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와 한국계 미국인 이민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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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와 한국계 미국인 이민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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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Lee Isaac Chung)은 미 아칸소 한인 이민 농부의 아들로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어떻게 영화가 더 넓은 수준에서 울려 퍼질지 걱정했다고 한다.

나는 제 자신에 대한 특수성을 믿지 않았다그는 미 시사주간지 타임(Time)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경험이 너무 특별하고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고 타임이 12일자 기사에서 전했다.

정이삭 감독의의 공포는 그의 결과물인 영화 미나리(Minari)’가 초기 상영에서 관객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을 때 그 공포심은 누그러졌다.

이 영화는 아칸소 주에서 가족 농장을 시작하고, 원예와 개인적 위기를 탐색하는 제이콥(스티븐 연)의 뒤를 따랐다 ; 이 영화는 작년에 선댄스(Sundance)에서 관객상을 수상했고, 최근에는 앙상블 캐스팅을 포함한 세 개의 SAG 어워드에 지명됐다. 212일 극장에 상영이 시작, 226일 많은 관객을 끌어 모으는 등, 영화 미나리는 고립, 열망, 세대 분열과 같은 인류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어 많은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정이삭 감독은 이 영화 미나리가 더 많은 관객을 끌어 모으는데 성공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한국계 미국인 농부들과 그들의 가족들로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타임은 소개했다.

미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대학교의 아시아계 미국인 문제를 다루는 리처드 김(Richard Kim) 교수는 정 감독은 처음에 그의 인생 이야기가 독특하다고 믿었으나, 농사는 한국계 미국인 경험으로 깊이 얽혀있다. 1960년대 초 농업은 한국 이민 경제의 토대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농업은 이 기간 동안 많은 아시아 이민자들에게 실질적으로 유일한 생계수단이었으며, 그리고 1965년 이민귀화법(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Act)에 따라 입국한 대부분의 한국 이민자들이 다른 분야로 진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나리에서 묘사된 경험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한국계 미국인 농부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때까지 그들은 스크린에서 그런 특수성을 가진 자신들을 본 적이 없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캘리포니아의 한 가족 농장에서 자란 조셉 정(Joseph Chong)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 타임지는 몇몇 한국계 미국인 농부들에게 이 영화를 보고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면들에 대한 감정 등을 요청했다. 여기에 그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길을 닦아온 역사가 있다.

* 1의 물결

미국에서 가장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같은 도시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한국인 이민자들의 첫 물결은 사실은 농사꾼들이었다.

20세기 초, 일본에 의한 한국 식민지화는 그 곳에서 광범위한 탄압과 빈곤을 초래했다. 동시에 미국은 새로운 영토인 하와이를 개발하기 위해 값싼 아시아 노동력을 찾고 있었는데, 특히 일본 근로자들이 임금 인상을 위해 파업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소 저렴한 임금의 일꾼들이 필요했다.

에리카 리(Erika Lee)아시아 아메리카 만들기 : 역사(The Making of Asian America : A History)”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인 근로자들을 덤불마다 금화가 꽃피운다”"(달콤한) 약속으로 하와이로 유인한 뒤,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무자비하게 긴 나날을 보내게 하면서 하와이까지 먹을 것을 찾아온 대가를 치르게 했다.

한국인 근로자들은 일본인 근로자들보다 월급을 적게 받았고 짐수레 끄는 동물(draft animals)” 취급을 받는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또 1907년 하와이에서 일본인 이주 억제를 목표로 한 행정명령이 한국인들에게도 적용되면서 미국 본토에서 더 좋은 기회를 찾을 기회조차 금지 당했다.

리처드 김 교수는 그들은 엄청난 감시와 감독을 받으며, 극도로 엄격한 노동 체계 하에서 일했고,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았다면서 그들은 주로 어떤 종류의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전장치 밖 저 멀리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한국의 생활환경이 계속 악화되고, 하와이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원래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많은 한국인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할 방법을 찾아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멕시코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그리고 다른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함께 일하며 캘리포니아 농업을 수백만 달러의 사업으로 만드는 것을 도왔다.

리드리, 새크라멘토, 델라노(Reedley, Sacramento and Delano)와 같은 마을에는 노동인구를 가진 한인 커뮤니티가 생겨났다. 동회(洞會, Dong-Hoe), 즉 마을의회가 농원에 조직되면서 한국교회가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배타연맹이 영향력이 커지고, 정치적 힘을 얻으면서 캘리포니아에서는 반아시아 정서(anti-Asian sentiment)가 높아졌다. 한국인들은 괴롭힘과 폭력에 직면했고 식당, 공공 레크리에이션 시설, 이발소 그리고 임대 주택에서 거부당했다.

그들은 귀화 금지령이 내려졌고, 많은 주들이 외국인 토지법을 통과시켜 한국인들이 농지를 매입하고 생산 수단을 통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한국인과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수는 정체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나리에서 널리 묘사된 관습 병아리 감별 산업(chick sexing industry)을 지배)

1965, 존슨 대통령은 부분적으로 시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에 대한 응답으로 1965년 이민 및 귀화법을 통과시켰다. 향후 20년 동안, 한국인들은 35,849명이 도착한 1987년에 정점을 찍으며 수천 명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리처드 김 교수는 한국전쟁(1950625일 발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이민의 증가를 초래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탈선을 초래한 것은 직접적인 군사 개입이었고, 이는 한국의 독재정권을 형성한 것이라며, “이 모든 것들이 한국에서 이주하려는 사람들에게 조건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오늘날 미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계 미국인들은 1965년 이후의 이민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 투쟁의 추억

1965년 이후 많은 이민자들이 연안에 정착하여 LA와 맨해튼에 한인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주류 판매점이나 녹색 채소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고국에서 가졌던 꿈에서 영감을 얻어 시골의 꿈을 꾸었다. 1971, 정용진(Yong Chin Chong)은 학생비자로 우드베리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그는 1년 후에 그의 아내 정선옥(Sun Ok Chong)을 데려왔다. 졸업 후, 그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로스앤젤레스에 주류 마트를 열었다.

그러나 가게에서 몇 차례 강도를 당한 후, 그는 고등학교 농업 공부를 대신 일터로 옮기고 갓 태어난 아기 조셉을 포함한 가족을 캘리포니아 온타리오로 옮기기로 결심했고, 그곳에서 2에이커의 땅을 샀다. 미나리의 제이콥과 마찬가지로 그도 한국 채소를 재배하여 급속히 팽창하고 있는 LA의 한국인들에게 팔기를 희망했다. “나는 그것이 부의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아들 요셉이 통역하면서 한국어로 말한다고 타임은 소개했다.

처음 몇 년은 힘들었다. 미나리의 제이곱처럼, 그는 물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고민했고, 결국 지하 300피트 아래에 있는 개울에 손을 댈 수 있었다. 추가 노동자들에게 줄 돈이 없어 부부는 하루 종일 황량한 들판에서 일하며 자신들을 아담과 이브에 비유했다.

그의 아내 선옥은 극심한 외로움을 경험했다. “땅과 집 한 채뿐이었어요. 그것은 매우 벅찼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고 한국어로도 말했다. “작물을 다발로 묶어놓거나 잡초를 뽑고 혼자 울기만 하는 낮과 밤이 많았다.”

정씨네 가족은 한국의 무, 김치용 배추, 애호박, 파를 재배했다. 그들은 또한 미나리를 길렀는데, 이것은 영화를 보는 것을 특히 신나게 만들었다.

정말 좋은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배추와 무가 필요하지만, 약간의 미나리도 섞어야 합니다하고 정용진은 설명한다. “그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용진과 선옥은 이 영화를 보고, “내가 보고 있는 나만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특히 제이콥의 아내 모니카(한예리)가 한국에서 가져온 굿즈(물품) 가방 가득 든 것을 여는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조셉은 두 사람 모두 그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방법과 관련,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면서 그것은 투쟁과 생존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많은 기억을 되살렸다.”고 말했다.

요셉 자신도 처음에는 한국 할머니의 낯설음을 경계하면서 주변 백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어린 소년 데이비드(알란 S. )라는 인물을 깊이 확인했다. “나는 항상 그녀가 우리 냉장고를 훔쳐간다고 생각했어요조셉은 자신의 할머니의 방문에 대해 말한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이 여자가 왜 여기 있지?‘

왜 그녀는 그렇게 다르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그녀가 우리를 진정으로 아낀다는 것을 깨달았고, 우리 가족 모두가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 그녀를 젊게 한 것

정씨 가족이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바로 그 해, 데이비드 팽(David Paeng)과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농사꾼인 팽씨는 표현대로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부모님과 함께 4살 때였다.

패서디나(Pasadena)에서 팽의 아버지는 가구 부품을 제조하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경비원으로 일하는 등 별난 직업을 다했다. 영화 미나리의 데이비드와 조셉 정(David and Joseph Chong)처럼 팽은 어린 시절을 일부 놀이 그룹에서 유일한 동양인 얼굴로 보냈고, 처음에는 언어를 배우고 동료들과 연결시키려 애썼다.

그는 어머니는 내가 밖에서 아이들과 놀았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아이들이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고 기억한다.

미나리를 보면서 팽씨는 ‘100%의 동감이라고 말한다. 그는 제이콥이 데이비드에게 그를 때릴 막대기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장면에서 웃으며, 그리고 움찔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팽씨는 수년 동안 치과 기구 판매에서 일하다가, 최근에 어머니 팽란희(Ran Hee Paeng)와 함께 농장을 샀는데, 그는 농장을 살 기회가 신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팽씨는 현재 아시아 시장에서 판매되는 중국차와 의약품에 사용되는 중국 대추를 재배하고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 남부의 높은 사막에 대추와 다른 아시아 농작물을 재배하는 나이든 한국계 미국인 농부들의 공동체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도시를 벗어나 조용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좋은 공기, 좋은 날씨, 싼 땅. 그들은 부동산에 투자하고 나무를 심을 수 있다.” 그리고 팽씨가 1,400그루의 대추나무를 가꾸는 동안, 그의 어머니 란희는 그 땅의 온실을 가꾸는데, 그녀는 깻잎, 가지, 애호박, 배추를 포함한 아시아 채소를 재배하고, 그 곳에서 직접 김치를 담근다.

그녀는 4'10, 80파운드 정도지만, 손수레를 밀고 모든 것을 할이라며 그것은 정말로 그녀를 젊게 한다는 것이다.

* 세대 격차 가교 역할

1700여 마일(2,735.81km) 떨어진 미국 미주리 주의 로버츠빌(Robertsville)의 평화마을에는 한국여성들이 모여 도라지, 가지, 배추, 고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이들은 버려진 한인 여성들의 피난처로서 공동체를 세운 한인 이민자 민지 스타크(Minji Stark) 목사가 그곳으로 데려왔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이혼을 하기 전에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과 결혼했었다.

목사는 “40년 전 주변에 한국인이 많지 않았을 때 많은 한국 여성들이 이곳에 왔다. 그들은 향수병이 심했다. 모든 것이 달랐다. 다른 언어, 다른 문화였다“"슬픈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고 말했다.

목사 자신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 대원과 결혼한 후 1979년에 미국에 도착했는데, 그녀는 1945년 미국의 한국 점령 이후 미국 G.I.와 결혼한 수만 명의 여성들 중 한 명이다.

'동맹 속의 섹스'라는 책을 쓴 캐서린 (Katharine Moon) 교수에 따르면, 한미 관계에 있어 군대 속에서의 매춘 등이 성행했으며, 그 결혼의 80%가량이 이혼으로 끝났다고 말했다. 민지 목사는 현재 8명이 평화마을에 살고 있으며, 그들이 한국 채소를 수확하는 것이 그들의 고향과 연결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이어 그녀는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우리는 엄마들이 무엇을 만드는지 기억한다면서 평화마을에서, 우리는 그런 종류의 것을 만들려고 노력하며. 사람들이 와서 정말 즐긴다고 말했다.

민지 목사는 그 영화(미나리)를 좋아했다. 미나리의 순자(윤여정 분)처럼 손주를 돌보기 위해 딸과 함께 살게 된 어머니에 대한 많은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녀는 두 살 난 딸과 할머니가 서로 손가락으로 서로의 언어를 세는 법을 가르치고, 아들이 할머니에게 팬케이크의 개념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등 그 시절 문화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기억했다.

공교롭게도 민지 목사는 미나리의 순자처럼 어머니를 마당에서 동려다가 그만 우연히 살던 곳에 큰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뭇잎을 태우려고 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더 멀리, 더 멀리, 더 멀리까지 갔다. 집에 왔을 때 소방서 트럭 네 대가 있었다. 엄마는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 했고, 너무 무서웠다고 민지 목사는 회상했다.

* 우리는 미국 풍경의 일부

민지 스타크, 데이비드, 팽란희가 계속해서 그들의 땅 조각에 파종하고 있는 반면, 미국 전역의 수천 명의 한국계 미국인 및 아시아계 미국인 농부들도 파종하고 있다. 위스콘신에는 몽족 미국인(Hmong-American) 농부, 캘리포니아 중부 계곡 근처에는 라오스계 미국인 농부, 베트남계 미국인 농부들이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교육을 공유하고 정책 변화를 위해 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아시아계 미국인 농업인 연합과 연결되어 있다.

올해 초 미나리의 스튜디오 A24는 미나리 영화 상영을 발표했을 때, 시사회에 배정된 200장의 가상 티켓이 48시간 이내에 모두 순식간에 팔려 나갈 정도로 흥분은 컸다. 결국 A24300명을 심사에 참여시켰고, 시사회에 초청된 마이 응우옌은 자신의 휴대전화가 폭발했을 정도도 영화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마이 응우옌은 모든 사람들은 이 영화가 얼마나 가슴 아프고 아름다운지에 놀랐다거 말했다고 타임은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응우옌은 시사회를 마친 뒤, 미국 농무부 직원이 아시아계 미국인 농부의 요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 영화가 반()아시아적 폭력이 급증한 해에 특히 강력하다고 말한다. 아시아 농부들에 대한 오명은 고대사와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5년 전 티파티 패트리어츠(Tea Party Patriots)는 조시 할리(Josh Hawley) 상원의원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은 위협적인 중국 사업가가 미주리 농지를 매입하는 것이다. 유튜브의 광고 제목은 중국인들이 우리 농장을 사는 것을 돕는 일을 그만둬라였다.

베트남 계 미국인 마이 응우옌은 우리는 여전히 외국인으로 여겨진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미국 풍경의 일부이고, 우리는 그렇게 해왔다. 우리는 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함께했고, 도움을 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우리를 제대로 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타임 기사의 맺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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