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바라보았던 궁의 가을
왕이 바라보았던 궁의 가을
  • 김기영 기자
  • 승인 2012.09.28 1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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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27일 오후 서울 덕수궁에 가을 바람이 솔솔 불었다.

 

 

 

 

 

 

덕수궁은 선조 임금때 궁궐로 쓰이기 시작하여 광해군, 인조,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주 무대였으며, 궁궐로서는 유일하게 근대식 전각(석조전, 정관헌)과 서양식 정원, 그리고 분수가 있는 궁궐로서 중세와 근대가 잘 어우러져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에 위치한 월산대군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의 시작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당시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 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를 한다.

한편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고,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한 뒤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된다.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하였다.

 

 

 

 

 

이후 영조때 선조가 경운궁(덕수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과 선조의 기일을 맞이해, 영조가 세손(정조)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를 올리는 등 기념의식을 갖기도 하였고, 고종 30년(1893)에 선조가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5주갑(300년)을 맞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후 1897년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환어하기 전까지 비어있게 된다.

경복궁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인왕산 줄기 아래 아기자기한 전각들이 오순도순 정감있게 배치되어 자연스러운 정취가 있으며, 함녕전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후원길은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봄에는 살구꽃, 벚꽃, 참꽃, 수수꽃다리, 모란꽃 등 수많은 꽃 속에 화사하기 그지없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속에 백일홍과 분수에서 멱감는 비둘기들의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곳, 가을에는 노란 은행잎 비를 맞으며 붉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 낙엽길을 걸을 수 있으며, 겨울에는 온통 동화속의 은세계로 변하는 곳이다.

그래서 덕수궁은 결혼기념 촬영이나 사진 동호회 모임을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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