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도 수다를 떨 수 있다.’ 그런가? 하긴 당연한 일이다. 남자들이라고 수다를 떨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동네 골목마다 널려있는 삼겹살 집마다 둘러않은 남자들이 두런두런 쏟아내는 말들은 무엇인가.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세상 살아가면서 느끼는 이야기, 푸념, 잡소리, 흰소리... 대개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막상 ‘수다를 떤다.’고 작정을 하고 시작을 해보면 조금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늘 수영장으로 올 때 어느 길로 왔으면 더 좋았다는 것부터, 누구네 집 김밥이 맛이 더 좋은 이유에 대한 끝이 나지 않는 토론, 다음번 놀러갈 장소에 대해 어느 곳이 어떻게 좋으니 나쁘니, 회비를 좀더 많이 걷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누구 네는 왜 그렇게 마누라에게 쥐여서만 사는가 등등...
이런 이야기들은 늘상 우리가 대하는 남자들의 이야기와는 조금 메뉴의 성질이 다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 우리들은 이렇게 ‘남성형 수다’를 떤다. 낄낄거리고 웃는 우스개 소리부터, 조금 진지하게 어떻게 하면 우리의 모임을 보다 훌륭한 친목모임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 이르기까지. 또 아이들 교육에 대한 이야기부터 세계의 평화에 이르기까지.
나는 어릴 적 말수가 무지 적은 아이였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너는 그러다가 입에서 썩는 냄새가 나겠다.” 혹은 “입에 공기가 통하게 바람 좀 넣어라” 놀리곤 하셨다. “아이가 참 점잖기도 하네. 어쩜 저렇게 의젓할까!” 는 듣기 좋아라고 하는 어머니 친구들의 수다 레퍼토리 중 일부였다. 나는 그 모든 수다를 들으며 굳건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웅변가의 체질을 타고 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평소에 말이 없던 내가 가끔씩 입을 열면 말이 끊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책에서 주워 읽은 이야기에서 유추해낸 세상의 각종 이야기들을 나름대로의 논리로 풀어나가면, 친구들은 입을 헤 벌리고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듣고 있곤 했었다. 그러니 내가 어머니들의 ‘질 낫은’ 수다에 성이 찰 까닭이 없었다.
영화에 나오는 무서운 인상의 검객들이 그렇듯이, 고수는 칼을 함부로 뽑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일단 칼을 뽑으면 푸른 검광이 하늘을 번득이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듯이 사나이는 함부로 세치 혀를 놀리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일단 입을 열면 논리 정연한 화술과 번쩍이는 기지로 세상을 압도해야 한다. 그것이 ‘입을 사용하는 법’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런데 세상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굳게만 지켜오던 무거운 인내와 신념이 하루아침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빈자리에 이젠 입만 열면 시시콜콜한 남들이 잘 웃어주지도 않는 싱거운 소리를 농담이랍시고 해대는, 나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입’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불과 몇 달사이의 일이다.
그렇다. 모든 것이 사라져간다. 사랑에 대한 굳은 맹서도, 영원히 변치 말자는 철석같은 약속도, 신념도, 동지도. 그리고 내 무겁던 입도... 그것이 바로 인생의 진리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근엄하기만 하던 내가 고깟 수다 좀 떨게 되었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변화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항상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더 좋은 무엇을 마주치면 새로운 ‘이노베이션’으로 자신을 채워야 한다. 세상이 변해가듯이 사람 또한 변해가는 것이거늘.
“흐흐흐- 수다의 재미를 알게 된 사람은 그 감칠맛을 결코 있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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