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는 이렇게 맑고 투명한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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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는 이렇게 맑고 투명한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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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소주잔을 보며 하던 말

선배는 고개를 젖히지도 않고 간단한 손놀림으로 잔을 뒤집으며 또 한잔을 비웠다. 중국집 이층 조그만 방에는 쓰러진 소주병들이 널려있었다. 오늘 선배가 조금 많이 마시고 있다.

학생회지 편집에 간섭이 들어온 때문이다. 후배들도 씁쓸한 마음과 억울한 마음은 여전하다. 모두가 기분이 상해있었다. 항상 듬직하게 우리를 이끌어온 선배의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는데 선배는 아무 말 없이 연거푸 술잔만 비우고 있다. 하긴 선배라고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이라곤 서글픈 넑두리 밖에 더 있을까.

평소 잔소리가 많았던 선배였다. 후배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가지고 품평을 하기를 좋아했다. 문예부장이며 음악 감상회의 고참이기도 한 그는 항상 맨 뒷자리에 기대어 지긋이 눈을 감고 음악을 듣다가, 후배들이 음악에 대한 해설을 하면 충고를 하곤 했었다. 후배들이 오늘 감상한 음악작곡가의 연혁과 음악과 관련된 사항들을 이야기할 때 터져 나오는 선배의 말은 항상 “네 느낌을 이야기 해봐!” 였다.

그렇게 다소 고압적이면서, 항상 정곡을 잘 찌르곤 하던 선배였다. 당시 우리들의 눈에는 예리함과 날카로움의 상징이었고 올 곳은 삶을 향한 날선 창과 같은 존재였었다. 막힘이 없는 해박함과 후배들에 대한 다스함으로 항상 충만해 있던 그 선배는 그날은 그저 잔만 비우고 있었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치 입에다 던져 넣는 듯한 느낌을 주며 술을 마시던 그날. 선배는 아무에게도 술을 따르지 못하게 했다. 침묵 속에서 그리고 가끔씩 씰룩거리는 자조적인 웃음 속에서, 그는 그저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는 또 한잔의 술을 비우고, 또 한잔의 술을 빈 잔을 채웠다. 그리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소주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선배의 입에서 희미한 중얼거림처럼 말이 새어져 나왔다.

“소주는 이렇게 말고 투명한데 말이야...”

선배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선배의 그 다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떤가”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살며시 선배에게 대답했다. 마음속으로. 나도 한잔의 투명한 술을 목젖 너머로 넘기면서.

“선배는 잘 살고 있어요. 소주 못지않게 맑고 투명하게, 아주 열심히 살고 있어요.”

글쎄 내 마음속으로 한 그 말이 선배의 마음에 들렸을까. 그제까지 혼자서 술을 마시던 선배가 갑자기 나에게 잔을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잔을 삼키고 선배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그날 우리는 꽤 많은 술을 마셨던 것 같았다.

나는 학창시절을 통 털어 외박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날은 외박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선배의 집에서 자고 있었다. 얼마나 속이 괴로웠던지 밤새 괴로움에 뒹굴면서 잠에 들었다 깼다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렇게 밤을 보내면서도 울분은 가시지 않았다. 쓰러오는 속과 타오르는 울분에 그날 밤은 참으로 길고도 길었다.

어쩐지 옆에서 같이 신음하고 있던 선배의 기척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문득 눈을 떠보니 선배가 자리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문 밖. 선배는 그곳에 서서 말없이 동이 터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애국가였다.

애국가가 그렇게 쓸쓸한 노래인줄은 그날 처음 알았다.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취해도 가라않지 않는 슬픔이 엉망으로 가슴에서 솟구쳐 오를 때. 소주처럼 맑고 투명한 삶을 살고 싶어 하던 한 사나이는, 새벽 아침이 밝아올 때 그렇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애국가를 부르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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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슬 2003-08-03 10:18:36
이젠 여기와서 기사 읽어야 하는군요.
평안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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