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선생 부산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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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선생 부산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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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만 있는 정치권 지하에서 웃

^^^▲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선생^^^
아! 가슴 아프도다! 오늘날 구 갓을 차마 어찌 말 하리요! 옛적엔 나라가 멸망함에 단지 종사가 무너질 뿐이더니 오늘날의 망국에는 인종도 아울러 멸망하노라

옛 서적엔 타국을 멸함에 무력에 의했으나 오늘날에는 계약에 의한다. 무력에 의하면 그래도 승패만 있지만 계약에 의하면 스스로 복망의 길에 들어선다.

익현은 정성이 모자라고 힘이 미약하여 이미 병에 걸려 죽지 못해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순국으로써 백성의 의기를 고취하지 못하니, 하늘을 우러러 보아 부끄럽고 살아서 우리 수천만 동포를 대할 수 없고 죽어서 지하의 이공을 뵐 수도 없도다.

이에 나의 비루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삼가 오늘날 시국의 대세를 보고 들은 바대로 간략하게 이 글을 지어 우리 전 관리와 백성에게 포고하노니 오직 원하는 것은 우리 관리와 백성을 익현이 죽어가면서 하는 말은 가볍게 버리지 말고 각자 스스로 면려하여 저놈들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민족말살을 못하게 하면 천만다행이라...

이글은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제16권 잡저 "팔도 사민(八道士民)에게 포고(布告)함" 첫머리에 실려 있는 글이다.

평소에 마음으로 새기고 있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선생의 묘소가 있는 충남 예산에서 조선말기 거유이자 의병장 면암 최익현(1833-1906) 선생의 무덤을 참배하여 선생의 흔적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경기도 포천 신북면 가채리에서 1833년 태어났으며 호는 면암(勉庵), 본관은 경주이며,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다.

그는 국사책등에서 1868년 당백전 발행 등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을 실각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나, 그 역시 얼마 못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험난한 삶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하겠다.

1873년부터 3년간의 유배생활을 계기로 왕도 정치적 명분이 상실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여 그 첫 시도로서 1876년 '병자지부소' 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했다.

이 상소로 흑산도로 3년간 유배 되었다가 풀려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가 그의 항일구국이념이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오랜 침묵을 깨고 '청토역복의제소' 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선생^^^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 수단에 의한 위정척사운동은 접고, 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안에서 '창의토적소'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팔도사민'의 포고문을 돌리고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를 발표하여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그의 나이는 74세 이었다.

관군과 일본군이 대치 상황을 이루었을 때, 최 선생은 "전하(고종)의 군대와는 싸울 수는 없다" 이 말을 하면서 그냥 항복하여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대마도에서 그는 단식 4개월 만에 굶어 죽음을 맞이하여 그해 11월 21일 부산 초량나루에 시신이 운구 되었는데 그 영구를 맞은 기관은 지금의 동래 상공회의소 격인 상무사에서 주관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 묘사한 글을 보면 "선생! 여기는 대한의 땅입니다" 라고 하며 울자 부산부두에 모여든 남녀노소 수십만 명이 모두 선생을 부르는 곡성이 땅을 뒤흔들고 상여를 뒤따르는 무리가 5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에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어 날이 어둡고 가량비가 내렸는데 갑자기 쌍무지게가 동남쪽에 가로 걸려서 광채가 빛나더니 상무사 안으로 연구를 안치한 뒤에야 무지개가 사라지고 비가 개어 부산부두에 가득했던 추모객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고 한다.

상무사에 영전을 꾸미자 동래부의 기생 비봉, 옥도, 월매가 언문으로 제문을 지어 치전(致奠)하며 슬프게 곡하였고, 범어사 승려 봉련이 승도들을 거느리고 길가에서 치전을 하였다고 한다.

또 초량의 세 과부는 부산부두에서 부터 최 선생의 상여 뒤를 따라서 곡하며 구포에 이르자 머리에 제물을 이고 도보로 40 리나 더 걸어가며 하는 말이 "우리 대감의 제수는 왜놈의 차에 실어서는 안 되며, 제기도 왜놈의 물건으로 써서는 안된다" 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최익현 선생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렬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그 열기가 당시 상황으로 보면, 우리나라 건국의 기초가 되는 기미년 3.1운동의 열기, 최근 한일월드컵의 전국적인 붉은 악마의 열기, 조금 빗나가는 내용이지만 작년도 한미쇠고기 협상반대를 외치는 촛불집회 등에서 보듯이 우리의 민족성을 조명할 수 있는 본보기라고 보여 진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세계적 금융위기와 고실업율, 전체국민의 90% 이상이 스스로 빈곤층이라고 생각을 하고, IMF 때보다 더 살기가 어렵다는데, 그래도 IMF 당시에는 "금모으기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여 국론을 모아 슬기롭게 극복했다.

그런데도 지금은 위기를 구할 묘책을 제시하는 선각자도 없고, 정쟁만 있고 대안은 없는 정부와 정치권을 꼬집는 언론도 없으니 지하에 계시는 최 선생님은 웃고 있는지 통곡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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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09-03-06 11:36:41
살아서 훨훨 나는 세상이 속히

자유세상 2009-03-06 04:43:26
죽은자는 말이없다. 라는 명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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