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살아라.’ 이건 추억이 어린 말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이런 말들을 많이 들어 보았습니다. ‘잘 살아라’ 이런 말들은 요즘도 곧잘 들을 수 있습니다. 문득 ‘착하게 살아라.’란 말을 듣기가 참 힘든 세월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착하게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이 동일하지 않은 세상이고, ‘착하게 사는 것’보다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게 평가받는 세상입니다.
‘착하게 살아라.’라는 광고카피가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착하게만 살아가기도 힘이 들고 착하게 살기를 권하는 사람도 더 이상 많지 않은 세상이지만,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는 ‘잘 살기’만이 아니라 ‘착하게 살기’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것을 그 광고카피가 자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엉뚱한 질문을 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또 한번 엉뚱한 질문을 해봅니다. ‘잘살기’와 ‘착하게 살기’가 왜 다른 것일까요? ‘잘 살려고 애쓰는 노력’은 ‘착하게 살려는 노력’과 상치되는 것인가요? 도둑질이나 깡패 질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루하루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게 바로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언어습관을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열심히 성실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성실하게 사는 사람’ 혹은 ‘착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잘 살아라.’는 말은 익숙한 느낌인데, ‘착하게 살아라.’란 말은 어딘지 어색하게 들리는 것일까요?
다시 생각해 봅니다. 성공한 사람은 그 사람 ‘성공했다.’ 혹은 ‘잘됐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잘 산다’는 말은 사회적인 ‘성공’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성실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그 말의 한 편에는, 그저 성공하지는 못해도 묵묵하게 살아가는 ‘착하기만 한 사람’이란 뜻이 포함된 말인가 봅니다.
어느새 우리사회는 과정보다 결과가 삶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착하게’ 혹은 ‘성실하게’ 살아가는 과정보다는 ‘성공한’ 혹은 ‘잘사는’ 사람을 더욱 부러워하고, 더욱 바람직한 상태로 생각하는 언어습관에 젖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삶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에 피로에 젖어서 퇴근을 합니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는 하루를 성실로 채워가는 순간순간입니다. 그리고 한 방울 한 방울의 땀입니다. 그것들이 모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그저 ‘착하게’사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삶은 더 이상 그런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수의 ‘잘사는’ 사람만이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도대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의 노력의 의미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그저 ‘착하기만 할뿐’ 별다른 가치가 없는 순간들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저는 지금도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는 삶의 매순간의 성실에 담겨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삶의 결과가 아니라.
“성수야 착하게 살아라이-” 란 광고카피가 이렇게 바뀔 순 없을까요? “성수야 잘 되라이-” 그리고 그 광고카피를 듣는 사람들이 마음 한편에서 찡한 감동을 느끼며 “그래. 한때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세상을 잘 못 살았던 때도 있었지...”라고 생각하는 사회가 될 순 없을까요? “그때는 성공만이 삶의 척도가 되던 시대였었지”라고 생각하는 사회가.
이젠 시대가 변했는데, 아직도 ‘잘 되는’ 것이 사회의 목표였던 지난날의 ‘구식적 발상’으로 손자를 염려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런 사회가 될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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