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고존엄은 최현(崔賢)이라야 했다
북한 최고존엄은 최현(崔賢)이라야 했다
  • 백승목 대기자
  • 승인 2014.03.05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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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혈통 김정은보다 독립군과 빨치산 가문 최룡해 혈통이 우월

▲ (좌)1967.10 대외선전용 화보 등대에 게시된 항일빨치산 사진(날조)으로 중앙에 최현이, 좌측에 김일성, 우측에 안길이 서 있다.
(우)1945.10.14 평양시소련군환영군중대회 연사로 지명 된 김일성이 조선일출신 통역관 강미하일소좌와 소련점열군사령부정치장교 메클레르 중좌의 지도를 받고 있다.
1937년 6월 8일자 동아일보는 김일성이 최고의 항일투쟁업적으로 내세우는 소위 보천보(普天堡)습격사건(1937.6.4)에 대하여 평북대안의 밀림지대를 무대로 하여 10여 년 간 활동하던 공비(共匪)두목 최현(崔賢) "장백밀림을 근거로 국경에 출몰" 제하의 보도에서 최현(崔賢1907~1982)과 김일성(金日成:1912~1994)을 상하관계로 언급하고 있다.

당시 기사에는 "김일성은 작년(1936)부터 비로소 활동을 하여 오며, 부하의 훈련 전법의 연구 등을 게을리 하지 않아 지금에 이르렀고 최현은 수 십 년 이어 준비를 하여오던 자로 나이 50을 넘었는데 김일성을 어린아이와 같은 취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실력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1937년 6월 최현은 30세, 김일성은 25세였으나 최현을 50세의 원숙한 공비두목으로 오인하고 있었으며, 김일성은 상대적으로 어린 풋내기 공비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평양에서 발행한 대외선전용 화보 등대(1967.10)에 실린 항일투쟁당시 사진 중앙에 최현(崔賢)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왼쪽에 안길(安吉)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서있는데 비하여 최현 오른 쪽에 꼿꼿이 서있는 김일성은 제법 긴장한 모습이다.

이런 종류의 사진은 김일성 우상화 과정에서 수차례 날조해낸 것으로서 현재는 북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사진이기는 하다. 위에서 언급 된 문제를 뒤 늦게 발견한 북한에서는 1970년대 이후 김일성을 중앙으로 최현을 김일성 좌측에 안길을 김일성 우측에 선 것으로 변조 전시 하고 있다.

두 번째 사진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소련군환영군중대회에서 환영연사로 지명된 김일성이 연단에 오르기 전에 소련군 적기훈장을 달고 조선인출신 통역관 강미하일 소좌와 소련군정치장교 메클레르 중좌의 지도와 조언을 듣고 있다.

1937년 6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1967년 10월 대외선전용 화보 등대에 게재 된 사진에서 김일성은 공비(빨치산)두목 최현(崔賢)에게서 어린애 취급을 받던 하급간부였을 뿐 '최고존엄'은 아니었음이 명백해 졌으며, 김일성은 주체(主體)란 말을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는 소련군의 꼭두각시 불과 했음을 여실히 입증해 주는 사진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인민군총정치국장으로 최근 숙청설이 나도는 최룡해(崔龍海)의 부, 최현(崔賢)에 대하여 위키백과는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홍범도(洪範圖 : 1868~1943) 부대에서 활동한 부친 최화심의 아들로 1907년에 중국의 길림성에서 태어 났다. 어머니는 경신참변 때 사망했고, 아버지가 속해 있는 독립군 부대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그 뒤 간도로 돌아와 민족주의 단체인 동만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으며, 1925년 중국 군벌당국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를 받은 뒤 7년간 연길 감옥에서 복역하고 석방되었다. 이때 본명인 득권에서 현으로 개명하였다. 1932년 7월 연길현에서 적위대에 가입하여 유격대로 활동하였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1사 제1단 단장을, 부대편제의 개편 뒤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방면군 제13단 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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