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나는 완전한 바보는 아니다. 그래서 나 나름의 단점을 극복하려고 노력을 한다. 비결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면도는 항상 아침에 메일을 확인하면서 한다. 그리고 항상 컴퓨터 위에 올려놓는다. 자동차 열쇄는 저녁에 바지를 평상복으로 갈아입을 때, 내일 입을 바지에 미리 옮겨놓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규칙적인 생활습관마저도 잊어버릴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이다. 생활이 흐트러지면 꼭 문제가 발생한다. 손님이 찾아올 때 집 청소를 하다보면, 면도기를 내손으로 옮겨놓고도 어디에 뒀는지 알지를 못한다.
내일 입을 바지는 항상 오른쪽으로 돌려서 표를 해 놓는데, 저녁에 바쁜 일이 있어서 모든 것을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 다음날 무슨 바지를 입으려고 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흐흐- 그러나 나는 그만한 것으로 당황하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항상 비상상황에 대비한다. 예전에 쓰다가 낡아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면도기를 책상 서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 우선 그것을 사용하고 저녁에 천천히 면도기를 찾을 수 있다.
도무지 자동차 키를 찾지를 못하겠으면, 내가 제일 아끼는 양복 안주머니를 뒤지면 된다. 그 속에 카피를 뜬 비상용 열쇄가 자신을 찾아줄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항상 나는 꼼꼼하게 메모를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도 직원에게 언제가 되면 이것 이것을 나한테 이야기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집 전화번호도 당연히 못 외우지만 전화기의 단축버튼을 사용하면 된다. 1번은 우리 집이다. 2번 부모님이 계신 곳, 3번은 처갓집, 4번은 할머님이 사시는 곳이다.^
정작 나의 문제가 드러나는 것은 이렇게 짜여진 생활을 벋어나는 순간이다. 그때 나는 정말 고아와 같이 무방비 상태에 놓여버린다. 토요일 어디엔가 가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총명한 직원은 아침과 퇴근 시에 정확하게 두 번 오늘의 행선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나의 이런 용의주도함 덕분에 직장을 나서면서 나는 다시 한번 그 사이에 잊어버렸던 행선지를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용감하게 약속장소를 찾아가면서 끝없는 자부심에 빠진다. 그렇다. 세상은 준비하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 제 머리만 믿고 용감하게 달려가는 사람보다는, 나처럼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면서 그 단점을 보완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수많은 정보를 머리속이 아니라 직원들의 노트 속에 체계적으로 잘 분류하고,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맞출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까지 생각이 미치다가 나는 그만 이상한 의문에 빠져버렸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갈아탄 것은 틀림이 없는데, 오늘 내가 가야할 곳이 어디였던가?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핸드폰을 꺼내본다. 직원들의 번호도 입력하라고 하긴 했는데, 직원들의 단축키는 몇 번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연상 법을 써본다. 아마도 학술회의일 것이다. 최근에 내가 관심을 가졌던 학술행사에 대해 차례차례로 생각을 떠올려본다. 도대체 오늘 내가 어디에 가려고 길을 나선 것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에이-’ 이왕 나선 김에 서점에나 들렀다가 가자. 그래서 나는 지하철을 내려 반대편 열차를 탄다. 그리고는 나의 한심함에 대해 한참 투덜거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꾼다. 아니다. 내 자신을 탓할 일이 아니다. 이 나쁜 기억력을 가지고도 그래도 대학도 졸업하고 자격증도 따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나는 참 훌륭한 사람이다. 나야말로 의지의 한국인이다.
나처럼 나쁜 기억력으로 나만큼 이 험한 세상을 헤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를 탓할 일이 아니다. 오늘은 소중한 오후를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하자.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다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낀다. ‘아이고 망했다.’ 지금 나는 서점과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각하며 지하철을 내렸던 바로 그곳이 서점입구로 통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나는 도무지 왜 이 모양일까? 방금까지 내 가슴에 가득하던 자부심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간다. 물론 내가 운전을 한다. 내가 모든 면에서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다. 메모리 성능은 떨어지지만, 공간 감각은 뛰어나다. 그래서 길 찾는 것은 초행길이라도 세인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어떤 길은 갈 때마다 틀리게 간다. 길에도 공간 감각이 좌우하는 곳과 기억력이 좌우하는 곳이 있는가 보다.
아내가 말한다. “스톱!” 나는 스톱을 한다. “우회전을 하야지!” 나는 우회전을 한다. 그리고 변명을 한다. 이 길만은 내가 잘 안 외워지는 것 알지? “그래서 그게 자랑이우?” “자랑이란 게 아니라 때로는 기억을 잘 못 할 때가 있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바보지.” “아니 기억을 못할 때도 있다고 양해를 구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뻔히 그 길을 모를 걸 알면서 좀 더 미리 그곳에서 우회전을 하라고 말하지 못한 내가 바보란 거지!”
그래 오늘은 아내가 참으로 옳은 말을 한다. 남편이 번번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할 때는 실수를 탓할 것이 아니라, 충고를 해 주어야 하는 게 옳은 일이다. 그게 바로 부부가 아니겠는가. 암 그렇고 말고.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
“스톱!” 또 아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린다. 우회전인데 신호도 안보고 직진을 하려고 하면 어떡해요. 아내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다. 이건 충고를 하는 것일까. 탓을 하는 것일까? 중요한 의문이지만 아무래도 조금 후에 생각해 보아야겠다. 이러다간 오늘 정말 사고를 낼 것만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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