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피아노 소리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피아노는 무뚝뚝한 악기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 악기 중에서 피아노를 좋아한다. 그 둔탁하고 아름답지 않은 음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합을 해서 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현악기를 보라. 나는 그 과장된 음의 떨림이 싫다. 피아노의 정직함이 마음에 든다. 딱딱 끊어지는 무뚝뚝함이 피아노 소리의 근본이 아니었던가. 짤막짤막한 음을 기하학적으로 쌓아올리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피아노 소리의 아름다움은, 내가 바로크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한 것이다.
같은 타악기라도 부드럽고 길게 울리는 북소리나, 실로폰의 명료하고 맑은 소리에 피아노 소리를 비교 할 수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피아노란 악기는 그렇게 태생적으로 철학적인 의미를 타고났다.
내가 쇼팽의 음악을 아름다워 하면서도 왠지 가슴깊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도 그런 것이다. 그는 규율이 잡힌 논리적인 악기인 피아노로 시를 읊어 대지 않았던가. 그는 피아노를 서정이 담뿍 담긴 악기로 만든 천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아노란 악기의 개성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나는 내가 예술가가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내가 음악을 배웠다면 음악이 나를 규정했을 것이다. 내가 음악이 싫어져도 죽어라고 음악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미술가가 되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그토록 예술가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었던 나 자신을 위로하곤 했었다. 신은 왜 나에게 예술적 감성만 주었고 예술적 재능은 주지 않았나하고 원망을 하던 중, 나는 그 생각에서 구원을 얻었다. 나는 재능은 없되 감성은 있다. 그래서 나는 미술인, 음악인이 아니라 자유로운 예술인이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규정했다.
자유. 나는 재능이 없으므로 구속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다른 전공으로 삶을 살고, 여유에 예술을 즐긴다. 그래서 자유로울 수 있다. 나는 자유가 좋았다. 별로 구속받아 보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자유를 절실하게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놈의 자유란 것은 내 마음을 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가 한대수의 ‘바람과 나’ 였다. “끝- 끝없는 바람. 저 언덕너머 무-울결같이 춤추던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 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히피풍의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서 나는 그 노래가 마음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란 것을 느낀다.
기괴한 창법의 그 노래도 사실은 그 노래가 규정한 음격한 규율에 따라 진행된 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는 노래도 규칙과 질서에 의하지 않으면 깊은 울림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한대수를 좋아하는가 보다.
지난 토요일 우연한 기회에 술을 대작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 날 많은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술을 마시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평소 나는 술을 마시면서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일이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그날은 술친구도 좋아서였기도 했지만, 요즘은 내가 마음이 좀 슬퍼서 자제심이 떨어졌는가 보다.
다음날 아침, 나는 정시에 일어나서 교회에 갔다.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성가대 연습을 다 마치고, 예배를 마친 후, 집에 와서 뻗었다. 그렇게 자유로움과 규율을 동시에 사랑한다. 규율과 자유. 둘 중 하나가 부족하면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것이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내가 피아노를 좋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아름다운 피아노곡을 만드는 요소는 하나하나 똑똑 끊어지는 무뚝뚝한 음들의 연속이다. 내 삶도 멀리서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피아노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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