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형무소 복원 통하여 일제식민지 잔악상 알려야
경성형무소 복원 통하여 일제식민지 잔악상 알려야
  • 정병기
  • 승인 2011.09.02 0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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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정한 독립운동의 성지이자 역사의 현장 보존해야

“광복 66주년인데…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증조부 독립투사 사실 밝히기 위해 국가 상대 36년째 '고투'
일제강점기 나라위해 받친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 정부가 끝까지 책임지는 풍토돼야

일제식민지의 상징인 마포 공덕리 105번지 악명 높던 경성형무소 역사관 건립 서둘러야 당시 독립운동은 무섭고 독한 민족운동,후손들에게는 가난과 배움에 쪽박 채우는 일

3.1절이나 광복절이 돌아오면 기쁨보다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정부는 행사 때 마다 나라위한 희생은 정부가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데...악명높던 경성형무소 옥사기록을 제시해도 거증자료 더 찾아오라고 하는 국가보훈처에 대한 원망도 이젠 지쳤다.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마포구 공덕동 소재 서부지방법원. 검찰청)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36년째 지루하고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정현실은 주목해야 한다. 지난 날 독립운동을 하고도 그 명예를 찾기 위해 자료발굴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비통하다. 역사는 과거를 중시해야 현재를 알고 미래를 에측하고 나아가는 죄표가 되기 때문이다.

8월15일‘광복 66주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뜻이 깊은 후손들은 방방곡곡을 자려발굴과 발자욱을 찾아 거리를 누비고 있다. 지난날 선조인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단서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부양할 가족도 있고 몸도 성치 않지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증조부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을 조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다고 한다.

조상인 선조의 업적을 살펴보고“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확실하다”고 하지만 일제당시 경성형무소 옥사기록 담긴 제정호적을 외에는 더 발굴되지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 날아왔다고한다. 그 후 일제의 감시와 모진 탄압으로 집안은 감시의 대상이 되고 풍비박산,후손들은 살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금정광업소로 들어가거나 머슴살이 전전하며 배움에 길에서 머렁저 산전수전 겪으며 개고생을 떨치지 못했다.

일제식민지시대“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마포 공덕리 105번지 악면높던 경성형무소(1912)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정부가 정권이 바꿀때마다 소각하거나 관보 지시로 없애버리고 후손들에게는 자료를 요구하는 현실이 앞.뒤가 맞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또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증조부 이름을 족보에서 파버렸고 증조부가 실종된 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켰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정황증거’라고 강조했다. 실제 호적등본을 보면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했으며 모진 풍파를 겪으며 한많은 인생을 살야 했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 외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해방 이후에도 임정은 독립운동 관련 서류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는 사이에 없어지거나 인위적인 누군가에 의해 소각되고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아마도 친일파들의 소행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그들이 자신의 친일행각을 두려워하며 가리기 이해 온작 수작을 자행했기 때문이다.허위로 서류조작인나 증인을 내세워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작자들도 적지않다고 한다.뒤늦게 당시 친일행각이 밝혀져 개망신을 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후손들은 정권이 바끨 때 마다 국가보훈처는 물론 국가권익위원회 청와대에까지 진정과 관련 민원서류를 안 내밀어 본 곳이 없지만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안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주고 사오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에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난해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후손들은 “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지난 80년 12월 실수로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더욱이 일본 외무성은 1995년까지 조선인 수형인 명부를 보관했지만 우리 정부는 단 한 번도 그 서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당시 겨룰이 없었다도 말하다.

정용선 선생의 증손자도 당시 증조부가 옥사 이후에도 일제의 감시가 풀리지 않아 (조부)정덕수 할아버지는 금광(금정광업소/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 소재)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숨졌다. 정씨 자신은 경찰에서 근무하던 지난 1980년 강력범을 붙잡다 부상을 당했다. 당시 후유증에 간경화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집안은 풍비박산 후손들은 산전수정 개고생이 사실이다.

정씨는“독립운동가를 찾는 일을 후손들에게만 떠넘기는 정부가 야속하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을 거라 믿고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악명 높았던 경성형무소의 자료발굴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한가 희망이 잇다고 믿고 있다. 역사적 진실은 세월이 가고 세대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악명높던 경성형무소(마포 공덕리 105번지/현 서울서부지방법원.검찰청) 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다 이곳에 반드시 식민지 역사관 건립을 서둘러야 한다. 제대로된 역사를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보여줘야 진정한 식민지역사를 통한 일제의 포악성과 만행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잊어지고 묻혀버리는 경성형무소의 역사가 안타깝다. 이제라도 과거 식민지 역사 수치스런 역사일지라도 제대로 복원하여 후손들에게 살아있는 진정한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알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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