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변화와 사회적 순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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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변화와 사회적 순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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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주체조차 햇갈린 어리석을 벗어야

1) 세상의 주체(주인)를 분명히 해야

세상과 진리(이치)는 누가 만들었는가? 물론 종교마다 다르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를 위해 일단 "조물주"로 통칭한다.

그럼 과연 '인간'이 세상과 진리의 주체(주인)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은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신앙(믿음)이 중요하다. 세상과 인간 존재의 실체, 담겨진 의미, 향후 계획은 오직 조물주만이 알고 있다.

따라서 조물주는 전 인류를 혼자 상대할 수도 있고 미래에 태어날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조물주의 은혜를 느끼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부단히 뉘우치고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이 교회 목사라고 가정해보자. 마침 자녀의 학교를 방문해서 교장과 담임 선생과 대화하던 중 불량 학생들을 위해 봉사해줄 것을 요청 받았다고 해보자.

이 때 중요한 것은 가르쳐야 할 학생들 수에 따라서 가르치는 방법이 달라질 것이다. 첫째, 학생들이 강당 안에 가득하면 세상 이치나 인간 삶에 대한 전반을 이야기할 것이다. 둘째, 학생들이 교실에 있다면 질문을 주고받거나 일부와는 대화도 가능할 것이다. 셋째, 대상 학생이 극소수라면 그 아이가 태어난 환경과 성장 과정 등을 세부적으로 파악하며 훨씬 깊이 있는 상담을 진행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 아무리 좋은 진리가 있더라도,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라 할지라도 다수를 상대하려면 일반론적인 이야기나 수박 겉 핥기 식 관계밖에는 할 수 없다.

특히 개인적인 성격과 환경과 수준과 관심사와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방법, 실천하는 과정에서 겪는 개별적 경험과 어려움에 대한 상담과 대화, 수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다단계적인 측정과 구체적인 예정들은 다수를 상대할 경우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cs

일년 간 함께 얼굴을 대하는 교사들도 한꺼번에 50-60명을 상대할 경우 교육다운 교육이 어려움은 물론이고 개별 지도나 상담은 어렵다고 한다. 만일 여러분이 교사라고 했을 때 학생들의 인성교육까지 신경 쓰고 싶다면 가급적 적은 인원을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특히 학생 각자의 환경과 수준에 맞추어서 다양한 질문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할애해주려면 비록 몇 사람을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훌륭한 선생일지라도 환경, 관심사, 지능, 성격, 노력이 천차만별인 학생들을 모두 한 자리에 앉혀두고 똑같은 주제와 수준으로 상대하는 것은 오히려 반 교육적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처럼 형식적이고,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의 문제점과 부작용들이 집중적으로 지적되어왔다.
이렇게 실질적인 논리로 살펴보면 진리든, 공부든, 상담이든 내용에 충실하려고 하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으로 생각한다면 다수를 상대하기가 무척 부담스럽다. 그런데 종교는 왜 엄청난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가?

성전을 찾아오는 고달프고 고통스럽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사연을 진심으로 받아주고 달래주고 상담해주고 어린양을 책임져주기 위함인가?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면 모을수록 진실하게 관계할 기회는 줄어든다. 이는 각자의 생각과 수준과 환경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대화를 통해서 서로 계속 발전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부처든, 예수든 한 명의 어린 양(중생)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따라서 인간은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개인적인 접촉(상호 이해, 진실한 대화, 사려 깊은 배려, 극진한 보살핌, 진지한 대화 등)이 반드시 우선되어야 한다. 이는 인간의 관계에서 필수적인 내용이다. 하물며 진리의 주체가 아니고 겨우 진리를 전달하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의무에 무조건 충실해야 한다.

설사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 할지라도 다양한 입장의 제자들을 방치하거나, 적극적으로 대책을 마련하지 않거나,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이나 진리만 되풀이한다면 아주 잘못된 것이다. 만일 학원 강사처럼 영어나 수학을 가르치고 돈을 받는 입장이라면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교환될 계약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에서 죄를 짓거나, 고통받고 가엾은 어린양(중생)들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과 노력 없이 다수를 몽땅 모아놓고 세상 진리를 거론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만일 진리가 그렇게 얄팍한 수준이었다면 당초에 죄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교회(성당, 절)를 찾아서 한번 용서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도, 교회를 찾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목회자(스님)들이 "가엾은 어린양(중생)과 죄 많은 죄인"을 입으로 거론하면서도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들과 깊이 접촉하지 않고 있다면 그들이 오히려 죄인과 어린양(중생)의 은혜를 입는 꼴이 된다.

세상이나 사회 전반이 아름다워지는 것도 아닌데 교회(성당, 절) 건물은 엄청나게 거대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오늘날의 엄청난 건물들은 진리를 등에 업은 사람들이 진리 자체의 발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죄악이나 어리석음이나 두려움을 먹고 성장한 측면이 크다.

또한 인간이 믿는 진리든 신앙이든 절대적 진리 자체이거나 진리의 모든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끼리 서로 교감을 나누고, 서로 관심을 기울여주고, 서로 대화를 나누고, 진심으로 실천하고, 전혀 관계없는 이웃을 돕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처럼 인생의 과정을 함께 나눔으로써 자기 가치와 인생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와 나눔의 가치가 서로 맞아떨어지고 전체적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진리가 존재한 이유이며 고귀함이며 보람이다. 이런 과정에 충실해야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며,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서로가 은혜를 주고받음으로써 아름다운 사랑을 세상에서 확산시킬 수 있다.

인간이 큰집을 짓는 것은 사람들을 많이 불러모으기 위함이지 어린양(중생)들과 마음과 시간을 함께 나누며 생활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는 조물주를 등에 업고 기업의 사장처럼 외형적으로 크게 입신양명하려는 건물의 주인인지도 모른다.

종교는 복잡한 현실(고통과 불행과 방황과 좌절과 외로움)에 발판을 두고 있다. 그런데 만일 종교가 사후를 위주로 일관한다면 진리나 이치로만 발전해야 하며 건물을 크게 지으면 안 된다. 만일 현실의 평화나 행복에도 의미를 둔다면 양적인 성장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의식과 생활과 발전 등 개별적인 변화와 질적 성장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이처럼 진리의 주체가 누구인지조차 흐릿하기 때문에 건물을 지어서 세습까지 하는 등 결국 타락한 인간의 본능을 위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그래도 인간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조상을 섬기며 과거에 치중하거나, 비현실적인 사후에 집착해서 습관화된 나머지 개인의 잠재력과 사회적 잠재력을 동시에 소멸시키고 있다. 과거(조상 모시기)나 신앙(미래)은 현실에 최선을 다한 다음 여유 분으로 의미를 찾고 준비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해야만 현실적인 발전이 가능해지며 종교가 현실을 위한 영양제와 비료 역할도 하게 된다.

왕권주의에서는 왕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신권주의에서는 신을 빙자한 인간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큰 건물을 지어놓고 신을 등에 지고 자신이 건물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더구나 부자 세습까지 하는 것은 당사자도 문제지만 그를 따르거나 모른 척 해주는 사람들도 문제다.

사례 1) 함께 동행하는 진리

테니스에는 이론이 있고 기술이 있다. 그리고 테니스에는 규정과 규칙도 있다. 테니스를 잘 치기 위해서는 이론을 잘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기술과 규정과 규칙과 연습에 의해 천차만별로 실력이 나뉘어진다.

테니스를 치려는 사람은 눈과 귀로 테니스 기술을 아무리 많이 듣고 보아도 잘 쳐지는 것은 아니다. 기술이나 규정을 배운 사람은 코치의 교습을 통해서 자세를 교정하고 익숙해지도록 계속 훈련해야 한다.

한 명의 선수가 배출되기까지는 배우는 사람만이 아니라 가르치는 코치도 열심히 땀을 흘려야 한다. 코치는 가만히 앉은 채 입으로만 가르치면 헛일이다. 만일 입으로만 가르칠 수 있다면 한꺼번에 백 명이나 천 명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배운 사람들은 실전에서는 엉망이 되고 만다.

세상에는 진리가 있다. 그런데 진리를 입으로 아무리 설명하고 반복해서 강조해도 그냥 읽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진리를 믿거나 찾고자 하는 사람의 수준과 생활과 자세에 맞추어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방법으로 서로 묻고 답하고 상담하고 변화되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한다.

이처럼 스승과 제자가 지속적인 관계와 발전을 함께 하면서 일련의 과정을 공유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 충실해야만 믿는 자나 가르치는 자나 똑같은 인간으로서 서로의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와 세상의 발전까지 연결 지어갈 수 있다.

한꺼번에 수천 수만 명을 모아놓고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지이며 진리를 타락으로 이끄는 행위다. 왜냐하면 진리와 현실과 세상과 인간들이 제각기 따로 놀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례 2) 뉴턴과 부처는 한 명으로 충분하다

스승 : 네 이놈. 열심히 정진하라고 그토록 타일렀거늘 또 게으름을 피우느냐.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깨우침을 얻을 것 아니냐?
제자 : 스승님.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스승 : 어허. 이놈 말하는 것 좀 보소. 이놈아 배를 땅에 대고 어영부영 하면서 열심히 정진을 한다니.
제자 : 스승님.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스승 : 이놈이 요즘은 내 말을 막아버리는가 하면 엉뚱한 곳으로 화제를 돌리고 네 놈 마음대로 하더구나. 좋다 네가 질문을 하겠다고 말했으니 물어보아라. 그리고 질문다운 질문이 아닐 경우에는 한꺼번에 모아서 곱절로 대가를 치러주겠다.
제자 : 부처가 되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스승 :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이런 놈을 제자로 키우고 있다니......
제자 : 스승님은 뉴턴을 알고 계십니까.

스승 : 그래 만유인력의 뉴턴을 말하느냐.
제자 : 그렇습니다. 만일 제가 뉴턴과 같은 과학자가 되기 위해 사과나무 아래 누워서 사과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뉴턴의 흉내를 내고 있다면 뉴턴이나 과학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스승 : 허허 이놈이. 정말 진리를 마치 장난말하는 것처럼 쉽고 간단하게 표현하는구나. 너는 그간에 적당히 빈둥대는 것 같았는데 언제 그렇게 대단한 생각까지 했느냐.
제자 : 뉴턴은 누군가가 시키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지 않고서도 스스로 만유인력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과학자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과나무 아래로 가서 누워있다면 되겠습니까?

스승 : 어허. 그래 네 놈 말이 일리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진리구나. 그래서 열심히 정진하기 싫다는 이야기냐 아니면 배를 바닥에 대고 뒹굴면서 수행하겠다는 것이냐.
제자 : 어떤 하나의 자세나 행위나 격식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아주시라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바른 자세를 강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강요하면서 "이놈아 저놈아"라고 욕까지 하신다면 도를 닦는 수행자가 일반인보다 훨씬 못한 취급을 받는 꼴 아닙니까.

스승 : 그래. 내가 네 놈을 아예 내 상전으로 모시든지 해야겠다.
제자 :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정진하신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스승 : 음. 20살에 들어와서 35년이 되었구나.
제자 : 그럼. 스승님께서는 앞으로 언제까지 도를 닦으실 것이며 언제쯤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승 :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느냐. 그런 생각 역시 욕심이고 번뇌고 잡념이니라. 네가 좀 가르쳐주렴.
제자 : 정확하게 모르신다면 지금부터는 저에게 수양의 형식이나 방법이나 자세를 강요하지 말아주십시요. 스승님은 자기 자신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간섭하려고 하십니까.

스승 : 절 보기 싫으면 네가 떠나면 될 것 아니냐. 아주 네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구나.
제자 : 절을 보기 싫으면 떠나든 말든 그것은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쫓겨난 것도 아니고 절을 떠날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절을 보기 싫고, 절을 떠나는 것은 지금의 화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스승님께서는 제가 말하는 주제는 벗어나시면서 제가 생각해보지도 않은 절을 떠나는 것까지 앞서 나가십니까.

스승 : 내가 네놈을 데려온 것이 이렇게 뿌듯한 것은 처음이다. 네놈 말 한마디 한마디가 큰스님 못지 않구나.
제자 : 큰스님이나 다른 수도자들이 들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스승 : 이놈아. 네놈 걱정이나 해라. 내가 어디 못할 말을 했냐?
제자 : 그럼 제가 오늘 드린 말씀도 스승님께서 너그럽게 이해해주신다는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 : 아니. 이놈이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하는 놈 아니냐. 아니면 알면서도 교활하게 능청을 떠는 놈 아니냐. 내가 오늘 너를 이해해주는 입장이 아니라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이야기다.
제자 : 스승님. 제자나 스승이라는 의미나 관계는 임시 사람들이 정해놓은 현상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계에 별다른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니 스승과 제자라는 형식은 일단 마음을 접어두시지요.

스승 : 오냐. 그래 알았다. 그래도 체면이라도 챙겨주니 고맙게 여기겠다.
제자 : 스승님. 그런데 왜 제가 여쭈었던 질문에 답을 안 해주시는지요.

스승 : 무슨 말이냐.
제자 : 제가 "부처가 되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라고 여쭤보았습니다.

스승 : 상식으로 이야기 해주길 바라느냐. 화두를 던진 것이냐. 부처가 되면 모든 고통과 고민과 번뇌가 없어지고 해탈을 하는 것 아니겠냐.
제자 : 스승님. 이 세상에 뉴턴은 뉴턴 한 사람으로 족합니다. 똑같은 뉴턴이 또 나와도 세상에 도움되는 것도 없으며 세상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부처는 부처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삶을 통해서 세상과 사회와 인간에게 공헌하며 가치를 발휘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연하게 부처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 목적일 뿐 세상이나 사회나 인간이나 미래에 아무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사람들이 부처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가 출가한, 도를 깨우친, 세상에 다시 나온 목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5천 년이 더 지나도 부처는 다시 나오지 않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부처 역시 오직 부처였을 뿐 저쪽 동네에 사는 바보 멍청이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오직 자기일 뿐 바보든 부처든 똑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부처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직 자기 자신의 독존적인 삶을 통해서 가치를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끝내고 더 이상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상황과 과정을 살피면서 말을 하도록 할 것입니다.

스승 : 음. 너는 중생들이 말하는 부처가 아니라 네 스스로 이미 부처가 되었구나.
제자 : 스승님. 나는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존엄한 나이지 부처가 된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부처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은 부처가 아닌 사람은 누구도 상대방이 부처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거의 허상이나 다름없는 부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부처와는 전혀 관계없이 어리석은 사람들과 그 어리석음을 이용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만 부지기수로 생겨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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