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치 질서로의 개편…태조의 국가 안정화 작업
스크롤 이동 상태바
새로운 정치 질서로의 개편…태조의 국가 안정화 작업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사 이야기 (글 순천)

2. 고려의 시대 구분

고려왕조는 과거 삼국시대에 비해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진보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나, 아직 획기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중세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또,후에 성립되는 조선왕조는 고려왕조에 비해 많은 발전은 있었지만 근대적 요소에까지 이르지 못해서 근대와 중세의 혼합어인 근세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조선시대도 중세로 규정 짓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려시대는 크게 셋또는 넷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태조 왕건과 호족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광종과 성종대를 거치면서 문벌귀족으로 새로이 형성되는데 이를 문벌귀족사회라고 부르며 보통 전기에서 중기까지로 규정 짓습니다.대개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인 인종때 까지를 문벌귀족사회로 보고 있습니다.

다음은 후기로서 무신집권기와 원간섭기가 이에 해당되고 또,말기까지 본다면 공민왕 집권기 부터 그 이후 조선왕조가 성립되는 시기까지 보시면 될 것입니다.

3. 새로운 정치 질서로의 개편과 태조의 국가 안정화 작업

궁예의 전제 왕권의 강화에 불만을 품은 일부 호족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것과 함께 잦은 전쟁과 호족들의 횡포로 인해 혼란에 빠진 국가를 어떻게 안정화 시키느냐가 큰 관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우선시 된 것은 바로 신라 말기에 전국 각처에서 그 지방을 세력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지방 세력가, 이른바 호족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가 정변을 통해 집권한 태조에게 있어서 더 큰 과제였던 것입니다.^

1) 대호족정책

태조는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였으나, 즉위초 일부 친 궁예 세력과 반 태조 세력으로 결집한 호족들의 강한 반발을 받아 한때 큰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는데, 즉위초의 환선길의 역모, 이흔암 역모 고변사건, 충주 호족 진선과 임춘길의 모반, 그리고 명주 호족 김순식의 저항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저항을 가까스로 제압한 태조에게 있어서 이들 호족은 협력없이 새로운 국가를 이끌어 나가기 어려웠다고 보여 졌습니다. 그리하여 태조는 이들에 대하여 적절히 회유하고, 때에 따라서는 강경책을 보이는 등 적절하게 대응해 나갔습니다.

태조의 이러한 정책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회유책으로 혼인정책(婚姻政策)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태조는 무려 29명의 부인을 통해 25남 9녀 라는 어마어마한 자녀를 두었는데, 이는 지방 유력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한 태조의 고육지책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출신을 대략 살펴 보면, 우선 첫째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는 정주의 유력한 호족인 유천궁의 딸이었고, 둘째 부인이자 2대 혜종의 생모인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의 유력한 호족인 오다린군의 딸이었으며, 셋째 부인은 훗날 3대 정종과 4대 광종의 생모로서 신명순성왕후인 유씨로 충주의 유력한 호족 유긍달의 딸이었습니다.

훗날 태조 사후 왕위 계승 분쟁으로 고려 초기의 정국이 시끄러웠던 것은 혜종의 지지세력인 나주 호족과 정종 및 광종의 지지 세력이었던 충주 호족간의 갈등도 그 원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 부인 외에도 태조는 많은 유력 호족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또한, 태조는 잦은 혼인으로 왕실권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이복남매간의 결혼과 같은 근친혼을 장려하기도 하였는데, 왕실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태조의 의도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성정책(賜姓政策)을 꼽을 수 있습니다.

태조는 귀부해 오는 호족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왕씨(王氏) 성과 함께 관직과 일정한 식읍을 하사하였는데, 초기의 학자이자 호족이었던 박유가 사성을 받아 왕유로 개명한 것이라든지, 명주(지금의 강릉) 장군 김순식이 태조에게 스스로 귀부하면서 왕씨 성을 하사 받고 왕순식으로 개명한 것이라든지, 조금 후대인물이었던 청주의 유력 호족 이가도가 왕씨 성을 하사 받아 왕가도라 하였던 것은 모두 이와 같은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특히, 왕순식의 경우는 본래 신라 태종 무열왕의 후예인 김주원의 후손인데, 김주원이 왕위를 잇지 못하고 내물왕계 출신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하자, 명주로 물러나면서 명주군왕에 봉해지고, 명주일대를 식읍으로 받아, 그곳을 기반으로 하여 큰 세력을 형성, 중앙을 위협하여 한때 태조를 근심시켰을 정도(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의 기록)의 강력한 저항세력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태조의 대호족정책은 비단 회유책에만 국한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태조는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를 통해 이 당시 중앙 행정력이 지방에 까지 미치지 못했던 한계를 이 두 제도로 극복하고자 하는 동시에, 호족 세력을 무마하고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사심관제도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935년 항복해 오자, 신라의 옛 서울인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부호장 이하의 관직등에 대한 사무를 보게 하였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 다른 공신이나 호족들도 그 지방의 사심으로 삼게 되면서 널리 시행되었습니다.

또, 기인제도는 지방의 향리 자제를 서울에 볼모로 삼고, 또한 출신지의 일에 대한 고문에 응하도록 하는 제도로서 이것도 호족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태조는 즉위 초에 있었던 진선의 반란등과 같은 무력 저항에는 때에 따라 무력으로 맞서는 강경책을 구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태조의 노력의 결과, 고려 초에는 왕권과 호족 사이의 미묘한 권력관계는 호족연합정권이라는 새로운 지배체제를 낳았으나, 호족 세력이 때에 따라서 왕권을 능가할 만큼 그 저항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대숙청작업이 이루어 지기전까지 고려의 왕들은 여간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조가 이것을 우려하여 재위기간 중에 정계 1권과 계백요서 8편을 저술한 것이나, 후대 왕들에 대한 당부를 담은 훈요 10조가 서술된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2) 태조의 국가 안정화를 위한 여러 작업

태조는 고구려의 뒤를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국호를 고려라 했기 때문에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때문에 태조는 즉위 초부터 이곳에 대하여 줄곧 우대정책을 펴왔는데, 평양의 이름을 서경으로 하여, 수도인 개경 못지 않은 중요지로 삼았다든지, 왕이 직접 서경에 자주 찾았다든지, 말년에 남긴 훈요 십조에 서경을 중시하여 왕이 수십일간 머무르도록 당부한다든지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태조의 서경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습니다.

태조는 이러한 서경 경영을 통해 고구려의 계승의식을 통한 북진정책을 꾀하는 한편, 고려왕실의 독자적 세력기반 육성과 함께 때에 따라 호족까지 견제하려는 방책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태조는 창업군주이자, 탁월한 정치력을 소유한 지도자답게 민심 수습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자주 순행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살핀다든지, 혹은 세금 감면이나, 부역의 경감등을 통해 백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함으로서 백성들을 국가의 일원으로 끌어들여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태조는 민족융합정책의 일환으로서 926년 발해가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여 그 유민들이 이주해 내려오자, 따뜻하게 우대하여 (발해국의 왕세자였던 대광현에게 왕씨성을 내리고 이름을 내려줌) 한 민족으로서의 동질감을 불어 넣었으며, 고구려 계승의식차원에서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서경을 중시한 것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하지만,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서는 적대정책을 펴서 한때 거란의 사신을 유배보내고, 선물로 보내온 낙타 50필을 굶겨 죽였을 뿐만 아니라 훈요 십조에 후대왕들에게 거란에 대해서는 야만에 가까운 나라이므로,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면서 주의를 당부할 정도로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냈습니다.

태조의 북진정책은 단순히 고구려의 고토회복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변경지대에 대한 국토 개발, 혹은 고려적 농업사회의 확대와 그에 따른 이민정책등 여러 목적이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북진정책의 결과 태조 말엽에는 고려의 국경이 청천강까지 확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조의 여러 가지 노력의 결과, 고려왕조는 국초의 혼돈되었던 상황을 수습하여 안정된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차츰 발전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만, 주의를 기울여 신중하게 추진한 호족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어서 그 당시의 태조는 호족연합정권의 대표자로서의 지위에 불과했을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다음에 왕위를 계승하는 후계자에게 해결되어야 할 중대할 과제로 넘겨졌고, 후일 즉위하는 혜종이나 정종은 이것을 해결하려 하다가 오히려 호족들간의 갈등을 촉발, 왕위를 둘러싼 내분으로 이어지게 되어 끝내 해결짓지 못하고, 그 다음 왕인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대숙청작업이 있고 나서야 해결을 짓게 됩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기획특집
가장많이본 기사
칼럼/수첩/발언대/인터뷰
방송뉴스 포토뉴스
오피니언  
연재코너  
지역뉴스
공지사항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뉴스타운TV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