힌 차는 금세 차창에 눈이 쌓여 작고 아늑한 밀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비달디의 사계는 다시 돌아 어느 새 봄의 끝 부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왜 저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시는 거죠?”
“기회라니?”
태진은 소영이를 보며 되물었다.
“정말 왜 이러세요. 남자답지 못하게…….”
소영은 태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태진은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들킬 것만 같아 불안했다. 소영이가 오래 전부터 만나서 술 한 잔 대접하고 싶다고 할 때마다 요령껏 피해왔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백 번이라도, 천 번이라도 그녀의 초대에 응하고 싶었다. 분위기 있는 곳에서 이마를 맞대고, 그녀의 한없이 시리고 맑은 호수 같은 눈을 응시하며, 자신의 온몸을 풍덩 던져버리고 싶었다. 아니, 온통 그녀의 사진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정릉집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뜨겁게 불꽃 같은 사랑도 하고 싶었다.
“…… 전 알고 있어요. 선생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소영아!”
태진은 까마득히 높은 절벽 끝에 선 것처럼 눈 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평소에 저를 보는 선생님의 눈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바라보는 음흉한 눈빛이 아닌 순수함이 배어 있는 눈빛임을 난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그, 그건…….”
태진이 더 이상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소영이 손가락을 그의 입술에 댔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 그녀와의 첫 신체적인 접촉이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얼마나 갈망한 순간이었던가. 얼마나 숱한 밤들을 그녀만을 생각하며 하얗게 지새웠던가.
“저도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
태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분명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 피하지 말고 제 눈을 똑바로 보세요.”
태진은 뛰는 가슴도 가슴이지만, 소영이를 똑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서요.”
태진도 소영의 사진을 보며 얼마나 많이 속삭여 온 '‘사랑해!’라는 한 마디였던가. 소영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토록 그리던 소영의 향기로운 숨결조차 느껴지는 거리였다. 반대편 차도를 지나가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순간 환하게 드러난 소영의 속눈썹은 이슬을 머금은 꽃잎처럼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이 세상의 어떤 귀하고 값진 보석보다 아름답고 빛나는 눈이었다.
태진은 이 순간, 더 이상 숨기지 말고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영아. 난, 난 말야…….”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영의 입술이 빠르게 그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태진은 아찔했다. 심장의 박동이 그대로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무너지듯 가슴에 안겨오는 소영을 안지도, 밀어내지도 못했다. 소영의 입술은 집요하고, 뜨겁고 격렬했다. 그녀의 몸무게에 밀린 태진은 시트에 반쯤 누워진 상태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버둥대고 있었다.
“사랑해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소영은 뜨겁게 속삭였다.
태진은 순간순간 정신이 아득했다. 소영의 불 같은 혀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의 키스가 얼마나 격렬한지 이와 이가 부딪쳤다. 불이 붙은 소영의 몸짓은 몸부림에 가까웠다. 얼마나 안고 싶고, 허상이 아닌 뜨거운 육체와 육체로 부딪치고 싶은 여자였던가. 그녀를 생각하며, 사진을 보며, 자위행위 끝에 오는 허망함 때문에 또 얼마나 자괴감에 빠졌었던가. 그런 그녀를 마음만 먹으면 쓰러뜨릴 수 있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자, 잠깐만…… 나 담배 한 대 피우고…….”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던 소영이 멈칫했다.
태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차 창을 열었다. 천지간에 수천, 수만 마리의 흰나비 같은 함박눈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찬바람 때문일까. 무섭게 치밀어오르던 욕정의 열기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저도 하나 주세요.”
소영은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고 담배연기를 깊고 길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담배 피우는 손만 움직일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비발디의 사계는 어느 새 여름에 가있었다. 한바탕 열기가 지나간 차 안은 적막했다. 태진은 고개를 돌려 소영을 보았다. 아, 놀랍게도 그녀의 눈에서는 방울방울 눈물이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소영아!”
“…… 선생님은 역시 바보예요.”
“…….”
“아니, 어쩌면 그만큼 절 진정으로 아껴주고 사랑하는지도 모르죠.”
소영은 저 혼자 말하고 저 혼자 고개를 태엽이 감긴 목마처럼 끄덕이고 있었다.
“덩굴째 굴러온 호박도 줍지 못하는 바보!”
소영은 그렇게 말하며, 눈물이 흐른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태진은 소영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아무리 보아도 정말 매혹적인 여자였다. 어느 한 군데 흠 잡을 곳이 없는…… 소영의 어깨를 끌어안고,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탁여 주었다. 그리고 소영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입술을 천천히 포개었다. 처음처럼 격렬하진 않았지만 길고 깊은 키스였다.
“절 끝까지 지켜봐 주실 거죠?”
긴 키스 뒤, 소영의 물음에 태진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싫어요. 직접 대답해 보세요.”
“…… 알았어.”
태진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 몹시 외로워요.”
외로워?
소영의 입에서 튀어나온 ‘외로워요’라는 말이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생경하게 귀에 걸렸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톱 스타였다.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넘쳤다. 사람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 했고, 따라서 일반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또한 그만큼 컸다. 전국은 지금 민소영 신드룸이 일고 있었다. 쓰고 다니는 모자, 옷, 액세서리, 화장품, 구두 하나도, 그것을 만드는 회사의 매출액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있는 광고판이었다. 기업들은 그녀에게 자기 회사의 옷, 구두, 액세서리, 화장품 심지어는 평생 마실 음료수를 제공하겠다고 북새통을 이룰 정도였다. 태진이 볼 때, 그녀는 한가롭게 외로움을 느낄 틈조차 없을 것 같았다.
“전 사생활이 없어요.”
그 말은 이해가 됐다.
“마음 터놓고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요.”
그 말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연예계라는 곳이 원래가 라이벌인 상대방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인 곳이었다. 가장 친한 동료도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라이벌이나 다름없었다. 기세 좋게 잘 나가다가도 단 한 번의 실수로 곧바로 나락으로 추락하는 세계. 인기를 먹고 사는 그들로서는 사소한 것조차도 풍선처럼 부풀려 일반에게 공개되기 때문이었다. 있지도 않은 스캔들도 사실처럼 난무하는 곳이어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사람이 그리워요. 제 울타리가 되어 줄 만한 사랑을 만나고 싶었어요. 껍데기가 아닌 진짜 사랑을…….”
태진은 소영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에게 구애의 몸짓을 하며 다가서는 사람들은 모두가 껍데기들이에요. 저의 인기나 돈, 또는 육체를 탐내는 치들뿐이죠. 진심이 보이지 않아요. 전 그걸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믿기지 않겠지만, 전…… 아직 처녀예요.”
처녀라고?
태진에겐 정말 믿어지지 않는 뜻밖의 말이었다. 스믈세살이란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처녀라니. 그것도 끼가 있고, 뜨거운 피가 솟구치는 열정을 가진 아가씨가 아직도 처녀를 간직하고 있다니. 그런데 왜 그녀는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일까. 자신의 순결을 미끼로 유혹하자는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성격상 결코 그런 잔머리를 굴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위치 정도에 있으면, 자신 정도의 사람을 자기 남자로 만들려면 줄을 세우고도 남을 것이다. 그녀 주변에서 맴도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자신은 특별한 구석이 없는 평범 이하의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태진은 감정을 담지 않고 나무 토막처럼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들어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굳은 말투였다.
“…… 처녀가 부담스러워요. 선생님에겐 제 말이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연기를 하다 보면 벽에 부딪칠 때가, 남자도 모르면서 애정 연기를 하는 저 자신이 우스워 보일 때가 많았어요. 포르노 비디오나 다른 영화에서 본 것처럼 흉내를 내긴 하지만…… 그래요, 그야말로 흉내에 불과한 거죠. 그렇다고 23년 동안 지켜온 처녀를 함부로…….”
“그러니까 소영이의 첫남자로 날 선택했다는 얘긴가?”
태진은 군더더기는 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뒤엉켰다.
“소영인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솔직히 몰라요. 남들이 아는 정도 밖에는…… 그러나 저는 제 느낌을 믿어요. 지금껏 많지 않은 날들을 살아왔지만, 전 제 느낌대로, 제 마음이 정하는 길을 따라 살아왔어요. 그리고 일단 제가 선택한 길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어요. 전 선생님을 유심히 지켜봤어요. 작은 몸 짓, 말투 하나까지도요. 그러면서 전 확신을 얻었어요. 선생님은 분명히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성공한 민소영이가 아닌 저라는 인간 자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간의 믿음이란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많아.”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맞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겠죠.”
“난 소영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못 돼. 그럴 만한 자격도 없고.”
그렇게 말하는 태진의 마음은 아팠다.
“저더러 말장난한다고 혼내더니…… 선생님도 들어봤죠?
‘제 눈에 안경’이란 말?”
“…….”
“내 눈에 안경이 바로 선생님이에요.”
“나에겐 선택의 자격조차 없다는 말 같군.”
태진은 짐짓 화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그럼 ‘제 눈에 안경’이란 말에 엄청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그건 선생님 마음대로 생각할 선택의 자유를 드릴게요.”
그 말끝에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고 말았다.
태진은 오늘 같은 순간을 얼마나 갈망해 왔던가. 행복했다. 이제 이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없었다. 소영이만 곁에 있어준다면, 그 이상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출발하지. 언제까지 이 눈구덩이 속에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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