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진 늘 그러셨다. 방금 전 가스불에서 끓던 찌개를 퍼다가 밥상 위에 놓아드려도 조금만 식으면 다시 데워드셔야 했다. 그런 아버지의 까다로운 식성을 맞추시느라 엄마는 늘 분주하셨다.
그 덕분에 우리는 식사 때마다 항상 새로 올라오는 찌개와 반찬을 먹을 수 있었다. 딸만 둘이라고 외할머니께서 애지중지 기르신 엄마는 그 옛날 사진 속에서도 예쁜 정장의 모습으로 웃고 계신다. 그렇게 곱게 자라신 엄마가 결혼을 하고는 남편 뜻 받들며 사느라 곱고 예쁜 사진 속의 모습은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론 아버지는 몇 년간 괜찮으시면 또 한 1년은 아프시고 하는 식으로 병고를 반복하셨다. 여러 번의 수술로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지신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그 비위를 다 맞추시느라 애를 쓰셔야만 했다. 여덟 남매의 장남에게 시집오셨던 엄마는 조카들까지 차례로 키우셨고 내 어린시절은 언제나 사촌오빠들과 함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딸 넷을 두셨지만 자식들을 끔찍이 위하던 아버지 때문에 딸들에게 일 한번 못시키시고 모든 일은 엄마의 차지였다.
그렇게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사시던 엄마가 부엌살림에서 벗어나신 건 작년 겨울이었다. 두 분만 사시기에는 너무 나이 드셨다며 큰 사위가 집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으니 큰 사위가 아들 노릇을 한다며 모신 것이다. 부엌살림을 정리하던 날 엄마는 “이것도 필요할 텐데”, “이것도 쓸만한데” 하시며 살림살이를 정리하시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부엌은 자연 엄마가 책임지셔야할 공간이 아니었고 옛날처럼 종종걸음 안하시게 되었으니 홀가분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표정엔 뭔가 쓸쓸해하시는 눈치가 역력하신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며 엄마에게 부엌은 어떤 곳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어쩌면 가족들을 위해 밥을 짓는 곳 이상의 엄마의 삶을 지탱해가던 곳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늙어가시면서 시장을 가실 때나 잠깐 외출을 하실 때도 아버지가 꼭 엄마를 챙기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아직은 더 살 거라며 건강에 자신하시던 아버지가 지난 가을 갑자기 돌아가셨다. 엄마에겐 평생을 힘들게 하셨지만 기둥 같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에 돌아가신 분보다 엄마가 더 걱정이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간 못 가시던 형제분들 집에도 가시고 자유롭게 다니시는 모습이 이제야 자유를 얻으신 것 같았다. 처음으로 당신만의 시간을 가지게된 엄마에게 우리는 팔순이 넘으신 나이에 ‘자유부인’이 되셨다며 놀려드렸다. 몸은 자유로워지셨을 터인데도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의 눈에 어리는 눈물은 평생을 함께 한 사람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이 아닐까. 부부란 어쩌면 전생에 빚을 진 사람들이 만나 그 빚을 다 탕감할 때까지 함께 지내는 관계라는 말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 많은 집안 친척과 사촌 형제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찾아와 주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모두 엄마를 뵙기 위해 왔다는 그 말을 듣고 엄마의 일생이 작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시며 살아오신 날들이었나를 생각해보았다. 요즘은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쪽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지금이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그 옛날만큼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자랑스럽고 기뻤던 일보다는 실망스럽고 후회스러운 일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행복은 마음으로부터 온다는 말이 있다. 쓸쓸하고 마음 아팠던 기억은 모두 버리고 다가오는 날들은 우리모두 작은 행복이나마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뉴스타운
뉴스타운TV 구독 및 시청료 후원하기
뉴스타운T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