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 사형을 무릅쓰고 보트로 탈출한 북한 가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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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 사형을 무릅쓰고 보트로 탈출한 북한 가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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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뉴스 인터넷판 해당기사 일부 갈무리/ 2023.12.06. 

2023년 초 김이라는 성을 가진 북한 사람이 사형을 무릅쓰고 보트를 타고 남한으로 탈출에 성공한 탈북인과 영국의 BBC가 인터뷰한 내용을 6일 장문의 기사로 내보냈다.

BBC보도에 따르면, 탈북을 한 김씨는 임신한 아내, 어머니, 형의 가족, 아버지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 등 온 가족이 함께 바다로 탈북에 성공했다. 김씨는 2023년 들어 처음으로 남쪽으로 온 사람들이라고 BBC는 전하고, 코로나19 발생으로 북한이 국경을 폐쇄하고, 무역을 차단하는 등 한때 탈북은 사실상 중단됐다고 소개했다.

김씨에 따르면,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고, 탄압이 심해지는 사례를 포함해 시골 생활에 대한 새로운 세부 사항을 공개하고, 이곳과 북한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요청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BBC는 김씨의 모든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대부분 다른 탈북자들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김씨가 탈출한 날 밤은 격동의 밤이었다. 남쪽에서 맹렬한 바람이 불어와 폭풍을 몰고 왔다. 이는 모두 김 씨의 계획의 일부였다고 한다. 거친 바다로 인해 모든 감시 선박이 후퇴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이다. 김씨의 형의 아이들은 자신이 먹인 수면제 때문에 잠들었다 한다.

김씨와 그의 형제는 이제 어둠 속의 지뢰밭을 통과하여, 도주선이 비밀리에 정박되어 있는 곳까지 그들을 운반해야 했다. 그들은 경비병의 탐조등에서 나오는 광선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조금씩 움직였다.

배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아이들을 낡은 곡물 자루에 숨겨 연장을 넣은 자루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 이에 가족은 칼을 든 남자, 독을 든 여자 등으로 한국으로 출항했다. 각각은 대결이 계속되면 해안경비대의 얼굴을 깨뜨리기 위해 속을 비우고, 고추 가루와 검은 모래로 채워진 달걀 껍질 하나를 움켜쥐었다.

엔진 소리는 요란했지만 김씨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심장이 뛰는 소리뿐이었다고 한다. 이제 단 한 가지라도 실수만 하면 모두 처형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탈북한 성공한 김씨는 지난 4년을 회상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고통이 있었다BBC와의인터뷰에서 말했다.

북한에서의 코로나19 초기에는 사람들이 '매우 무서웠다'고 그는 말했다. 국가는 전 세계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방송하고,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전멸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코로나19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말했다.

의심되는 사례가 보고되면 경비원이 마을 전체를 격리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모든 사람이 갇혀 있고, 그 지역이 봉쇄되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이 거의 또는 전혀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씨는 이어 그들이 한동안 사람들을 굶주리게 한 후, 정부는 트럭 한 대분의 식량을 가져왔다. 그들은 음식을 싸게 팔고 있다고 주장했고, 사람들은 칭찬했다고 전하고, “사람들이 이것이 전염병으로부터 이익을 얻으려는 국가 전략의 일부인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서 살아남으면서, 그들은 국가가 위험을 과장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이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라고 믿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은 국경 폐쇄였다고 말했다.

북한의 식량 공급은 오랫동안 불안정했지만, 북한에 들어오는 식량이 줄어들면서 가격이 급등해 모두의 삶이 훨씬 더 어려워졌다고 그는 말했다. 2022년 봄, 그는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고 전했다.

그는 “7~8년 동안 기아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지만 그 이후에는 기아 소식이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면 ', 이 동네 누군가가 굶어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됐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또 다른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2월 어느 날, 김 씨는 이웃의 한 고객이 회의에 늦게 나타났는데, 노인 부부를 살해한 혐의로 경찰이 마을의 모든 사람을 검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검 결과 부부는 굶어 죽었고, 쥐들이 죽어가는 동안 손가락과 발가락을 먹은 게 틀림없다고 한다.

그러다가 4월에 그는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농부 두 명이 굶어 죽었다고 말했다. 농민들이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다. 북한 일반 사람들은 그러한 사망을 독립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2023년 식량 위기에 관한 세계 보고서는 북한의 국경이 폐쇄된 이후 식량 불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고 밝혔다. 20233월 북한은 세계식량계획(WFP)에 도움을 요청했다.

김씨는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한다. 코로나 이전 북한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는 암시장에서 물건을 팔아 돈을 벌었다. 그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밀수된 오토바이와 텔레비전이었다. 그러나 국경이 폐쇄되어 거의 모든 무역이 중단되자 그는 야채를 사고파는 일로 전환했다. 그는 모두가 식사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 야채 장사를 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집이나 골목길에서 은밀하게 물건을 파는 이른바 '메뚜기 장수(grasshopper seller)'로 자처했다. 그는 누군가 우리를 신고하면 우리는 메뚜기처럼 음식을 들고 도망갈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와서 팔아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가격을 매겼으며,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었다면서 김씨는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부자임을 깨달고 한다. 그와 그의 아내는 저녁 식사로 원하는 고기와 야채를 넣고 끓인 음식을 먹을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북한에서 아주 잘 먹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김씨가 묘사하는 삶은 유난히 현명하고 때로는 부도덕한 사업가의 모습을 그린다. 이제 30대가 된 그는 10년 넘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며 북한 체제를 능가할 방법을 찾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가 어린 나이에 시스템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한 일찍부터 그와 그의 아버지는 남몰래 한국 TV를 시청하곤 했다. 그들은 국경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세트의 채널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 씨는 사람들이 자유로운 나라에 매료됐다.

나이가 들수록 북한에서 목격한 부패와 불의가 그를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는 보안요원들이 자신의 집을 급습했던 한 사건을 회상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은 국가의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한 군인 장교는 이 산소가 당신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 새끼야"하며 야유를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21년에 김씨는 국가가 반사회적 행동(anti-social behaviour)’로 간주하는 것을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단속반이 구성되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임의로 막고 위협했다. “사람들은 단속요원들을 마치 우리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vampires)와 같은 모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범죄는 외부 정보, 특히 한국 문화를 소비하고 공유하는 것이었다. 김씨는 이에 대한 단속이 "훨씬 더 심해졌다. 적발되면 총을 쏘거나 죽이거나 노동 수용소에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20224월 자신이 알고 있던 22세 남성이 공개처형에서 총살되는 모습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다면서 그는 한국 노래 70곡을 듣고, 영화 3편 정도를 보고, 친구들과 공유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BBC이러한 처형을 독립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북한은 202012월 한국 콘텐츠를 공유한 사람을 처형할 수 있다는 내용의 새로운 법을 통과시켰다.”고 전했다.

20년 동안 수백 명의 탈북자들을 인터뷰를 해온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요안나 호사낙(Joanna Hosaniak)은 김씨의 처형에 대한 설명이 전혀 놀랍지 않다면서 북한은 인구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개처형을 늘 사용해 왔다. 새로운 법을 시행할 때마다 사형집행의 물결이 이어진다.”고 소개했다.

김씨는 이런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고민에 빠졌는데, 마침내 그를 망가뜨린 것은 작년에 친구의 자살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여성과 이혼하고, 다른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관리들은 그 친구에게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 수용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 다른 탈출구를 찾으려고 빚에 빠졌다고 한다. 김씨는 전시된 대학살 현장은 그가 겪어야 했던 가장 느리고 고통스러운 최후를 보았다면서 자살을 한 그 친구는 손톱이 나올 때까지 벽을 할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수백 번이나 탈북을 꿈꾸었지만 가족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었다. 2022년이 되자 인생은 너무나 절망적이었고 마침내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는 먼저 동생을 목표로 삼았고, 그와 그의 아내는 불법 수산물 사업을 운영했지만 북한 정부는 비공식 판매자를 단속했다. 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 이상 낚시를 할 수 없었다.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쉽게 설득됐다는 것이다.

그 후 7개월 동안 두 사람은 세심하게 탈출 계획을 세웠다. 팬데믹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 북부 국경을 넘어 잘 확립된 탈출 경로 중 다수가 차단되었지만, 형제들은 남한 국경과 가까운 남서쪽 끝의 작은 어촌 마을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대안이면서도 위험한 탈출구인 바다를 제공했다.

첫째, 물에 접근하려면 허가가 필요했다. 그들은 인근 군사 기지에 민간인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파견된 후 군사 장비 구입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씨의 동생도 이 계획에 참여했다.

김씨는 그 지역을 순찰하는 해안경비대와 경비원들과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들의 움직임, 의례 및 교대 패턴에 대한 정보를 은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그와 그의 형은 밤에 그들에게 잡히지 않고 배를 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런 다음 그의 가장 어려운 임무가 왔다. 바로 그의 나이 드신 어머니와 아내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둘 다 떠나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형제들은 어머니에게 복종하라고 소리치며 어머니가 함께하지 않으면 여행을 취소하고, 그들의 비참한 일에 대해 끝까지 어머니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한다.그녀는 속상해하고 많이 울었지만 결국 동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날 부부가 아기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 자신의 몸이 아니다라며 말다툼을 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당신(아내)은 부모이다. 우리 아이가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 살기를 원하느냐?"고 했더니 효과가 있었다.   

김씨는 탈출을 위한 마지막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당국이 떠난 후 아버지의 무덤을 더럽힐까 봐 두려워서 형제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파내러 나갔다. 훼손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땅을 다시 잘 덮은 후 그들은 그것을 주변 광야로 가져가 불태웠다.

그들은 나중에 어둠 속에서 건너야 할 먼 지뢰밭을 조사했다. 그들은 약초를 따는 척하면서 그 약초를 통과하는 경로를 명확하게 그려 놓았다. 김씨는 해안선에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최근 지뢰가 매설됐지만, 그곳에 근무하는 경비병이 적어 가장 안전한 탈출구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날씨와 조류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문제가 남았다.   

56일 오후 10시에 그들은 항해를 시작하여 허용된 만큼 여행한 다음 계속했다. 썰물로 인해 암초와 바위가 드러났는데, 그들은 레이더에 떠다니는 쓰레기로 위장되기를 바라며, 아주 천천히 탐색했다.

안전하다고 느끼자마자 그들은 조류를 타고 전속력으로 나아갔다. 김씨는 뒤를 돌아보며 따라오는 배를 보았지만 그들을 잡지 못했다. 몇 분 안에 그들은 해상 국경을 넘어서게 됐다.

김씨는 그 순간 모든 긴장이 풀렸다.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한국의 연평도에 접근하면서 빛을 발했고, 해상에서 거의 2시간 만에 해군에 의해 구조됐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정확하게 진행됐다. 그는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 같았다고 말했다.

북한 난민들의 한국 정착을 돕는 단체인 리버티 인 북한(Liberty in North Korea)의 박소길 씨는 김씨의 탈출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예외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상 탈북이 항상 극히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팬데믹 이후 탈북이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이러한 바다 탈출에는 세심한 계획, 놀라운 용기가 필요하며, 모든 것이 기적적으로 잘 진행되기 위해서는......,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북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을 통해 탈북자들을 돕는 JM 선교사의 스티븐 김 목사는 지금 탈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부유하고 연줄이 좋은 사람들뿐이라고 덧붙였다. 매년 약 1,000명이 중국 국경을 넘었지만,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지난 4년 동안 20명만이 중국 국경을 넘었고, 그 중 4명만이 한국에 도착했다. 지난 10월 그와 인권단체인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는 중국이 일부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냈다고 비난했다.

북한은 현재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심화하는 동시에 서방과의 외교에는 등을 돌리고 있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가 보고된 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BBC는 전했다.

출된 후, 김씨와 그의 가족은 먼저 그들이 북한 간첩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남한 정보기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아야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재정착 센터에서 남부 생활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물리적으로 너무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옛 집과 새 집은 완전히 떨어져 있으며, 탈북자들은 종종 전환에 어려움을 겪는다.

가족은 김씨의 아내가 아이를 출산한 10월에 정착시설에서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녀는 건강하지만 적응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 중 누구도 이전에 지하철을 타본 적이 없었고, 그녀는 계속 길을 잃곤 한다는 것이다. 실수할 때마다 그녀의 자신감은 더욱 무너집니다. 그녀는 지금 여기에 온 것을 다소 후회하고 있다고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이미 한국 문화에 익숙한 김씨는 쉽게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상상했던 세계와 지금 내가 물리적으로 탐색하고 있는 세계는 매우 유사하게 느껴진다

BBC“(그들에게는) 앞으로도 이러한 놀라움과 도전이 더 많이 있을 것이라며, “이것은 그의 여행의 시작일 뿐이라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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