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편가르기'를 폐기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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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편가르기'를 폐기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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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리는 레벨을 정해 끼리끼리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서로 이웃이 되고 동네를 이루는 데 익숙해진 것 같군요. 어디 그뿐인가요. 장애인(아)으로 불리는 이들은 죄다 무슨 무슨 원(院)으로 들어가 이른바 정상인들의 눈치 안 보고 속 편하게(?) 무리 지어 살고 있습니다.

교통사고와 산업재해 등으로 후천적 장애인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데도 우리들의 '편가르기' 의식은 허물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군요. 되레 장애인 시설에서 부정비리가 속출하고 있고, 교육현장에서는 장애아와의 통합교육이 설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득 1970년대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군요. 옆집에 '도마'라는 세례명을 가진 남자친구가 살고 있었답니다. 지금처럼 편을 가른다면 장애아였지요. 하지만 그때는 그 애가 잘 뛰지 못하고 말기를 알아채는 데 조금 힘들어했다는 것밖에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부모님도 그 애에게 특별한 시선을 보내지 않은 것 같고요. 한마디로 분위기가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겁니다. 작금의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아마도 현대성(現代性)을 빌미 삼아 그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주저했을 테지요. 참 서글픈 현실입니다.

저는 요즘 자전거를 통해 자연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장마비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가을 하늘처럼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키 작은 단풍나무들이 아기자기 자리하고 있네요. 저는 그 잎들의 하늘거림에 취합니다. 예전엔 이렇게 사랑스런 초록빛을 본 적이 없거든요.

붉게 물든 단풍나무와 달리 초록빛 단풍잎들을 보노라면 안타까움이 찾아옵니다. 자연산 초록빛을 볼 수 없는 이들, 이 따가운 햇살을 손으로 느껴 보지 못하는 이들이 생각나네요. 그이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온전치 않은 한 인간이 한 부락 공동체 속에 녹아들어 살 수 있도록 배려했던 지난날 우리 어른들의 인간미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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