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적인 너무나 중립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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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적인 너무나 중립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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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심판의 기준은 어디에

청렴결백의 표상 황희정승에 대한 전해 내려오는 일화 중에 ‘고무줄노비판결’에 대한 내용은 인간존중에 대한 교훈쯤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일화가 사실이라면 웃어넘길 일을 분명 아니고, 그분의 명성에 누가 되진 않는다면 절대권력자의 또 다른 얼굴의 권력행사라고도 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하루는 황희 정승 집의 두 종복이 몹시 싸웠다. 서재에서 책을 읽던 황희정승이 나와서 종들에게 각각 싸우는 이유를 물었다. 정승은 한 종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래, 네 말이 옳구나.”하며 또 다른 한 명의 종의 사정을 듣고, “그래 네 말도 옳구나!”하였다. 이를 방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정승의 부인이 쫓아 나와, “그런 판단은 말도 안 됩니다. 대체 누구 말이 옳다는 겝니까? 양반이 체통도 없이…”하고 노발대발하자 황희 정승은 껄껄 웃으며, “듣고 보니 부인의 말도 맞구려.” 하였다는 숨은 이야기.

나랏일과 글읽기에 바쁜 그에게 노비들이 다투는 이유와 부인의 비아냥거림은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는 추측은 억측일까? 그는 소란을 일소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싸우는 이유를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중립적인 심판은 그가 정승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 당시 노비가 양반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는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정승이 ‘둘 다 옳다’는 판결 이후에 시시비비를 가릴 간큰 노비가 있겠는가. 누구의 편을 들지 않고도 뜻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사는 일은 오죽 편하랴. 다툼이란 없겠다. 전쟁도 없겠다.

황희 정승처럼 어느 쪽의 기분도 건드리지 않고도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황희는 고려가 망하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신하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두문동에 들어간 신화 중의 한 명이다. 그러나 그 중의 젊고 유능한 한 사람은 조선의 신하가 되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여졌다. 황희가 그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태조 이성계부터 세종에까지 내리 이어지는 충신으로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그가 4대에 걸친 정치 바람을 이겨내고 청백리의 표상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대세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 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었고, 중대사가 아닌 일에는 중립을 유지할 수 있는 곧은 심지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42세에 태종의 지신사(비서실장)의 자리에 올라, 68세가 되어 세종 대에는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황희는 도려낼 사람과 심을 사람을 확실하게 천거하였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중립적인 발언은 자신이 월등히 나은 위치에 있을 때나 가능할 것이다. 눈칫밥을 먹어본 사회인이라면 묵시로 정해놓은 서열논리가 노비문서보다도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자기 주장의 시대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널린 시대이다. 하지만 이 주장과 기회는 애석하게도 착각이다. 이미 결론이 서 있는 일로 토론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 서열의 기준은 주머니 속 지갑의 무게의 의해서, 출근하여 앉는 책상의 위치에 따라서, 출신 학교의 교문 높이 등이 있다. 이 기준에 부합되는 자는 중립의 위대한 힘을 여지없이 발휘해도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묵시로 전해진다.

나는 친목모임에서 참여와 협조를 강구하는 글을 온라인상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모임에서 간부도 아니고 그냥 모든 간부회원들과 평회원들의 얼굴을 두루 아는 정도라서 중간자적 역할을 하기에 내가 적격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임 사상 최대의 논란거리를 만들고 말았다. 내 글 아래 달린 댓글들은 내 의견을 언덕삼아 간부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중간과 중립의 차이는 확연하다. 중립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중간과는 엄연히 다르다.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은 감히 맞설 자가 없을 정도의 위치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내 글은 평소 이 모임과 운영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다. 그런데 단합과 침목을 위해서 글의 게제를 은근히 종용했던 운영진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한 명도 댓글을 달지 않았다. 내가 올린 희생양 글의 조회 회수는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시로 들락거리며 반응을 지켜보는 실세들이 이루어 놓은 기록이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며 그저 지켜만 보았다.

결국 나는 중립의 힘에 대한 묘안을 터득하지 못하여 실세와 피라미들의 중간에서 죽사발이 되도록 얻어터졌다.

어쩌면 중립은 중용과 더불어 가장 최상의 위치의 개념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의견이 분분해도 결국 표면적으로 가장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자의 뜻에 따라 결정이 되기 마련이다. 이성적인 것이 이성 없는 것에서, 논리가 비논리에서,이타적인 삶이 이기주의에서,진리가 오류들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어느 집단이나 모임에서건 이성적이고 이타적인 논리를 내세우는 이를 기대하기보다는 중립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대한다. 그 중립적인 힘은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다. 중립의 힘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이성적이고, 이타적이고, 논리적으로 발휘되기도 한다.

나는 청백리의 대표 주자인 황희가 소나무의 가지도 번쩍 들게 할 수 있는 정승이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누가 감히 정승의 중립적인 판결을 저울질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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