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카에 목숨 건 그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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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카에 목숨 건 그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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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젊은남'과 '나가이 겐지' 사이

^^^▲ 베이징 한 대학교의 졸업 기념사진여대생들이 20m 높이 백양나무에 매달려 촬영해 화제가 됐다.^^^
지난 24일 밤 11시, 중국 상하이 지하철 3호선역에서 한 청년이 달려오는 열차 앞에 뛰어든다. 자살을 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지하철 레일 위에 누운 채 자신의 몸 위로 지나가는 열차를 셀카로 찍기 위한 거였다. '젊은남(녠칭난:年輕男)'이란 아이디로 '유쿠(優酷,www.youku.com)에 올린 50초 짜리 이 동영상이 13억 중국인들을 일순간 경악에 빠뜨렸다.

지난 2007년 9월, 미얀마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진압군이 쏜 총탄을 맞고 죽어가는 일본인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長井健司,50)의 마지막 모습이 찍힌 사진이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기자의 손에는 여전히 카메라가 들려 있었고, 렌즈는 시위대에 총격과 타격을 가하는 진압군을 향해 열린 채 셔터가 계속 눌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남'과 '나가이 겐지'.
이 두 사람의 행위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다만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한 컷의 영상에 매달리는 행동양식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적 진실도 발견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비교 대상이 아닌 이 두 현상을 나열한 이유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간격이 바로 지금 중국의 젊은이들이 집착하는 위험한 셀카의 허구성을 대비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 상하이의 '젊은남'의 황당한 행동이 중국 인터넷을 뜨겁게 달굴 뿐, 그가 왜 한 컷의 영상을 위해 몸을 던졌는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자신의 용기와 담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아니라면 이 한 컷의 영상으로 세상에서 유명해지기 위해? 그 어떤 이유라도 우리의 충격을 덜어 줄 수는 없다. 도대체 왜?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가 않다.

중국의 신세대인 빠링후(80後), 주링후(90後), 그들의 셀카 속으로 들어가 보자. 거기에 혹 중국사회의 새로운 모습이 찍혀나오고 있는 건 아닐까?

지난 7월, 중국의 모 대학교 졸업 기념사진 촬영장에서 여학생들이 20미터가 넘는 높이의 백양나무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학사복에 학사모까지 착용한 그들은 줄줄이 나무에 매달려 기념사진을 찍었고, 인터넷에서 즉시 화제로 떠올랐다.

그것은 졸업 기념사진의 패션에서 나타난 하나의 '새로움'이었다. 허벅지를 드러낸 이른바 여대생들의 꿀벅지 졸업사진의 유행이 식상하면서 새로운 '출구'로서 그녀들은 백양나무를 선택했던 것이다.

새롭다는 것은 주목받을 수 있다는 것.
정말로 그들은 단지 주목받기 위해 지하철 열차에 뛰어들거나 나무를 타고 올라간 걸까? 그렇게 간단히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주목이나 관심이 생명 또는 위험이라는 것과 대등한 교환가치를 가지려면 여러가지 조건과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좀 더 복잡한 이유로 '표현'의 문제를 가정해 보자. 그들은 셀카라는 미디어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새로움의 형식 외에 새로움의 내용을 표현하는 데 실패하고 만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튀기 위한 모험. 그것은 현대 청소년들의 큰 특징 중 하나다. 튀기 위해서라면 일정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여겼다면 그 위험이 클수록 더 높이 튈 수 있다고 착각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된다. 단지 거기에 심각하게 나타난 문제는 역시 튀는 '내용과 감각'이 없이 새로운 표현형식의 위험만이 도사릴 뿐이라는 점이다.

한 컷의 셀카를 위해 이웃나라 국기인 태극기를 프라이팬에 튀겨 맥주 안주로 먹는 젊은이 역시 '젊은남'과 다를 바 없이 모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인터넷에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비난이 자신의 존재와 삶에 미칠 영향 따위에 관한 고민은 중요치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위험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국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한 컷의 셀카에 목숨 거는 젊은이들이 있다. 자신의 나체를 드러내거나 연출된 상황이나 그래픽 기술을 이용해 진실로 오도하는 일들이 모두 '표현의 빈곤'에서 시작된 비극이다. 어떤 형식이건 그들은 '관념의 일탈'이라는 경로를 지나 '무의미한 모험'에 도달하고 있다.

그들은 남들과 변별되는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중압감에 비해서는 너무나 빈약한 창의력을 지닌 자신의 처지에 거세게 반발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순간 그들은 '새로움'에 대한 유혹 앞에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쉽사리 내주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던지는 충격파를 통해 자신이 입은 잠재적인 정체성의 손상을 보상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튀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
세상에 이런 생물학적 법칙이나 사회학적 규칙은 없다. 디자이너나 카피라이터들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이 생존원리가 지금 모든 청년들에게 삶의 불문율로 통하고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무절제하게 확산, 젊은이들을 세뇌시켜 버린 이 논리는 즉시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그대, 튈 수 있다면 마음껏 튀어도 좋다. 그러나 자신 없다면 평범속에서 진리와 행복을 찾아 봐."
적어도 이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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