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늦게 나가면 길이 막혀서 결국 그 시간 다 잡아 먹으니까.” 그게 당시 내가 내세운 집을 일찍 나서는 이유였지만, 그게 이유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정작 나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당시 직장초년생. 일단 회사문턱을 넘어서면 저녁에 녹초가 되어 퇴근할 때까지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직장에 가기 전에 한강둔치로 차를 몰았다.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한강변에 도착해서, 7시 반쯤 남보다 조금 일찍 직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전적으로 나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직장 문을 넘어서 전쟁을 치루기 전에 몸과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의미도 있지만, 그 힘든 시간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한 휴식과 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커피자판기 앞에 당시 내가 몰던 소형차를 세우고, 따끈한 커피한잔을 꺼내든다. 그리곤 강가를 무심히 걷는다.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그런 걸 상념이라고 하나? 무슨 생각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 강물이 흐르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가슴이 저려오는 감동이 느껴질 때도 있다. 때로는 그런 느낌을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아무 종이에나 적어보기도 했었다. 한동안 그러다가 나중엔 그 감동이 내 곁에 왔다 사라져 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물결이 쉼 없이 왔다가 흘러가듯이 상념도, 감동도 그렇게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했기 때문이다.
약 한 시간이란 시간을 그렇게만 보내기가 지루한 느낌이 들면, 강가에 쭈그리고 않아 책을 몇 장 읽어보기도 했다. 때로는 차에 다시 들어가 음악을 들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이 역시 가장 좋았다.
늘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는 같은 강의 모습이지만, 강은 날마다 같은 다른 모습으로 느껴졌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 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오늘 본 이후 다시 볼 수 없을 그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때로는 힘이 들고 때로는 많이 지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 말없는 강물은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조금의 여유가 생기면서, 처음엔 생소한 왜지이기만 하던 서울에서 나는 몇 사람의 벗을 사귈 수 있었다. 마음을 잘 열지 않는 편인 내가, 좋은 벗들을 사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인생의 중반에 찾아온 또 다른 힘든 고비들을 그렇게 사귄 벗들과 몇 년을 함께 하면서
많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항상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삶을 살아왔다. 중년에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사귄 친구들과의 교류를 통해, 바람이 실어다 주는 위로를 통해, 그리고 하염없는 강물이 실어다 주는 말없는 사연들을 들으면서,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갑자기 푸른 하늘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쉽지 않은 용기를 낸 나에게 친구들은 따뜻한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그래. 가슴 가득히, 내 영혼 깊숙이 한 아름 넘치도록 푸른 하늘을 담아서 다시 벗들에게로 돌아와 내가 가져온 선물을 펼쳐보이겠노라고, 내 마지막 젊음이 다하기 전에 나는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
서울을 떠나 온 마지막 날 밤. 친구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며 일부러 한강을 따라 차를 한동안 달렸다. 검은 강물은 그날 밤도 여전히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창가로 말없이 강물을 쳐다보면서 마음속에서 많은 말들을 속삭였다.
나는 한강의 강물을 쳐다보며 그 어려운 시절을 넘겨왔다. 그리고 그 후엔 나와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해온 친구들이 있었다.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나에게 마지막 날 한강을 보여주는 배려를 해준 가슴 따뜻했던 그 친구들이 있어서, 힘들었던 세월들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지내올 수 있었다.
말없이 내 하소연을 받아주던 강물. 그리고 말없이 나를 사랑해주던 친구들. 그 강물과, 그 따뜻한 친구들에 응석을 부리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이 있어서 나의 세상은 한결 따사로울 수 있었다.
지금 그대에겐 어떤 이름의 친구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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