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2
스크롤 이동 상태바
만남 -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년 전이었다.
태진은 창사 20주년 특집 20부작 원고를 맡았다. 몇 달에 걸쳐 대본이 완성되고 기획회의가 열렸다. 주인공과 조연들을 캐스팅하는 자리였다. 방송국 내에서 평소 왕소금으로 소문난 자금 예산실이지만, 이번 작품 만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사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기대도 그만큼 컸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특집 총감독을 맡은 박진광 PD에게, 난다긴다하는 탤런트들은 물론 매니저들까지 합세해 그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 로비 활동이 치열하다고 했다.

태진은 그 자리에서, 여자 주인공 역에 민소영을 추천했다. 당시 그녀는, 단막극에 조연과 엑스트라로 몇 번 얼굴을 내민 적밖에 없는 신출내기였다.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특히, 총감독을 맡고 있는 박 PD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웃기까지 했다. 조연출 PD 두 명과 카메라 부장도, 자장면을 먹다가 바퀴벌레를 씹은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르고, 박 감독이 입을 열었다.

“이태진씨, 갸가 뭘 알아요? 이제 연기의 솜털조차 벗지 못한 애라고요. 연기의 ㅇ자도 알지 못하는 앤데.”

박 감독은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극도로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그는 평소에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술을 마실 때나 이따금 한 개비 정도 피웠고, 열을 받아야만 줄담배를 피워대는 습성이 있었다.
회의실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이 흘렀다. 모두 박 감독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태진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박 감독님하고 손 잡고 일한 지가 몇 년입니까?”
“…….”
“내가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다른 작가들처럼 감독님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간섭한 적이 있습니까?”
“없었지요.”

박 감독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맥주 마시듯 단숨에 들이켰다.

태진은 다른 것은 몰라도, 이번 여주인공 배역만은 민소영이 적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작품만 쓰고 주인공들 캐스팅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지만, 이번 여주인공 배역만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고 싶었다. 무명인 민소영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박 감독의 반대는 처음부터 완강했다.

“박 감독님, 내가 작가랍시고 연기자들 캐스팅 문제에 단 한 번이라도 콩 놔라, 팥 놔라 한 적이 있습니까?”
“…….”

박 감독은 양미간에 주름을 모으고, 입을 커다란 자물통처럼 굳게 다물고 있었다.

“나도 이 바닥 화류계 물을 먹은 지 꽤 됐다면 된 사람입니다. 물론 서로가 맡은 전문적인 분야만을 따지고 든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나도 누가 어느 배역에 딱 맞는 연기자라는 것쯤은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쓴 작품의 주인공인데 누가 그 배역에 가장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안 했다면 그게 말이나 되는 얘깁니까?”
“…….”

박 감독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계속해서 담배 연기만 허공에 날리고 있었다. 태진은 그런 박 감독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번 특집은 보통 작품이 아니었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방송가 안팎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엄청난 제작비도 제작비려니와, 몇 달에 걸친 해외 로케까지 병행되어야 했다. 한정된 연기자들을 데리고 운영하는 방송국으로서는, 다른 프로에 영향을 주면서도 이 특집에 그만큼 비중을 두고 있다는 얘기였다. 스태프들은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박 감독과 태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박 감독이 긴 침묵을 깼다.

“……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만약에 연기자를 잘못 써서 작품이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랬을 때, 그 책임은 누가 몽땅 뒤집어씁니까?”
“그야 일차적으론 박 감독님에게 책임 추궁을 하겠지요.”
“알고는 있군요.”

박 감독의 양미간에 모아져 있던 주름이 그제서야 조금 펴졌다. 태진은 박 감독의 그런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심정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태진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민소영이 문제라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민소영이 출연한 녹화 테이프를 수십 번도 더 보며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민소영인 아직 자신의 ‘끼’를 발휘할 배역을 맡지 못해서 그렇지, 온몸에서 풍기는 육감적인 분위기와 내면 연기는 일품이었습니다. 아니, 여러분 앞에서 건방진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그 어느 연기자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민소영이 이 작가의 여동생이라도 됩니까? 너무 편애하는 거 같아서요, 옆에서 듣기가 좀 그렇네요.”

김 PD였다. 태진과도 여러 번 같이 호흡을 맞춘 앞날이 기대되는 친구였다. 그는 이 딱딱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는지 싱긋 웃으며 싱거운 소리를 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민소영이와 단 일 분도 마주 앉아 커피 한 잔 나눈 적도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박 감독님, 냉정하게 말하면 방송국에 소속된 많은 PD와 작가 중에서 이 특집을 박 감독님과 저에게 맡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태진과 박 감독의 눈이 마주쳤다.

박 감독의 표정은 처음보다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여 있는 담배에서는 연기만 날릴 뿐, 긴 재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담배 피우는 것도 잊은 채 태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이 작가와 나를 그만큼 믿어서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방송국에선 성공적인 작품을 원해서였을 겁니다. 나 역시 박 감독님 못지 않게 작품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어떤 사심을 품고, 작품의 성공 여부의 키를 쥐고 있는 주인공 캐스팅에 주제넘게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박 감독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던 담배에서 긴 담뱃재가 끝내 탁자 위로 톡 떨어졌다. 동백꽃이 모가지째 지듯.

“박 감독님도 기억합니까? 민소영이 탤런트 시험 면접 때 심사위원들 앞에서 옷을 훌훌 벗고 삼각 팬티 하나만 걸치고 춤을 추던 것을. 제 기억으로는 그 자리에 저와 함께 있었던 걸로 압니다만.”

그 일은 연예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 중의 사건이었다. 그날 심사위원 중의 누군가가 자신이 가진 재능이나 특기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것을 하나만 발표해 보라고 하자, 민소영은 누가 제지할 틈도 없이 거침없이 옷을 벗고는 한바탕 열정적인 춤을 추었던 것이다. 마치 뇌쇄적인 몸매를 마음껏 과시라도 하듯.

여론은 땅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방송가 참새들의 입방아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연기도 좋지만 여자 탤런트 후보가 팬티 한 장만 걸치고 노출을 했다는 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 연기자가 되려면 그 정도의 용기와 자신감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과 박수가 팽팽하게 맞선 사건이었다.
태진은 박 감독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작품은 바로 그런 용기 있는 연기자를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온몸을 던져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박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모두 태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을 설득하는 일만 남았다.

“대본을 보셔서 알겠지만, 영하 20도가 넘는 남극의 바다에 뛰어들기도 해야하고, 필리핀 밀림에선 살아 있는 독사의 머리를 입으로 물어뜯어 껍질을 벗기고 꿈틀거리는 생살을 씹어 삼켜야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 부분이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여서, 카메라를 클로즈업시키기 때문에 대역은 불가능합니다. 과연 대한민국의 어느 여자 연기자가 그런 부분을 가장 리얼하게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박 감독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누가 그런 연기를 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무리 독사의 이빨을 뺏다고는 하지만, 웬만한 남자도 일 미터가 넘는 뱀을 움켜잡고 이빨로 대가리를 물어뜯어 껍질을 벗기지는 못할 겁니다. 더구나 껍질이 벗겨져 꿈틀거리고, 흰 살에 피가 송골송골 맺힌 뱀을 씹어 먹어야 하는…… 솔직히 내가 대본을 쓰기는 했지만 나더러 그렇게 하라면 난 못 합니다.”
“…… 알았습니다. 여주인공 캐스팅은 내일 다시 한 번 논의하기로 하고, 먼저 남자 주인공을 비롯한 나머지 연기자들을 선정하기로 합시다.”

다음 날.
박 감독은 태진의 주장대로 특집극의 여자 주인공 역에 민소영을 캐스팅했고, 방송가 참새들은 면접 시험 이후 그녀에게 또 한 번 집중되는 매스컴을 보며 입방아를 찧어댔다. 그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충격적인 배역에 대한 놀라움 반, 시기 반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태진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성공이었다. 방송 첫 회부터 시청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더니, 회를 거듭하면서 전국 술집이 파리를 날리고, 늘 교통 체증으로 몸살을 앓던 서울 시내 도로가 뻥 뚫릴 정도로 인기를 더해갔다. 텔레비전 방영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계속해서 갱신했고, 연말 방송 대상 시상식에서는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다시피 했다.

“이 작가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가진 거 아니오? 그 때 이 작가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이 영광은 없었을지도 몰라요. 허허허…….”

박 감독과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였다.

민소영은 특집극 하나로 대한민국 최고의 탤런트로 뜬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고, 총연출을 맡은 박 감독은 물론, 대본을 쓰고 신인에 불과했던 그녀를 추천한 태진까지 연일 쏟아지는 인터뷰 때문에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누가 뭐래도 민소영에겐 최고의 해였다. 일개 무명 신인이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방송 대상까지 거머쥐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방송 사상 최초의 사건이었고, 스타 탄생의 서곡이기도 했다.

[계속]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기획특집
가장많이본 기사
칼럼/수첩/발언대/인터뷰
방송뉴스 포토뉴스
오피니언  
연재코너  
지역뉴스
공지사항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뉴스타운TV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