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26 직후의 안보상황
1979년 10.26 직후의 안보상황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3.05.0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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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갑자기 시해되자, 사회에는 리더십 진공상태가 형성되었다. 정치꾼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학생들을 선동하여 사회혼란을 획책함으로써 저마다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고, 이 중에서도 특히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은 과도정부를 전복하여 혁명정부를 수립하려는 전형적인 반란수법에 의한 폭력전술을 구사했다.

북한에서는 이를 남침의 호기로 판단하여 대남사업부를 중심으로 하여 이런 남한의 사회혼란을 사회폭동으로 증폭시켜 남침조건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하려고 열을 올렸다. 1979년 10월 27일, 북한은 전군에 "전투태세강화"(폭풍5호)를 지시했고, 10월 29일에는 동구를 방문 중인 오극렬 총참모장 일행이 급거 귀환하여 군사회의를 소집했고, 12월 18일에는 군-당 전원확대회의를 개최하면서 전군에 '통일에 대비한 무장'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980년 2월에는 해주, 세포, 곡산, 양덕 등에서 전시물자 동원훈련을 실시했고, 철도역에 비상열차를 24시간 대기시켰다. 1980년 3월에는 간첩들에게 남한의 시위조직을 확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고, 시위군중이 폭도로 변질되도록 "점화기폭조"를 잠입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조총련에는 공작원을 침투시켜 시위대를 거리로 유도, 민중봉기의 계기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계엄사 114p)

1980년 5월 8일, 김일성은 극비리에 소련을 방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회동했고, 5.18일에는 루마니아를 방문하여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표현했다. "나는 두 개의 조선을 반대한다. 남반부 인민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 금년 내에는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어서 5월 19일에는 북한 인민군 고위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하여 모종의 비밀회동까지 했다.

무장간첩의 침투도 활발했다. 1980년의 북한 무장간첩 침투사건은 5월초까지 4개월간 10건이나 되었다. 1979년 12개월간 검거된 사건은 불과 5건이었다. 이 10건 중 7건이 1980년의 3월부터 5.18 발생 직전까지 2개월 반 동안에 집중적으로 침투되었다. 1979-80의 언론보도 집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들이 있다.

1) 1980년 3월 17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무장공비와 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2) 1980년 3월 23일, 서부전선 9사단 지역 한강하구로 침투하던 공비가 아군에 발각되어 교전하다가 도주했다. 3명의 무장공비를 사살했고, 소음기가 달린 권총과 암호문을 노획했다, 암호문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 전사답게 돌격대답게 싸워라"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3) 1980년 3월 25일, 무장간첩선 1척이 포항만으로 침투하다가 해군에 의해 침몰하여 무장간첩 8명이 사망했다.

4) 1980년 3월 27일, 강원도 15사단 정면에서 남하하던 공비와 교전상황이 발생했다. 모두가 도주했고, 무장공비 1명만 사살했다.

5) 1980년 5월 12일, DMZ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공비와 미군 사이에 또 교전이 발생했다.

6) 1980년 5월 15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미국초소 전방 20m가지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미군과 교전하다가 돌아갔다.

7) 1980년 5월 16일, 전남 보성군 득양면으로 침투한 간첩 1명(이창룡)을 체포했다. 환각제를 다량 소지했다.

남침관련첩보도 입수되었다. 1979년 12월, "1980년 초에 남침을 감행할 것"이라는 첩보를 미국으로부터 입수했고, 같은 시기에 일본 외무성으로부터도 "1980년 1월에 남침할 가능성이 높다"는 첩보를 입수했다(1979.12.25자.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작성한 "북괴대남도발 위협판단").

이것 말고도 남침징후에 대한 첩보가 5건 더 있었다. 마지막으로 1980년 5월 10일, 일본내각조사실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하였다"는 긴급첩보를 입수했다.

"남침 시기는 4월 중순, 김재규 처형시기와 맞물려 있다. 김재규 처형에 따른 항의데모가 절정에 이를 때를 결정적인 시기로 정하였다. 그러나 처형이 지연되자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5.15-5.20 사이에 남침을 하기로 재결정하였다".

이 첩보는 중국 당국이 일본 방위청에 제보한 것이었다.(1980.5.10. 육군본부작성 "북괴남침설 분석")

김일성의 비밀교록에는 김일성이 당시의 간첩들에게 남한에 전민봉기(전국적 봉기)를 지시했다.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의 김일성이 내린 비밀교시
"10·26사태는 결정적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선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 동원하여 전민 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1979년 12월 20일 중앙당 확대간부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비밀교시
"12·12사태는 미제의 조종하에 신 군부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입니다. 계엄사령관 관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남조선 정세가 그만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인민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1980년 5월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비밀교시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일어났습니다. 사북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청년학생, 도시 빈민 할 것 없이 전 민중들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 각층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앞에서는 평화를 내세우고, 뒤에서는 칼을 가는 것이 북한의 생태다. 10.26이라는 호재를 갑자기 맞은 북한은 생리에 따른 위장평화공세부터 폈다. 1979년 12월 20일에 모스코바 올림픽에 남북단일팀으로 참가하자 제의해 왔고, 1980년 1월 11일에는 김종필(공화당총재), 정일권(공화당 상임고문), 김영삼(신민당총재) 양일동(통일당총재) 윤보선(국민연합공동의장) 함석헌(국민은행공동의장) 김대중(국민연합공동의장) 안필수(통사당 위원장) 김철(통사당 고문) 김수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장) 이희성(계엄사령관) 등 11명에게 남북대화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1980년 1월 12일에는 북한총리 이종옥이 신현확 국무총리에 총리회담을 제의해 왔다. 이에 따라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2월 26일부터 열려 5월 15일까지 9차례에 걸쳐 연속됐다.

이 모든 것은 내부교란을 획책하면서 한국의 주요 인물들의 관심을 핵심 분야로부터 이탈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북한은 총리회담을 비롯한 모든 평화공세를 중단해 버렸다. 남한에 권력 진공상태가 발생하자 위장 평화공세를 취하여 남한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어놓고, 남한에 강력한 지휘체계가 확립되자 위장공세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공세를 중단한 것이다.

10.26사태가 발생하자 최규하 대행 정부는 1979년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같은 날 아침 9시에는 최규하 대통령대행이 직접 나서서 "국가비상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통해 국민의 단결을 호소했다. 같은 해 12월, 북한의 남침 정보를 입수한 최규하 대통령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긴급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두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하나는 대규모 육군 기동훈련을 벌여 북한에 무력을 과시하기로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지도층에게 북한의 남침 위협을 알려 협조를 당부하기로 한 것이었다(G-3, '육군위기관리대책').

1980년 1월 21일, 최규하 대행 주재로 '대간첩대책중앙회의'가 열렸다. 최규하 대행은 이 자리에서 "북한은 공작간첩을 통한 정치선동과 무장간첩 남파에 의한 사회불안을 획책할 가능성이 있으니 특히 대공관계자는 불순분자 개입을 사전 방지해 달라"는 지시를 내렸다.

1980년 1월 26일부터 31일가지 경기도 파주에서 보병 2개 사단과 공군을 동원한 대규모 기동훈련을 실시했고, 1월 30일에는 최규하, 김종필, 김영삼 등의 정계인사들과 언론계 및 대학생간부 등 798명에게 기동훈련을 참관케 하여 훈련의 목적을 설명해주었다(G-3, 육군기동훈련).

1980년 4월 3일, 군사정전위 제400차 대회의에서 UN측 대표 '호스테트리' 소장이 북한의 대량 무장 간첩침투 행위에 대해 경고했고, 정부는 5월 17일에 전공무원을 대상으로 비상근무령을 내렸으며,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위컴 사령관을 방문하여 일본내각으로부터 접수한 남침첩보 및 우려사항을 전달했다.

이처럼 1980년 봄은 남침위기와 대량간첩으로 대표되는 매우 불안한 안보의 계절이었지, 민주화의 계절이 아니었다. 재야세력은 박정희를 독재자라 비난하면서 정권타도를 위해 무수한 사건들을 저질렀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이제 박대통령의 시해와 동시에 민주화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이들의 민주화 투쟁은 문약한 최규하 정권의 즉각 퇴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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