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북한특수군 위장통곡 공작조(제166.167.女광수)포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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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북한특수군 위장통곡 공작조(제166.167.女광수)포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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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여광수 이야기(제167女광수)

위장통곡 공작중인 5.18 북한특수군 공작조 리혜정 포착되었습니다. 리혜정 (제166'女'광수)로 명명합니다.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5.18 북한특수군 여광수 이야기 백설희 포착되었습니다. 백설희 (제167'女'광수)로 명명합니다.

▲ 5.18 북한특수군 위장통곡 공작조(제166.167.女광수)포착 ⓒ뉴스타운
▲ 백설희 (제167'女'광수) 약력 프로필 ⓒ뉴스타운

500만야전군님들의 불철주야 끈기 있는 탐색으로 찾아서 올린 사진에 나타난 3인의 위장통곡녀들,김제갈윤님의 포기없는 불굴의 애국정신에 부응하고 그 수고와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이 사진에 나타난 위장통곡녀들을 며칠동안 집중탐색한 결과 그 동일인들을 포착하였습니다.

특히 백설희의 두 비교이미지는 특징점으로서 심한 곱슬머리와 특히 이마 전체의 발제선은 완벽하게 일치하며, 다른 사진에서의 크로스체크로 콧등의 약1Cm길이로 세로로 길게 나 있는 매우 옅은 기미점과 코끝의 오른쪽에 나있는 직경 약 2mm 정도 크기의 둥근 기미점의 위치가 정확하게 일치하여 동일인으로 판독하였고, 더욱 더 확실하게 동일인임을 읽어내기 위해 이마 전체의 등고면을 부분부분 나누어서 미세 잔근육들의 위치와 면적, 크기 등의 등고선을 하나하나 비교하여 확인한 결과 미세잔근육들의 등고선이 모두 일치하는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백설희는 북한 최고의 생물학 과학자로 명성을 얻다가 북한특수군의 일원으로 5.18 광주에 공작조 광수로 남파되어 북한정권에 충성 하였으나, 김정일의 악랄한 폭정과 모함으로 정치범수용소에 갇히는 등 북한정권의 배신과 폭정을 모두 겪은 여광수로서 백설희의 인생역정 자체가 김일성 김정일의 천인공로할 만행을 대변하고 있다.

아래의 글은 인터넷에 떠 있는 백설희에 관한 어느 탈북자의 글이다.

숨은 영웅에서 간첩의 애첩으로 몰린 백설희 | 탈북자이야기 | 2009.03.16. 20:39

백설희를 비롯한 북한의 과학자들과 인민들은 김정일을 하늘처럼 믿고 따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체험을 통해 깨달았다. 

북한농업과학원 식물학연구소의 백설희박사라면 북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는 한때 기름작물(품종개량) 연구성과로 북한에서 숨은영웅의 전형으로 이름 날리던 여성과학자이다. 

백설희는 1960년대 중엽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를 졸업하고 농업과학원식물학연구소에 배치되어 출가도 안한 처녀의 몸으로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연구사업에만 몰두했다. 그는 고심어린 연구 끝에 성공하여 1979년 김일성의 접견을 받고 단독기념촬영을 하는 영광을 지니게 되었고 그러한 공로로 농업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그와 함께 1980년 10월 북한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으로 , 노력영웅으로, 인민과학자로, 216번호를 단 벤츠를 선물 받는 등 북한 과학자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정치적 명예와 부를 누렸다. 

당시 그의 연구 성과는 북한의 <식용유>문제의 주요한 고리를 해결한 대단한 과학연구성과로 선전되었고 그를 원형으로 영화 <열네번째 겨울>까지 만들어져 북한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선전모델로서도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기름골을 통하여 <식용유>를 해결할수 있다는 착각으로부터 북한당국은 풍치 수려한 대성산식물원안에 그의 이름을 단 3층 규모의 <백설희연구소>까지 차려주었고 전국의 곳곳에 수십정보의 농경지를 기름골연구기지로 정해 주었다. 

백설희는 수령과 노동당의 배려에 감사하여 일생을 독신으로 과학연구사업에 종사할 결심을 굳히고 
기름골 연구사업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가 연구한 우량품종의 기름골은 유전자조작의 어려운 기술적문제로 하여 초기의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했고 계속되는 기름골의 퇴화로 하여 난관에 봉착하게 되며 끝내는 농경지가 제한된 북한의 실정에서는 실현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여 백설희는 기름골연구의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연구과제를 잡고 침식을 연구소에서 보내며 연구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던 그가 1996년 당시 중앙당농업담당비서 서관희 사건에 연루되게 된다. 여기서 서관희 사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려고 한다. 

1990년대 북한의 농업은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사회주의 배급제도는 완전히 무너지고 상상도 못했던 기아가 덮쳐 300만 명의 북한인민이 굶어죽게 된다. 

그러나 김정일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금수산기념궁전건설을 벌려놓고 또 적화통일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군수산업에 대한 투자만 계속했다. 

이러한 고난 속에 인민들의 불만이 고조에 달하자 체제위기를 느낀 김정일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인민의 불만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사회안전부 정치부장 최문덕을 시켜 <심화조사건>을 조작,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몰아 처형했다. 

첫번째 먹잇감으로 당시 중앙당농업담당비서 서관희가 간첩의 누명을 쓰고 공개 총살된다. 

서관희가 1950년 후퇴시기에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전락 되였으며 농업담당비서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체계적으로 북한의 농업을 망쳐 놓았다는 것이다. 

서관희 다음 대상은 바로 백설희 박사 였다. 

보위부의 예심을 거쳐 발표된 백설희의 죄목이란 그가 서관희의 애첩이며, 그와 결탁하여 당의 농업정책에 커다란 해독 행위를 가했다는 것이다. 

하여 한때는 그렇게도 북한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숨은 영웅의 모델로 명성높던 백설희는 하루아침에 반역자가 되었고 70고령의 그의 어머니와 동생, 백설희의 뒤를 잇겠다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그의 조카들과 군복무 중이던 막내조카까지 강제로 제대되어 강원도 천내군 천내탄광의 굴속으로 끌려갔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04년 서관희 사건은 사회안전부 정치부장 최문덕의 정치적 야심으로부터 빚어진 날조극으로 재정리 되었지만, 그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은 거의 죽고 정치범수용소와 통제구역으로 잡혀갔던 수많은 가족들 가운데 돌아온 사람은 절반도 되나마나 했다. 지옥의 수용소에서 맞아죽고 굶어죽고 자살해죽었던 것이다. 백설희의 어머니도 천내탄광에서 굶어죽었다. 

교활한 정치 사기꾼 김정일의 지시로 목란관에서 사건의 피해자들을 위한 위로회가 진행되고 김정일의 위로친서가 전달되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지만, 그들이 흘린 눈물은 사실 김정일에 대한 원한과 울분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천리혜안의 예지를 지녔다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사건 당시엔 한치 앞도 분별 못하는 맹인이 되었냐며 터뜨린 분노의 눈물인 것이다. 

기적으로 살아 남은 백설희는 연구소로 돌아와 모든 명예를 회복했지만 폐인이나 다름없는 그는 매일 그 때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백설희는 1996년 당시 자신을 악착스럽게 고문한 보위부의 인권유린에 대해 김정일에게 신소편지를 쓴다고 했다. 북한지식인의 정치적 순진함이라 하겠다. <심화조>사건이 김정일의 각본에 따라 연출된 하나의 살인극인데 신소를 한다니? 

정말 어리석은 박사님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지금쯤은 백설희도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을 것이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탄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포악하고 즉흥적인 김정일의 묵인비호 하에 빚어진 90년대 <반민생단>사건이었다. 

김정일은 자기의 권력유지를 위해 300만 명을 굶겨죽이고 그 원인을 순진한 지식인들에게 들씌워 무자비하게 처형한 희세의 살인마다. 백설희를 비롯한 북한의 과학자들과 인민들은 김정일을 하늘처럼 믿고 따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체험을 통해 깨달았다. 

북한인민들의 김정일 정권을 향한 울분과 분노는 점점 다져지고 있으며 거대한 활화산이 되어 폭발할 그날은 머지않아 올 것이다.

글 사진 : 시스템클럽 500만야전군 노숙자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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