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의 집권과 개혁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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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집권과 개혁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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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1 (글 학술 마을지기 을파소 님)

1863년 철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후사가 없이 사망하였으니 다른 왕족 중에서 새로운 왕을 올려야 하는데 이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한 안동 김씨들은 당황한다. 이에 왕위계승권자 결정의 주도권은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빈이었던 신정왕후 조씨, 즉조대비에게 넘어간다.

조대비의 선택은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 조선의 제26대 임금 고종의 즉위였다. 물론 이 뒤에 '상갓집 개'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철저히 파락호 행세를 해오던 흥선군과 조대비의 밀약이 있었다. 고종의 즉위와 함께 흥선군은 대원군으로 봉해지고 왕의 나이가 어린 관계로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하지만 조대비의 명을 받은 대원군이 정사를 처리하게 되고 수렴청정을 거둔 이후 10여년간을 실권을 행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때 대원군은 아무런 관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흔히 이 당시 대원군의 국정운영을 가지고 '섭정'을 하였다.

하지만 섭정이라는 정치용어자체가 조선왕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대원군의 집권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었으며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둔 이후에는 공식적으로는 고종의 친정상태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대원군의 국정장악을 반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시기는 나라 안팎으로 매우 어지러운 시기였다. 오랜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한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해졌으며 이는 고종 즉위 전해 경상도 진주에서 시작된 임술농민봉기를 통하여 표출되었다.

이에 정부는 1세대 개화파로 유명한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고 탐관오리들에 대한 처벌을 하는 등의 조치로 백성들은 무마시켰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당장의 위급함만을 진정시킨 미봉책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되었다. 당연히 일대개혁이 새 정권의 당면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이 우선적으로 신경썼던 것은 인사개혁이다. 60년간 노론계열인 안동김씨가 정권을 독점하고 여기서 파생된 부정부패가 백성들을 괴롭혔으니 그 분위기를 일신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대원군은 그간 소외된 남인과 소론계열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고 임진왜란 이후 그 역할이 국정최고의결기구로까지 올라간 비변사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대신 의정부와 6조의 기능을 부활하고 삼군부를 설치하여, 통치 체제를 국왕 중심으로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임술농민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삼정의 문란을 해결해야 했다. 삼정이라 함은 전정-토지 수확의 일부를 조세로 냄-, 군정-양인 장정이 군역을 대신하여 군포를 냄-, 환곡- 관청의 곡식을 대부받고 그 이자를 부담함-을 가리킨다.

집권 초부터 관심을 보여 온 그는 마침내 집권 4년째인 1867년 환곡 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사창-조선시대 각 지방 면 단위에서 실시하던 곡물 대여 제도-을 실시함으로써 환곡은 원래 갖고 있던 빈민 구제 기능만 담당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집권 8년째인 1871년에는 그 동안 백성들의 숱한 원성을 샀던 군포 제도를 개혁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양반까지도 군역을 부담시키는 호포제를 실시했다. 대원군의 여러 개혁 중에서도 가장 과감했던 것은 서원철폐였다.

당시 서원은 양반들의 교육 및 학문연구만이 아니라 세력의 기반으로도 활용이 되어 많은 땅과 노비를 소유하고도 면세의 대상이 되었다. 당연히 부패가 얽힐 수 밖에 업었다. 이에 대원군은 고종 즉위 후 전국의 서원에 대한 조사 명령을 내려 그들의 죄악상을 고발하도록 한다.

그리고 사사로이 서원을 짓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수많은 서원을 철폐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865년 3월에 이루어진 화양동 서원과 만동묘를 철폐한 것이다. 만동묘는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기리기 위해 우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세워진 것이며 화양동 서원은 송시열을 모시는 서원이었다.

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유지가 짓밟혔으니 큰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서원철폐를 강행하여 1868년에는 사액서원(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설립을 인가하고 지원한 서원)이외의 모든 서원의 철폐를 명령하였으니, 1871년에는 700여 개의 서원 가운데서 47개를 제외하고 모두 문을 닫았다.

이런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대원군은 실추된 왕실의 존엄성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추진하는 것이 경복궁 중건이었다. 대원군은 1865년 중건 사업을 선언한 이래, 병인양요라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 사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어려운 국가 재정과 민중 생활에도 불구하고 이런 역사를 지속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고, 부족한 재원을 모으기 위해 무리한 정책들을 실시하여 민중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100배의 가치를 지닌 당백전을 발행하였으나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폭등하는 등 민중의 생활은 더욱 악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강제기부금인 원납전을 징수하여 원망을 사게 된다. 그리고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노역도 고달픈 것이었다. 대원군이 실시한 각종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대원군의 정책도 근본처방은 되지 못하였으며 특히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의 무리수는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어 결국 호포제 실시와 서원철폐로 인한 반대파의 형성과 함께 그의 몰락의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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