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도시, 규모에 있어선 작지 않지만, 내가 꿈꾸던 꿈을 이룰 수는 없었던, 그 도시를 이제 곧 떠날 것이다. 책방 한구석에서, 골목 귀퉁이에서 그곳에 대한 소문을 들으며 꿈꾸어오던 서울. 세상의 모든 것이 모인다는 곳. 나는 이제 그곳에서 나의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순간을 위해 참으로 많은 시간들을 기다려왔다.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쌓았다.
준비의 기간은 무척 길고 지루했었다. 길고 지루하던 그 준비는 이제 끝났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만이 남은 것이다. 밋밋한 하루가 지난 저녁. 약해져 가는 저녁햇살처럼 그냥 스러져 가는 삶이 아니라, 모든 순간을 숨이 콱콱 막히는 긴장으로만 가득 채워가고 싶었다. 싱싱하게 몸부림쳐 뛰어오르는 물고기처럼, 생명으로 전율하며 이 세상이란 바다를 헤쳐가고 싶었다. 삶은 허비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날 밤 나는 후배들이 꼽아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오른쪽 가슴에 그대로 꼽은 채 길을 걸었다. 서울. 그 먼 곳에서 간간히 흘러나오는 문화의 한 조각을 훔쳐보려고 수없이 다녀보았던 화랑가, 연극이 열리는 카페와 음악다방이 모여 있는 조그만 골목을 지나 도심의 반대편에 있는 학교의 도서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감동을 느끼는 순간마다, 답답함에 숨이 막히던 순간마다 무어라고 휘갈겨 적었던 비망록의 마지막 장을 열었다.
그리고 낡은 노트로 만들어진 비망록의 마지막 페이지에 조그만 글을 남겼다. 오늘 긴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그 비망록을 읽어본다. 가슴이 저려온다. 나는 그 순간 그토록 절절하게 맹세한 그것들을 얼마나 이루었던가. 지금은 그토록 뜨거웠던 감동의 얼마를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얼마나 더 많은 부끄러움을 내 삶에 쌓아두었는가.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날의 비망록을 소개 한다.
유성이 지나가는 것처럼
이제 곧 봄이 올 것이다. 긴 겨울이 끝나고 마침내 봄이 오면 개나리꽃은 봉우리를 터트려 노란 꽃을 피울 것이다. 나는 그 개나리꽃의 환한 열망처럼 앞으로 다가올 삶을 그렇게 뜨겁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타오르는 유성처럼 인생을 스쳐갈 것이다. 환한 빛으로 타오르며 아무런 미련도, 아무런 후회를 남기지 않고 그냥 빛으로 환하게 타오르다 스러져갈 것이다.
이제 시간은 왔다. 긴 기다림의 끝에 마침내 도달했다. 마침내 불타오를 시간이다. 조그맣고 환하게 빛나며, 맑고 깨끗하게 타오르고 싶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싶다. 티끌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김없이,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고. 그저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뜨겁게 타오르고만 싶다.
지나온 내 삶의 순간들을 노려보면서, 의미로움으로 가득하지 못했던 모든 순간들을 날카롭게 지워버릴 것이다. 내 삶의 뜨거웠던 모든 순간들로 내 기억 속에 자익하고, 아름다운 몸짓만으로 내 삶을 가득 채워두고 싶었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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